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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59화 (159/237)

159화

뜬금없이 나타난 금발의 미청년.

아니, 나이로 보면 청년이라기보단 청소년에 가깝다.

루시아가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그는 뭔가 부끄럽다는 듯 검지로 뺨을 긁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으음, 그거야…… 당연히 가문에서 절 이곳으로 보냈으니까, 겠죠?”

“아.”

루시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워낙 뜬금없는 등장에 경황이 없었지만, 원래라면 케프렌의 기사들이 지원군으로 이곳에 올 예정이었던 거다.

그런 만큼 눈앞의 청년, 아렌 엘 케프렌이 나타난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가주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

“무, 물론! 누님의 상심을 감히 이해하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래도. 어딜 가신다면 행선지라도 이야기해 주셨으면……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고…….”

변함없는 루시아의 적의가 담긴 눈동자에, 말을 이어 나가던 청년의 목소리가 시시각각 쪼그라들었다.

종국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데, 마치 누나가 숨겨 놓은 먹거리를 훔쳐 먹은 동생같이 죄인처럼 굴고 있다.

‘뭐지?’

알페온은 뭔가 모를 위화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꽤, 착해 보이는데?’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루시아의 태도는 절대로 친혈육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만, 평소 그녀답지 않게 타인을 냉대하는 모습은 상당히 생소했다.

루시아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걸 알려 줬다간 널 따르는 원탁의 꼰대들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그, 그건!”

“아니지. 이미 왔지? 검왕이 직접 내 목을 자르려고 리브라까지 기어들어 왔는데. 그런데도 넌 내 위치를 적에게 알려 달라고 하는구나.”

검왕 베하나스의 습격은 루시아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네르하라는 버팀목이 아니었다면, 루시아는 설령 몸은 살아남았어도 마음이 무너졌을 거다.

“그,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당황해하는 상대를 향해 루시아가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날 잡으러 온 거겠지, 아렌? 미안하지만 쉽게 잡혀가진 않을 거야.”

부상이 심한 그녀가 투지를 내뿜자 아렌은 당황해했다.

“그, 그만하십시오, 누님! 전 그럴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루시아 양! 부상이 심합니다!”

알페온까지 목소리를 높이자 주변에서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야 다들 눈앞을 막아선 검은 결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지만, 이렇게까지 소란을 피우면 누구나 눈치챌 수밖에 없다.

알페온이 다급히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아무래도 적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부대 소속이십니까?”

상대가 아군이라면 소개에 응할 것이고, 적이라면 침묵 혹은 무력 대응에 나설 거다.

다행히 상대는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이름을 밝혔다.

다만, 그 정체가 너무 거물이라서 문제였지만.

“케프렌 원탁의 기사, 제12석, 아렌 엘 케프렌입니다.”

“케, 케프렌? 원탁의 기사?”

원탁의 기사.

케프렌에서도 최고의 정예 기사단을 지휘하는 자들로서, 그것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대륙 최강자 라인에 들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지위였다.

‘이 어린애가?’

그 순간, 알페온의 뇌리를 스치는 사실 하나.

“설마, 당신이 소문의 그 ‘대공자’?”

“네, 리브레히트 공자. 부끄럽지만, 제가 케프렌의 첫 번째 계승자는 맞습니다.”

상대가 이쪽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는 건 새삼 놀랍지 않다. 케프렌의 정보력이 리브레히트보다 떨어질 리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뿌득!

그 말이 끝나자마자, 뒤쪽에서 이빨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살기에 가까운 투기가 흘러나왔다.

알페온은 울고 싶었다. 루시아가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고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던 적이 없었다.

‘대, 대체 이게 뭔 상황이냐?’

지팡이가 아닌 검을 쓰는 루시아의 정체를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정체를 유추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이 컸기에 진실을 마음 한구석에 애써 묻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루시아의 정체가 정말 생각하는 그대로라면, 그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누, 누님이 염려하시는 게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뭐?”

“원탁의 장로들이 저를 보필하기 위해 같이 오긴 했습니다만, 저는 그분들에게 누님의 소재를 알릴 생각이 없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

“그리고 결계 안쪽에 들어온 건 저뿐입니다. 지금 지원군은 하루 거리에서 이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알페온은 그제야 놀라움을 토해 냈다.

저 아렌이란 대공자가 정말로 바깥에서 들어온 거라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본진의 마법사들은 힘으로는 뚫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루시아 역시 같은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약간 누그러진 기세로 반문했다.

“그럼 왜 날 만나러 온 거지? 그리고,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고?”

“그야, 동생이 누나를 만나러 오는데 딱히 이유가 필요하진 않잖습니까?”

의외의 정론에 루시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결계는, 검으로 베었습니다.”

“베, 베었다고?”

“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누님도 하실 수 있는데요? 요령이 좀 필요하긴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다고?”

“양극단의 이치에 있는 힘들이 융합하면 아주 잠깐이나마 법칙을 부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아, 물론 그걸 활용하는 테크닉은 별개입니다만.”

양극단의 이치.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요, 마치 마법과 검술처럼 말이죠.”

마치 루시아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아렌은 잔잔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이곳까지 온 두 번째 이유는, 누님에게 융합의 단계를 알려 준 저 너머에 있는 분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너! 어떻게 그걸 알고 있지?!”

검과 마법. 정확히는 오러와 마력의 융합은 루시아조차 네르하를 통해 처음 안 것이었다.

어쩌면 가문의 높으신 분들조차도 이 분야에 대한 가능성엔 무지할 게 분명했다.

아렌은 난감하다는 듯 웃음을 내지었다.

“지켜야 할 약속인지라, 그것에 대해선 말씀드리기 힘들군요. 다만 누님이 향하신 길은 오답이 아닙니다. 그건 확실해요.”

“네가,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아렌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걸 지금부터, 저 사람이 증명해 줄 테니까요.”

씨익!

“원래라면 한 손 거들려고 찾아왔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네요.”

아주 한순간.

루시아는 보았다.

아렌의 입가가, 아주 잠깐이나마 뒤틀린 것을.

“여전히 빌빌거리고 있으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잘하고 있군.”

“너! 무슨 말을!”

“네? 제가 뭘 말했단 말씀인가요?”

아렌은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더 이상 말하지 말라’라는 느낌에, 루시아는 손을 꽉 쥔 채로 이를 악물었다.

아주 작고 낮게 깔린 한마디.

지금까지의 어설픈 모습과는 180도 다른, 지옥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

루시아가 가문을 떠나게 만들었던 ‘악마’가, 아주 잠깐이지만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일개 인간이, 종의 경계를 넘어섰구나.”

비슈나르는 눈앞에서 자신을 가로막는 네르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 일시적인 현상일 뿐. 너의 육체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연으로 사라지겠구나.”

“상관없어.”

네르하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안에 끝내면 되니까.”

“한없이 오만하구나!”

비슈나르의 근처에 수백 가닥의 촉수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직접 네르하를 노리지 않았다.

촉수들의 끝자락이 마치 바나나 껍질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불꽃을 머금은 구체가 나타나, 일직선을 그리며 네르하를 향해 터져나갔다.

쩌―억!

네르하가 있던 자리를 넘어, 수백 가닥의 불꽃 줄기가 하나로 뭉쳐 대지를 갈랐다.

쩌저저적!

혹독한 북방 설산의 환경도 비슈나르가 토해 낸 불꽃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쿠구구궁!

불꽃의 경로를 따라 산맥의 표면이 터져나가며, 거대한 먹구름이 산사태처럼 휘몰아쳤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구름을 본 류레이아가 침을 살짝 삼켰다.

“마치, 화산쇄설류를 보는 것 같군.”

검은 꽃봉오리에 중앙군이 마법을 난사했을 때도 비슷한 광경이 나타났지만, 지금 저건 단 한 존재가 일으킨 참사라는 점에서 더더욱 경이로웠다.

“화력으로 승부를 볼 셈인가?”

저 멀리서 네르하가 날뛰고 있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용을 상대하는 영웅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끝없이 검은 불꽃을 내뿜는 적과는 달리, 네르하의 움직임은 상당히 신중했고, 또 조심스러웠다.

상황을 지켜보던 류레이아는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힘이 모자라.’

모자란 건 힘의 ‘종류’가 아닌 ‘절대치’.

적어도 류레이아의 판단은 그러했다.

‘내가, 놈을 잡을 수 있을까?’

세계수의 수호자인 그녀는, 일반적인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대의’라는 면에서 훨씬 더 강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삼마자의 자리를 받아들인 것도, 바깥세상에서의 높은 지위가 범인류적인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어도 힘들어. 어떻게 영역을 전개해도 영역 자체로 박살 나겠지.’

무엇보다 비슈나르의 권능인 인과무시의 ‘필중’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다.

류레이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할 일은, 결국 하나뿐이구나.’

뒤통수를 맞았든 뭐가 됐든, 잘못된 판단으로 아군을 전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 실책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회해야 하는 일이다.

이미 원정군은 대부분의 기력을 소모하여 비슈나르가 펼친 결계조차 뚫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네르하가 패배한다면 남은 결과는 북방 원정군의 전멸뿐.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모습을 머르딘이나 시저가 봤다면, 정말 백 년은 놀려 대겠지?’

그녀는 부러진 자신의 지팡이. 즉, 세계수의 가지 한쪽을 조심스레 땅에 심었다.

그리고 부러진 나머지 다른 한쪽을 자신의 심장 부근에.

그대로, 박아넣었다.

푸욱!

심장을 파고드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계수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비록 마왕령의 권능으로 외부 마나의 제어가 불가능하다지만, 세계수와의 링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지금 류레이아가 하고 있는 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시전하는 금술.

창세기 세계의 대륙을 창조하는 데 쓰였다던 세계수의 힘이,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넘어 북방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주(禁呪), 필드 오브 세피로트.

심상각인영역인 이그드라실이 사용자의 마력을 통해 세계수의 환경을 가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면.

이 필드 오브 세피로트는 매개체를 통해 세계수의 환경을 실제로 소환하는 것이다.

쩌저적!

북방의 대지에서 발아한 세계수의 뿌리가, 그대로 류레이아를 집어삼키며 덩치를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본인의 생명을 담보로 시전하기에 금주라 불리지만.

그 위력만큼은 절대적이었다.

* * *

네르하는 생각했다.

‘조금 아쉽군.’

원초의 혼돈의 힘을 이용한 강제적인 타통.

생사현관을 넘어 상단전의 문을 강제로 박살 내 경지를 끌어올린다는 네르하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으로 그치고 말았다.

‘신안은 확실히 개안했다. 하지만, 완전하게 모든 혈도를 여는 덴 실패했어.’

이래서는 전투가 끝나면 상단전의 문이 다시 닫혀 버릴 터다.

‘아니, 오히려 잘 된 건가? 목숨은 건졌으니까.’

이런 강제적인 폭주는 필연적으로 반동을 동반한다.

만약 완전히 모든 혈이 열렸다면, 네르하의 육체는 이 전투가 끝난 뒤에 문자 그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졌을 거다.

‘문제는, 이래선 승산이 생각보다 낮아진다는 건데.’

네르하는 지금 회피로 일관하며 철저하게 한 방을 노리고 있었다.

놈은 자신의 권능이 막혔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무지막지한 화력전으로 나왔다.

안타깝게도 네르하로서는 그 화력전을 맞받아칠 여력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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