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보물전 (2)>
‘이자카르가 부활한다고?’
네르하는 말없이 목덜미를 감싼 이자카르를 바라보았다.
―…….
변명을 요구하는 눈빛에도, 이자카르는 조용히 고개를 돌리며 네르하의 시선을 피했다.
“……너.”
―오해다.
네르하의 눈가가 가늘어지려던 찰나, 이자카르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오해지?”
―난 널 어찌할 생각이 없다. 내 영혼은 네게 귀속되었고, 그건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가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종속계약을 맺은 그년처럼 말이다.
이자카르는 속사포처럼 자신의 무고를 증명했으나.
“그럼 반쯤 부활했다는 말은 사실이군.”
―…….
핵심을 꿰뚫은 네르하의 한마디에 다시금 침묵하고 말았다.
‘아직 위험한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쓸모가 있다고 해도, 네르하는 애초부터 이자카르를 100% 신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자카르가 정말 네르하를 도모할 힘을 회복했다면, 이렇게 변명을 하기보다는 손을 먼저 써 댔을 것이다.
네르하가 페레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굳이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이자카르가 발악하려고 할 때 제압하기 위함인가?”
―그것도 있지.
페레스가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하나 이곳에 직접 발을 내디뎌야만 봉인을 풀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흐음.”
―네겐 나쁘지 않을 제안일 거다. 무엇보다 여기 있는 것들은 전투 스타일이 투사에 가까운 너에겐 그다지 맞지 않으니까.
페레스의 말은 확실히 옳았다.
‘하나의 선택지를 이득이 아닌 손실의 보전에 써야 한다라.’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 이자카르가 봉인된 무구, 마령수투에 대해선 어느 정도 대책이 필요하긴 했다.
‘내 제어도 무시하고 멋대로 마기를 빨아들이는 점은 확실히 불안 요소이긴 하지.’
그나마 지금까진 그게 네르하 자신에게 이득이 되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맞았다.
“어떤 식으로 이자카르의 힘을 억누를 생각이지?”
―그 방법은 간단하다.
페레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히고.
―이, 이봐. 내가 너에게 모질게 대한 적이 있나? 공간 계통의 술식까지 대가 없이 건네줬었는데 이러기냐!
이자카르의 말이 급격히 빨라졌다.
네르하는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뭔가를 알고 있군,’
그건 아마도, 이곳에 봉인된 일곱 개의 성유물 중 이자카르가 이렇게까지 애절하게 변할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 거다.
“오히려 흥미가 생기는데? 그 방법이 뭐지?”
―이봐! 야, 임마!
이젠 발악하기 시작하는 이자카르를 무시하며, 페레스가 무언가를 향해 발굽을 들었다.
―저걸 보아라, 네르하 라데우스.
“……저건?”
이 거대한 공간을 맴도는 일곱 개의 성유물 중, 사실 네르하가 가장 먼저 눈독을 들였던 장비.
―성유물의 정의는 ‘신성’이 깃든 아티펙트를 의미한다만, 다르게는 천계의 존재와 인과율이 이어진 물건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는 건, 저 ‘장갑’이 방금 말한 후자에 해당하는 물건이란 말이군.”
―정답이다.
칠흑의 마령수투와는 달리, 새하얀 백색 바탕에 금색 수실이 어우러진 화려한 장갑.
저것을 지적하자마자, 이자카르가 네르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저것만은 안 돼! 그 빌어먹을 년만은 제발!
“저게 뭔데 이 녀석이 이렇게 매달리는 거지?”
―저것으로 놈의 천적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지.
“천적?”
―네르하 라데우스. 너는 이자카르가 어떻게 봉인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음, 일단은 당대 8레벨의 마법사 두 명과 싸우다 봉인되었다고 알고 있다만.”
사실 이자카르가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비슈나르의 배신이었다는 점은 알고 있다.
다만 그런 특급 정보를 페레스 앞에서 떠벌릴 수 없으니 말을 돌렸지만 말이다.
―물론 전승은 그렇게 되어 있지만, 실상은 좀 복잡하다.
그런데, 의외로 페레스는 당시의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8레벨의 마법사 두 명은 이자카르에게 합공하지 않았다. 첫 번째 마법사가 이자카르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고, 두 번째 마법사가 녀석을 봉인했지.
“흠?”
―녀석을 봉인한 건, 마법사로 위장한 놈의 부관이었던 비슈나르. 이번에 토벌된 마왕이다.
“잠깐,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게 다른 놈이라고?”
―그래.
“그게 누구지?”
―베이거스 베스타. 당대엔 ‘베베’라는 약칭으로 불리긴 하지만 녀석의 이름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이이잉!
묘한 울림과 함께, 백색의 장갑이 네르하의 눈앞에 내려왔다.
―녀석이, 대천사 카스카엘을 소환 가능한 이 무구를 다룰 수 있는 녀석이었다는 점이지.
카스카엘.
물을 상징하는 대천사. 얄팍하게나마 익힌 지식에 의하면 천계의 수문장이자 태곳적엔 용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던 자라고는 하는데…….
―물은 모든 원소 중 인체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지. 카스카엘의 힘을 온전히 다룰 수 있다면, 네 목표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물’을 상징하는 존재인 만큼, ‘불’을 다루는 이자카르의 기운을 억누르기엔 가장 최적의 인선이었다.
네르하가 무의식적으로 그 장갑을 집으려고 들 때.
―잠깐! 내가 잘못했다! 그놈만큼은 제발!
이자카르가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네르하의 시야를 가렸다.
―차라리 정식으로 주종계약을 맺으면 되는 문제 아니냐! 그러면 아무 문제없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 될 터다!
“좋아, 한번 해 보지.”
놈이 뭐라고 하든, 이미 네르하의 손은 눈앞에 일렁이는 장갑을 쥐고 있었다.
―내 권유를 받아들여 줘서 기쁘군.
“내게 이득이 될 것을 알기에 선택한 것일 뿐이다.”
사실 이대로 페레스의 권유를 무시하고 다른 아티펙트를 고르는 선택지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설사 이자카르와 주종계약을 체결하고, 녀석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고는 해도.
녀석이 마령수투로 끝없이 마기를 흡수해 대다간, 언젠가 체내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아무리 네르하가 고유 계통이 속성을 자유자재로 변환하는 거라 해도, 만약을 대비해 균형을 맞출 필요는 있었다.
―으아아아악!
그렇게 한 존재의 비명과 한 존재의 흐뭇한 웃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화아아악!
보물전의 최심부. 신화전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려앉았다.
* * *
네르하가 보물전으로 떠난 직후.
주인인 네르하가 사라지자 저택은 상당히 한가해졌다.
한동안 저택에 체류하면서 손님을 상대하던 로젤리아도,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서면서 이곳에 있는 빈도가 확 줄어 버렸다.
네이하야, 애초에 지내는 곳이 따로 있으니 예외.
즉, 지금 이 저택엔 일상을 지내는 고용인들을 제외하면 외부인은 오직 루시아 하나뿐이었다.
“…….”
네르하의 배려로 이 저택에서 지낸 지 며칠이 지난 지금.
루시아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생리현상을 해결하거나 목욕이 필요할 때 밖으로 나오는 정도고, 식사는 물론 일체 모든 일과를 방 안에서 해결했다.
고용인들이 그런 루시아의 행동에 묘한 눈빛을 보낼 때가 많았지만, 루시아는 단 한 번도 고용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용인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보는 광경은, 오로지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모습뿐이었으니까.
루시아는 그렇게 북방에서 얻은 깨달음을, 이곳에서 철저하게 갈무리하고 있었다.
“…….”
점심시간이 지나, 저택 전체의 분위기가 살짝 퍼져 있을 때.
“나와.”
루시아는 눈을 살짝 반개하며 문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오지 않으면 베겠다.”
그럼에도 문 쪽에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루시아가 오른손을 살짝 드는 순간.
스륵!
문틈을 타고 시커먼 무언가가 흘러나오더니, 이윽고 인간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타난 흑의의 복면인이, 루시아의 앞에서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루시아는 서늘한 목소리로 상대를 노려봤다.
“너희가 왜 이곳에 있지? 라데우스와 전쟁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그건 아닙니다. 저희의 존재가 라데우스에 발각당할 일은 없으니 안심하시길.”
다른 누군가가 듣는다면 허풍이라 무시했겠지만, 저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주 직속’ 그림자 암살단의 일원.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분고분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날 죽이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일부러 깔보는 듯한 표정을 내지은 그녀였지만, 곧이어 이어진 흑의인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가주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왔습니다.”
“……!”
“이제 그만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지금, 뭐라고?”
루시아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흑의인은 제 할 말을 다 했다.
“지금 가문으로 돌아오신다면, 공녀의 재능을 높이 사 목숨만큼은 보전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가문을 뛰쳐나온 건 그녀의 일탈이었다.
비록 그 일탈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전대 가주인 할아버지의 도움 덕분이었지만.
절대, 절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가문의 문을 나선 것이 아니었다.
츠츠츠!
그녀의 검, 그란디아가 천천히 부유하기 시작했다.
그란디아의 검신이 저절로 검집에서 풀려나와 정제된 오러를 내뿜었다.
그것을 본 흑의인이 경악했다.
‘스, 스피릿 소드!’
그것도 오러를 담아 형성한 제대로 된 완성형의 기술!
‘지금 공녀는, 당장 원탁의 자리를 노려도 충분할 정도로 강해졌다!’
그가 경악하든 말든, 루시아는 천천히 가부좌를 풀고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가주께서 그런 말을 하신 것은, 이미 가문의 후계자를 아렌으로 결정하셨다는 뜻이겠지.”
“그, 그렇습니다. 가주님이 결정하신 이상, 이제, 어떤 경쟁도 무의미합니다.”
“아니, 무의미하지 않아.”
꿀꺽!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녀임에도, 흑의인은 마치 만년 설산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 무슨!’
자신보다 강자를 마주하면 누구나 압박감을 느낀다.
하지만 흑의인이 느끼고 있는 감정은, 압박감이 아닌 ‘경외감’.
실력에 상관없이 ‘거인’을 마주할 때에나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었다.
“정말로 결정하셨다면, 내 의사 따윈 무시하고 일을 벌이셨겠지.”
루시아는 가주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만약 정말로 아렌을 후계자로 낙점했다면, 라데우스 가문에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그분은 여전히 날 시험하고 계시는구나.’
가주가 여전히 자신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지만.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시험이 될 가능성이 컸다.
“공녀. 공녀께서 무슨 착각을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흑의인이 이를 악물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아렌 대공자의 성인식에선, 그분의 대공자 취임식이 함께 있을 예정입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어떻게 기회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스윽!
그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아의 어검이 흑의인의 목에 닿았다.
한순간, 흑의인과 루시아의 눈이 마주쳤다.
“그 성인식에서, 아렌의 목을 치라는 것이 가주님이 내게 주신 기회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