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헤르메스로 가는 길 (1)>
네르하는 보물전에서 두 가지 아티펙트를 골랐다.
하나는 반지. 또 하나는 장갑.
의외로 이 성유물들에겐 이름이 없다고 했다.
‘장갑은 백령수투라고 할까? 착용감이 다르긴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군.’
네르하는 소위 말하는 ‘템빨’이라는 것에 그다지 부정적인 건 아니었다.
다만 무림 시절 신병이기에 의존하는 강함은 그 한계가 명확해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흐흐흑! 이 나쁜 놈!
네르하는 옆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헤츨링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음에도 결국엔 그걸 가지고 나오는구나!
“아직 소환도 하지 않았는데 엄살이 대단하군.”
―네 손에 착용한 시점에서 내게 영향이 오고 있단 말이다!
마기의 천적인 신성력이 가득 들어 있는 백령수투는 그 자체만으로 이카자르의 마기 흡수를 방해하고 있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흠, 딱히 뭔가 극적으로 바뀐 느낌은 없군.’
페레스는 이 두 가지를 건네주며 오만 생색이란 생색은 다 냈다.
라데우스 역사상 최고의 보물이라느니, 가주가 그만큼 널 아끼고 있다느니, 마하와의 내기에 걸린 마탑보다 이게 더 가치가 있다느니 등등.
‘뭐, 쓰다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네르하가 저택으로 귀환했을 때였다.
이젠 슬슬 집사의 관록이 묻어나고 있는 사미르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네르하 도련님, 비행정이 준비되었습니다.”
“빠르군. 슬슬 돌아갈 때인가?”
헤르메스에 참가하기 전에, 일단은 리브라로 돌아가 정비를 해야만 했다.
이미 저택엔 네르하의 수하들이 준비를 마치고 전원 모여 있었다.
“오라버니.”
“네이하, 있었냐?”
어째서인지 수하들의 묘한 눈빛을 받고 있던 네이하가 네르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앞으로 반년이야.”
“응?”
“반년 후엔 나도 리브라에 들어가니까. 그땐 잘 부탁해.”
뭔가, 네이하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오라버니나 다른 사람에게 패배하는 일은 없을 거야.”
지금까지 패배를 모르던 천재.
하지만 진짜 대양의 넓이를 모르던 우물 안 개구리.
물론, 한참 낮게 보고 있던 자신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만큼,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도 이상하진 않다.
고오오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감정이 제법 과하다?
분노, 수치, 그리고…… 향상심.
아니 무엇보다 네이하를 둘러싼 기운이 평소와는 다르게 불안정하게 일렁이고 있다.
네이하와 싸운 건 이미 일주일도 넘었으니 아직도 저럴 리는 없겠고.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
“너, 누구랑 싸웠냐?”
움찔!
네이하가 그대로 시선을 돌려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대번에 그들이 애매하게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는데.
하나같이 그 시선의 끝에는, 배커가 있었다.
“……배커?”
이젠 자신의 상징이 된 마창 바이던트를 등에 멘 배커는, 해명을 요구하는 네르하의 강렬한 시선에 마지못해서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시비 건 게 아니다. 네이하 저 녀석이 먼저 싸우자고 달려들었다.”
“그래도 싸움이 성립된 이상 용서 없이 두들겼겠지.”
“…….”
그 말에 배커는 부정하지 않고 시선을 홱 돌렸다.
‘그나마 상처가 없는 게 다행인가.’
역으로 말하면, 배커와 네이하의 실력 차이가 그 정도나 벌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네르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됐든 확실히, 배커가 네이하에게 감정이 좋을 리가 없으니.’
분명 자신이 ‘네르하’가 된 이후의 첫 만남에서, 배커는 네이하에게 ‘병신같은 놈’이라고 모욕을 당했지.
게다가 당시의 태도를 보면 단순히 그때만이 아니라 더 이전에도 배커는 네이하의 재능에 눌려 있었던 게 분명했다.
네르하는 살짝 이마를 짚었다.
‘지금은 너보다 배커가 더 셀 거라고 던지듯이 말하긴 했는데…….’
설마 그새 그걸 못 참고 배커에게 시비를 걸 줄이야!
수하들 중 가장 성취가 떨어지는 알페온조차도, 나름 5전(戰) 이상을 경험한 베테랑이다.
배커는 네르하의 수하들 중에서도 현재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
일반적으로 같은 레벨이라도 실력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고려하면, 실전 경험이 전무한 네이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네이하. 네가 리브라에 들어오면 내가 직접 단련시켜 주마.”
“흥, 그러든가 말든가.”
네이하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홱 돌리며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네르하는 그런 네이하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수하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가자고.”
“네! 주군!”
수하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북방으로 출발한 지, 무려 1년 만의 귀환이었다.
* * *
대륙 동쪽.
그란시스 마탑.
대륙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으로, 7레벨에 이른 일곱 명의 마스터들이 공동으로 모여 대소사를 처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마탑의 마스터 중 하나인 60대의 노인, 제일 바룬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흐음, 아쉽군요. 이번 헤르메스의 출품작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이론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전쟁이 겹쳐서.”
“그래도 경연 형식으로 더 화려하게 열리게 되어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번 대회의 예산은 라데우스…… 마하 공녀님께서 내주었으니 부담도 적고 말이죠.”
회의는 여러모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돈 문제가 없다는 점이 이 분위기를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번 헤르메스는 참으로 기대가 됩니다. 마하 공녀님께서 후원하는 마법사 중 무려 열다섯 명이나 대회에 참가했으니 말이죠.”
“전원이 5레벨은 가볍게 넘어선 마법계의 슈퍼 루키들. 개중에는 6레벨에 발을 걸친 천재도 있다죠?”
대대로 헤르메스의 응시자들 대부분이 3레벨에서 4레벨에 분포해 있었다.
하지만 우승자들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최소 5레벨에 이른 천재들이 대부분이었다.
애초에 서른 이전에 5레벨에 이른 마법사들은, 전투 마법을 속성으로 교육하는 라데우스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았다.
각 마탑에도 탑주나 원로의 후계자급은 되어야 가능한 경지이니, 그 희소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번 헤르메스는 참으로 풍족하겠군요. 작년만 해도 5레벨의 루키들은 고작 세 명밖에 없었는데, 올해는 무려 열다섯 이상이라니!”
“이번 응시자들에겐 좀 불쌍한 일이긴 하죠. 마하 공녀의 아이들이 상을 휩쓸 게 분명하니.”
헤르메스가 정식으로 입상하는 논문은 총 23개.
그중 무려 15개가 예정된 거나 다름없으니, 남은 자리는 고작 8개밖에 없는 것이다.
“‘최우수 논문’과 ‘올해의 논문’은 사실상 결정 난 셈이군요.”
많은 이들이 그 말에 공감하고 있을 때.
한 원로가 손을 들어 이런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건 아직 성급한 판단일지도 모릅니다.”
“뭔가 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 원로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크흠!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 헤르메스엔 무려 다섯 개나 되는 ‘특이 논문’이 제출되었습니다.”
“아아, 마나 연공법 말씀이시군요.”
“네, 그렇습니다. 본래라면 3~4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마나 연공법이, 이번엔 무려 다섯 개나 출품되었지요.”
마나 연공법은 그 어떤 술식보다도 비전에 속하는 기밀 중의 기밀.
헤르메스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중 4개가 마하 공녀 측 인사들이 제출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리브라에서, 그것도 네르하 라데우스 공자의 작품이었던가요?”
“곤란하군요.”
네르하와 마하의 존재가 입에 오르자마자, 장내 원로들의 표정에 하나같이 곤란함이 나타났다.
“이번 헤르메스의 결과에 따라, 라데우스의 후계 싸움에 큰 변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말이죠.”
“하아!”
많은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르하와 마하의 내기는 어느덧 이 머나먼 그란시스 마탑까지 닿아 버렸다.
“원래라면, 네르하 공자의 이론은 과감하게 탈락시키는 것이…….”
“그랬다간 라데우스 본가의 손에 마탑 전체가 뒤집어지겠죠.”
“그렇다고 네르하 공자의 손을 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들이 이렇게 옥신각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다못해 그 논문의 수준이 떨어졌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을.”
“그러게 말입니다.”
네르하가 제출한 마나 연공법은, 지금껏 그들이 접해 왔던 것들과는 수준 자체가 달랐다.
그게 어느 정도이냐면, 이번처럼 마하 공녀가 열다섯이나 되는 인물을 일부러 투입하지 않았다면 최고작 수상이 거의 확정적이었을 정도였다.
물론 이곳에 있는 자들이 전부 이런 평가를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신체에 통달한 몇몇 이들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원로들 사이에서 지지부진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것 같군요.”
“결국엔 실제 경연을 들어봐야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결국 그들의 의견은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 주지 말자는 것에 수렴했다.
사실, 이렇게 박쥐 같은 스탠스를 취하다가 마하가 이기기라도 하는 날엔, 여기 있는 마스터들 대부분이 갈려 나갈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 북방의 영웅이란 명성을 토대로 유력 세력으로 떠오른 네르하 일파를 적대시하는 것도, 이들에겐 큰 모험이었다.
“잠깐.”
그때, 지금까지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파라다인,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손을 든 이는, 마탑의 원로 중에서도 가장 신참으로 들어온 자였다.
막내라는 입장상 지금까진 조용히 있었지만, 지위로 따지면 그 역시 발언권이 있긴 했다.
파라다인이라 불린 원로가 나지막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만,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파라다인의 눈가에, 잠깐이나마 검객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는 걸.
* * *
리브라에 도착한 네르하 일행은 또다시 환영 인파에 직면했다.
물론 대부분이 리브라의 경쟁자들이 아닌, 원래부터 리브라에 오랜 시간 체류한 거주자들이었지만.
“드디어 고향에 온 느낌입니다!”
오자마자 2학년으로 진급한 알페온이 기숙사 건물 앞에서 양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뭐, 이곳에 얼마나 있었다고 벌써부터 고향 타령이냐?”
드물게 배커가 쓴웃음을 지으며 알페온에게 딴죽을 걸었다.
다만, 그렇게 말하는 배커의 눈가에도 한줄기 그리움이 깃들어 있던 게 좀 웃기긴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북방에서의 일이 그만큼 고되고 험난한 일이었다는 방증이었을 테지.
“네르하 라데우스, 학장님께서 부르신다.”
그리고 여전히 바뀐 게 없는 기숙사 사감, 에드발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네르하에게 통보했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학장실로 불려간 네르하에게, 루트비히가 건넨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이제 굳이, 리브라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
“그 말씀은?”
“작년까지만 해도 너에게 리브라는 성장의 발판이자, 아직 미숙했던 너를 지켜 주는 방벽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말도 안 되는 급격한 성장을 이룬 지금, 네르하는 굳이 리브라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이제 리브라는 너에게 불필요한 겉옷일 뿐이다. 졸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학점을 이수하기만 하면 외출도, 외박도 자유롭게 하도록.”
그리고 이 말은.
지금까지 그 어떤 예외도 없었던 이곳 리브라에서.
사실상 루트비히가 네르하의 뒤를 받쳐 주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