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흔적(3)>
교황.
현 대륙을 주름잡는 종교 단체의 수장.
과거의 종교는 자신들이 섬기는 이름을 따 ‘무슨무슨 교’ ‘아무개 교’ 등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현대에 와서는 그냥 단순히 ‘종교’라는 이름으로 일원화되었다.
전 세계 추정 신도 수가 1억이 넘어서는, 사실상 대륙 유일 종교의 수장.
그가 바로 현시대의 교황, 라펠테스 2세였다.
마기우스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교황에게 물었다.
“저희야 그렇다 쳐도, 성하께서 직접 발걸음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 의미는, ‘넌 왜 왔냐?’라는 말로 치환이 가능했다.
교황이 너털웃음을 내지었다.
“허허허, 다 늙어 신께 돌아갈 일만 남은 몸인데 인생 마지막 정도는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역시 이 의미를 해석하자면, ‘내가 어딜 가든 내 마음이지 왜 참견이냐?’라는 뜻이었다.
사전에 교황의 방문 통보를 받은 카이젤 역시 의아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보고는 받았긴 했지만…… 저희 이상으로 교황청을 나서지 않는 분께서, 어떻게 교국 밖까지 나오셨나이까?”
교황은 푸근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영웅을, 한번 만나 보고 싶었으니까요?”
“영웅이라뇨?”
“검은 성자, 베드리우스.”
“……!”
“교국을 악으로 물들이던 그 위장자를 네르하라는 영웅이 해치웠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러니, 그들에게 시달려 왔던 저로선, 교국의 오랜 짐을 덜어준 장본인이 누군지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요.”
간만에 카이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하, 그런 이유에서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성하.”
판데모니움의 일파 중 하나, ‘암흑 교단’.
주로 대륙 북동부와 교국에서 활동하던 그들은 교국을 내부에서부터 좀먹는 암이나 다름없었다.
주교나 추기경 중에서도 암흑 교단의 하수인이 발각된 적도 있어서, 수십 년 전에는 대규모의 마녀사냥까지 일어났을 정도로 일이 심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네르하가 그들의 수장인 베드리우스를 비롯해 귀족급 마족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면서 대번에 그 세력이 위축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니라, 최근 남쪽에 대한 문제가 심각해진 탓에 한번 여러분과 대화를 나눠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성하도 저와 비슷하신 이유군요.”
마기우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대수림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본토에 오는 정보의 차단이 심각했지. 하나 이젠 그 장애물이 장애물로 느껴지지 못할 정도로 남쪽 마족들의 세력이 커졌소.”
“라데우스 역시 북방의 일에 집중하느라, 남쪽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지.”
“어쩌면, 북방 이상으로 거대한 일이 될지도 모르지요. 대수림은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대륙 유일의 마경이니까.”
라데우스와 케프렌. 이 두 가문이 영역을 정립한 이후, 이전 인류에게 통곡의 벽이 되었던 수많은 미개척지들이 뚫렸다.
하지만 이런 두 가문으로도, 대수림은 완벽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만약 그 대수림이 마족이든 누구든, 어느 누군가에 의해 통일되었다면 그건 보통 일이 아니오.”
일단 대수림은 규모 자체가 제국의 영토를 가볍게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인데다,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심처로 들어갈수록 수백, 수천 년 묵은 마물들이 그득했다.
과거 대수림에서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온 숲의 종족이라는 엘프들이 대수림의 영역을 크게 4단계로 구분하였는데.
백여 년 전 라데우스에서 8레벨에 이른 마법사를 우두머리로 삼은 탐사대가 3단계의 초입에서 전멸했다는 건 마법계에선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다.
“당장 대마법사 가오른의 수기에 따르면, 3단계에 있는 대수림의 괴물들은 잡졸 하나하나가 고위 마족조차도 쉽게 볼 수 없는 정도라고 했지.”
“하지만, 마왕급 존재라면 가능하지 않겠소?”
“불가능하진 않겠지.”
“대수림을 탈출한 소수민족 생존자들의 증언은 하나같소. 산과 같은 거대한 짐승이 나타나 모든 것을 뒤틀어버렸다고.”
“그리고 심처에 있던 괴물들이 점차 바깥으로 나오고 있다고도 했지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토벌대를 꾸려야 하겠군요.”
교황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마치 짠 것처럼 카이젤과 마기우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카이젤이야 이번 원정으로 큰 전비를 지출한 만큼 꺼려질 수밖에 없었고, 마기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황은 대번에 그 분위기를 눈치채곤 손을 내저었다.
“허허허, 곤란해 보이시는군요.”
“음.”
“으음.”
“이 부분은 헤르메스가 끝나면 다시 논의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네르하 공자가 초대장을 보낸 게 우리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습니다만.”
카이젤은 드물게 골치 아프단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참 심정이 참 복잡했다.
그때였다.
“가주님.”
누군가에게 보고를 받은 대장로 수넨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포권 자세를 취했다.
“무슨 일이지, 대장로?”
“케레스 르브론 대공과 그의 수행원들이 지금 막 도시의 정문을 넘었다고 합니다.”
“…….”
“…….”
케레스 르브론.
그를 일컫는 가장 유명한 단어는 일인지상 만인지하.
제국의 원로원주이자 재상을 겸하는 인물로, 사실상 제국의 살림꾼이라고 불리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이러다가 정말 그 도마뱀 늙은이도 기어 올지 모르겠군.”
―이미 왔네만.
펄럭! 펄럭!
“……!”
세 사람이 있는 자리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 사람의 이목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
그리고 그 손에 꼽히는 거대한 존재가, 금빛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아그란바드. 기어코 당신도 왔군.”
―크흐흐, 이런 재밌어 보이는 일에 빠질 수야 있나?
거대한 골드 드래곤의 몸에서 환한 빛이 일더니, 이윽고 익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나저나 너무하는군, 카이젤. 도마뱀이라니.”
“크흠!”
아그란바드의 핀잔에 괜히 찔린 카이젤이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에게 도마뱀이라고 부르는 건, 목숨 걸고 싸우자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카이젤이라도 아그란바드는 상당히 귀찮은 상대였다.
다행히 아그란바드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시비를 걸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이 한 마디로, 이번 행사에 대한 파란을 예고했다.
“참으로 기대가 돼. 이번 헤르메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 * *
“준비됐냐, 루시아?”
“잠깐만요, 이 부분만 좀 더 확실하게 외우고요!”
루시아는 아직 정리가 덜 된 책자를 뒤적거리며 열의를 불태웠다.
“미안하지만 안 돼.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니까.”
“으으으!”
연이은 밤샘에 루시아의 얼굴은 수척해졌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케프렌의 가주 마기우스가 헤르메스에서 등장하는 게 확실시되자, 루시아의 열의는 그야말로 최고조에 달했다.
숙소를 나서기 전, 네르하가 물었다.
“경연 대기표는 몇 번이냐?”
당연한 말이지만, 루시아가 제출한 이론은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본선에 진출한 상태였다.
루시아가 자신에게 배정된 번호표를 보며 말했다.
“150번, 꼴찌군요.”
“공교롭군, 난 149번인데.”
“노렸다는 거겠죠.”
이런 경연에서 가장 앞번호와 가장 뒷번호는 주목도가 제일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발표자 나름이지, 라데우스의 직계가 직접 나선다면 어느 번호든 가장 큰 주목도를 보일 게 분명했다.
그걸 고려한 주최 측의 꼼수겠지.
“네, 네르하 라데우스다.”
“저 은갈색 머리카락. 정말이야.”
“북방의 영웅…….”
경연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천에 달하는 인파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네르하를 알아보고 있었다.
‘이런 경연은 관객조차 특별하다 이건가?’
전원이 마법계의 관계자, 혹은 마법에 관심이 있는 실력자들뿐이다. 네르하의 기감에 마나가 감지되지 않는 자는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
‘극소수?’
흠칫!
네르하의 시선이 갑자기 한 곳으로 향했다.
“네르하?”
갑작스런 이상행동에 루시아가 의아해했지만.
“쉿!”
네르하는 미소와 함께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때, 네르하의 뇌리에 전음 비슷한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티 내지 말고 자연스레 행동해라, 네르하 라데우스.
‘정말 왔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상대의 정체를 알아챈 네르하가 씨익 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텔레파시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아챈 건 칭찬해주지. 하지만 궁금하군.
아주 희미하지만, 한 줄기의 살기가 네르하의 피부를 찔렀다.
―왜 우리를 불렀지? 무슨 의도로 우릴 이곳에 초대했느냐?
지금 네르하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이들은, 대륙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숨은 자들.
세계 최고의 암살집단, ‘다크 플래시’가 분명했다.
‘수장인 진이 직접 왔나? 아니면 대리인에 불과할 뿐인가?’
네르하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자를 대리인이라 단정지었다.
그래도 명색이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데, 수장이란 자가 이렇게 쉽게 발각되진 않으리라 보았다.
―너희가 내 초대에 응한 것과 비슷한 이유겠지.
―그건, 무슨 뜻이지?
―모른 척 하긴가?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네르하는 싹 가라앉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초마인과 관계되었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면 절대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
순식간에 이런 인파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동요가 흘러나온다.
‘쯔쯔, 살수 실격이군.’
가볍게 던진 떡밥에 이리 쉽게 낚여버리다니.
아무리 진실의 무게가 무겁다 해도, 이렇게 빈틈을 보이면 살수로서는 삼류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곧, 찾아가겠다.
스윽!
그 말을 끝으로, 네르하의 감각에 단체로 반응이 사라졌다.
네르하는 속으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크크큭, 정말 유용하군. 그놈들, 마천회(魔天會)라고 했나?’
사실 이 정보는 인간에게 흘러나온 게 아니었다.
현재 인간 세상에 스며들어서 암약하고 있는 마족 무리들.
전원이 백작급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자들로, 네르하의 지원하에 활동을 개시한 아스타로스가 그들에게서 물어 온 정보였다.
‘뭐, 그놈들을 어떻게 요리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에 집중할까?’
수많은 인파가 가득했지만, 정면의 높은 단상 위에 있는 VIP들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발군이었다.
‘정말 다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아니, 오히려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온 자들도 있었다.
하나하나의 이름값이 막강하다보니, 그들 주변에 있는 그란시스 마탑의 마스터들이 벌벌 떨면서 시중을 들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로 추정되는 한 장년인이 유쾌한 목소리로 외치자, 주변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겹치듯이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번 경연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까 합니다. 마법계 최고의 이벤트가 거의 사상 최초로, 외부 공개로 진행되는 것이니까요!
우와아아아아!
기대감에 가득 찬 마법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오직 이 경연을 보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몰려든 자들이었다.
―그럼 제163회,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시자아아악! 하겠습니다아아아!
경연자가 헤르메스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네르하의 눈이 VIP석 어딘가로 향했다.
‘마하.’
가주인 카이젤의 근처에서, 다소곳한 모습 앉아 있는 여인.
마하 역시 네르하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싸늘한 눈으로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네르하는 작은 목소리로 마하를 향해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네가 이 대회에서 이길 일은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