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헤르메스 (2)>
“마천회(魔天會)라. 용케도 그런 조직이 있는 걸 알았네?”
“날 뭐로 보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마계 백작인데.”
아스타로스는 불만스럽게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네르하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말을 이었다.
“굳이 라데우스에 합류하지 않고 밖에서 활동하겠다고?”
“그래, 사정을 보아하니 내가 그 리브라라는 곳까지 따라가긴 힘들 것 같다만?”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주종관계를 맺었다 해도, 리브라는 라데우스의 미래.
0.1%의 확률이라도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이상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라데우스의 본거지에 틀어박혔다간 언제 어디서 모르모트 꼴이 될지도 모르지. 혹은 내게 원한을 가진 자가 습격해올지도 모르고.”
물론 그녀라면 어지간한 위협엔 꿈쩍도 하지 않겠지만, 그런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마족들에 대한 정보원이 될 것을 자처하는 아스타로스의 태도는 훌륭했지만, 네르하는 그녀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주종관계의 맹약이 절대적이라고는 해도 맹신은 금물이었다.
언제 어디에서 계약의 허점이 드러날지 모르는 만큼 더더욱.
“왜 굳이 마계로 돌아가지 않고 날 도우려고 하지?”
사실 네르하에게 있어, 아스타로스는 꽤 껄끄러운 상대였다.
류레이아에게 멱살을 붙잡혀 협박당하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독심.
거기에 나름 능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정말 어둠 속에 숨어든다면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내 세력을 재건해야 하기 위해서다.”
“세력의 재건?”
“비슈나르가 봉인되었다 해도, 그 부하들은 여전히 건재하지. 하나같이 역소환으로 힘의 일부분을 잃어버렸다 해도, 세력 자체가 소멸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아스타로스의 배신을 알아차린 그들은, 전력을 다해 그녀의 영지를 밀어버렸을 것이다.
“나와 연결된 부하들의 영적 연결이 대부분 끊겼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이몸은 마계영역이 봉인된 그저 쓸모없는 마족일 뿐이지. 후후후.”
“어, 음…….”
한껏 쓸쓸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긴 한데.
‘저게 연기인지 진심인지 참 헷갈리는군.’
실제로 마계영역이 봉인된 것도 맞고, 세력을 모두 잃어버린 것도 맞아 보이는데…… 왜 저렇게 연기하는 것마냥 가증스러워 보이지?
살짝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한 아스타로스가 표정을 고쳤다.
“어찌 됐든, 우리 주인님이 날 조금 도와준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도움이라면?”
“회(會)라고는 하지만, 결속력 따윈 없는 것들이지. 마족들이란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동족의 파멸 따윈 웃으면서 지켜볼 녀석이거든?”
“그 말은, 내부에서 붕괴를 유도할 수 있다는 뜻이냐?”
아스타로스의 반응은 네르하의 예상보다도 더했다.
“후후후, 굳이 아깝게 붕괴시키려고? 철저하게 우리 주인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야지.”
그녀의 눈이 요염하게 빛났다.
“정치라는 것에선, 영원한 적과 아군은 존재하지 않잖아? 그게 설사, 종족 간의 장벽이라 해도 말이지.”
“…….”
확실히 아스타로스의 말은 맞았다.
현재의 네르하는 전생에 구분했던 정사마의 경계보다는, 네르하라는 존재의 영예, 그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네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보 수집이다.”
“흐응.”
“정보 수집에 대한 권한과 지원은 해주겠지만, 멋대로 행동하는 건 곤란해. 허튼짓은 하지 말도록.”
그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마천회란 집단에 대한 정보 수집.
설사 그 마천회란 놈들을 이용해 뒷공작을 벌이더라도, 그건 그들을 철저하게 파악한 이후가 돼야 할 것이다.
아스타로스는 네르하의 철벽같은 태도에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아직은 신용을 얻진 못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내 활약을 기대하라고. 깜짝 놀랄 성과를 가져와 줄 테니까.”
그리고 얼마 후.
아스타로스는 정말로 네르하가 놀랄 만한 정보를 가져와 버렸다.
* * *
대륙 남부 대수림의 입구, ‘금역(禁域)의 강’.
남부의 대수림이 아무리 이 세계 최고의 마경이라고는 하지만, 지금껏 마법적인 문명을 이룬 인간의 손에서 그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제국과 대수림의 경계를 나누는 거대한 장강의 존재.
인간은 물론 대수림의 마물들까지 쉽게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천연의 경계선이었다.
그런 경계선에서, 저 건너편을 살피던 엘프가 하나.
“오늘도 별다른 이상은 없군.”
대수림의 이상을 감지한 대륙은, 몇 개의 세력이 힘을 합쳐 수천 명에 달하는 경계 단체를 만들었다.
물론 나라 하나를 충분히 가르는 강의 크기를 고려하면 수천 정도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다만 눈이 밝고 감각이 예민한 엘프족들을 대거 차출한 덕에 최소한의 감시는 가능했다.
“믿기지 않군요. 천여 년 전에는 우리가 저런 마경에서 살았다는 게.”
한 부하 엘프 하나가 저 건너편을 내다보며 말했다.
“언젠간 돌아가야 할 곳이긴 하지. 저곳은 우리가 자연에서 도태되었다는 끔찍한 증거이니까.”
당시 동방에서 발견된 세계수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엘프들은 소수의 명맥만 남기고 멸종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말로 저 안에 엘프 전사들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괴물들이 우글거립니까?”
세간에 엘븐 레인저라 불리는 엘프들의 전사계급은 적어도 숲에선 절대적인 위상을 뽐냈다.
부하의 물음에 대장 엘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뒤적였다.
“나도 들은 얘기지만, 전대의 엘프 전사들은 세계수의 힘이 없어도 지금보다도 두 배는 강했다고 하지. 그런데도 우리 엘프들은 단 한 번도 대수림에선 포식자였던 적이 없다고 하더군.”
“그, 그 정도입니까?”
“음, 예전 할아버님께 듣기론 대수림의 심처에 무언가 고대의 유물 비슷한 게 있다고 하더군. 그게 마물들에게 힘을 내려준다고 들은 거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임종 직전에 하신 말씀하신 말이라.”
“하하하, 그런 게 있다면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가만히 놔두질 않았겠죠.”
“뭐, 그렇겠…… 어? 자, 잠깐!”
실없이 웃던 엘프 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방 주시! 무언가 이상하다!”
“……!”
엘프 대장의 외침에 부하들의 표정 역시 일변했다.
꿀렁! 꿀렁!
숲이 울렁거린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광경.
저건 무언가 마력적인 현상이나 기상 이변으로 인해 생긴 일이 아니다.
“대, 대체…… 몇 마리야 저게?”
눈이 좋은 엘프들은 저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몰려오는 마수들의 숫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수천? 수만? 아니, 최소로 잡아도 수십만은 될듯싶었다.
“정신 차려라! 대략적인 숫자를 파악하고 후퇴 준비해!”
“그, 그레이 경!”
그때, 라데우스의 마법사들이 다급하게 엘프 대장을 찾아왔다.
“지, 지금 천리안으로 확인했는데, 저, 저 안쪽에…….”
“안쪽에 뭐가 있소!?”
“최, 최소 수십 미터는 넘어가는 거대한 ‘괴수 떼’가 있었소.”
“떼, 떼!?”
“그 숫자가 못해도 수백에 이르오! 그, 그리고…….”
“그리고 뭐요? 할 말이 있으면 끝까지 말하시오!”
“어, 어쩌면, 저 크기와 숫자라면, 강을 정면으로 넘어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지도…….”
“……!!”
지금까지 대수림에 저런 크기의 괴수들이 다수 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은 이유는, 저것들이 누군가의 밑에 뭉칠 가능성이 0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대수림의 생태계가 붕괴했구나.”
이전에도 적지 않은 수의 괴수들이 강을 넘어 도하를 시도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 경쟁에서 도태된 것들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물론 대수림의 생태계에 지각변동이 생겼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라데우스도 케프렌도 이렇게까지 본격적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거의 절대다수가 패닉에 빠져 대응법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모두 정신 차려라.”
은색의 갑옷을 입은 녹색 머리카락의 엘프 여인이 지휘부에 나타났다.
그 엘프 여인의 모습을 본 다른 엘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수, 수호자님!”
“셀로미엔 사령관님!”
셀로미엔 엘마이넨.
류레이아의 뒤를 이은 세계수의 수호자이자, 엘븐 포레스트의 경비대장.
지금은 라데우스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세상 경험을 쌓기 위해 잠시 사령관 직위를 가지고 바깥으로 나온 인물이기도 했다.
“인근 지역 전체에 공문을 돌려라. 최소한의 경비 병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차출시켜!”
셀로미엔은 차기 삼마자에 배정될 인물인 만큼, 이 인근에선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지휘관이었다.
“하, 하지만 이 인근은 제국의 영역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공문을 무시할 가능성도…….”
“그런 놈들이 있다면 정보 공유를 중지하고 내버려 둬.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루리엔에 계신 가주님께 지급으로 연락을 드려라. 북쪽에 있는 주도를 통했다간 너무 늦어.”
“예!”
“강 인근에 퍼진 전력을 모두 불러라. 우린 물러나서 방어선을 구축한다.”
“명을 받듭니다! 수호자님!”
부하들은 사령관의 명령에 사기를 높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을 내뱉는 셀로미엔의 입가엔 미미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저 강 너머 멀리서,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거대한 존재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 * *
헤르메스의 2일 차가 밝았다.
백여 명이 넘는 경연자 중 1/3이 경연을 끝냈고, 그들 중 대다수가 입상에는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장렬히 침몰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작년 기준으로는 충분히 입상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응시자가 심사위원들을 향해 억울함을 담아 소리쳤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그런 응시자를 향해 냉정하게 선언했다.
“작년 기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번에 제출된 수준을 평가한다면, 자네의 이론은 어림도 없네.”
“그, 그럴 수가!”
“솔직히 말해, 자네의 수준은 이번 대회에선 하위권이야. 더 할 말은 없으니 이만 물러가게.”
냉정한 심사위원의 말에 그 응시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터덜터덜 경연장을 나가버렸다.
그런 냉정한 모습에 다른 심사위원이 살짝 혀를 찼다.
“너무하는군요. 그래도 나름 가능성이 있었는데요.”
그 말에 폭언을 날린 심사위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이 사실인걸요. 특히, 이다음에 발표할 이를 생각하면 더더욱 말이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갈색 머리의 미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라데우스 특수마법개발부 소속 마법사, 지엔 시룬이라 합니다.”
마하가 네르하를 뭉개기 위해 투입한 십여 명의 인원 중 하나.
비록 전투 분야는 아니었지만, 마하가 직접 찍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루키였다.
“제가 이번에 헤르메스에 제출한 이론은, ‘마나 연공법’입니다.”
스윽!
자신을 지엔이라 소개한 청년이 경연자 대기석으로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호오?’
네르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