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케프렌 (1)>
남부 방어군의 절반이 괴멸? 사령관이 중상?
네르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대체 뭐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정면으로 들이박지 않은 이상 그 정도 피해는 나오기가 힘들다.
“그라이아나 산맥을 넘어서던 대수림의 괴수들 일부가 산맥 근처에 있는 소도시인 벨가를 노렸다고 합니다.”
“도시를 포기하지 못했군.”
“네, 문제는 그 괴수들의 일부라고 해도 숫자가 무려 5천이 넘어가는지라…….”
네르하가 알기로 대수림 인근에 모여든 남부 방어군 병력의 수는 약 5만 정도였다.
5만 대 5천. 겉으로 보면 문제가 없었지만, 상대 5천이 전부 일당백은 가볍게 찍는 대수림의 괴수들이라는 점에 있었다.
“다행히 마법사 전력엔 큰 피해가 없지만, 제국군의 피해는 상당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남부 도시 전체에 징발령이 내려졌고, 라데우스 휘하 자치지역인 이곳엔 특히 마법 전력의 지원을 강력히 요청해왔습니다.”
네르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조금 이해할 수 없군. 정면 승부가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왜 도시를 포기하지 못했지?’
이미 대수림에 대한 라데우스의 대응 전략은 확실해졌다.
남부 일부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방어선을 최대한 좁히고, 마법 전력을 집중시켜 적을 섬멸하는 것.
물론 도시를 포기한다는 건 시민들에겐 잔혹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괴수인 이상 대피령을 내려도 얼마나 탈출할지도 미지수니까.
‘하지만 내가 셀로미엔이라면 분명 방어선을 좁혔을 거야. 일반 군대를 괴수들과 정면으로 충돌시킨다면 중장비를 갖췄다고 해도 죽도 밥도 안 되니까.’
대수림의 괴수들은 북방에서 보았던 마물들과는 다르게, 하나같이 덩치가 거대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걸 알 텐데도 굳이 충돌을 했다면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상대의 기동력에 당해 원하지 않는 전투를 벌였거나.
또 하나는 전투를 벌인 그곳에 퇴각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했을 가능성이었다.
“그, 사령관 셀로미엔님으로부터 네르하 공자님께 온 전언이 있습니다만.”
“전언?”
셀로미엔은 네르하의 존재를 잘 알 것이다.
북방에서 류레이아와 협력관계를 구축한 이상, 그녀의 후계자인 셀로미엔은 잠재적인 네르하의 아군이나 다름없으니까.
“하나는 본대에서 빠져나온 5천의 괴수들은, 어디까지나 낙오 부대가 아닌 통솔자가 존재하는 하나의 부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는 건 두 가지 추측 중 전자에 무게가 실린다.
군대 전체가 기병이 아닌 이상, 광활한 남부의 영토에서 후퇴엔 한계가 있을 테니까.
“하나가 있다면 다음은 뭐지?”
“괴수들의 진격 방향에, ‘그렌 타운’이 있다고…….”
“이런 젠장.”
그렌 타운은 명실상부한 네르하의 영역.
위치가 남쪽에 있긴 해도 전선과는 거리가 있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흐를 줄이야!
‘아니, 이게 단순히 우연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겠지.’
네르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대수림에서 물경 십만이 넘는 괴수들이 출몰하면서, 대륙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헤르메스가 끝난 이후 카이젤과 마기우스, VIP들은 사태 해결을 위해 황급히 루리엔 시를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수림의 괴수들이 금역의 강을 건너는 데 시간이 꽤나 걸린 데다, 제국의 남부지역은 그 광활한 넓이에 비해 인구수가 상당히 적다는 점이었다.
“어, 어찌하시겠습니까?”
“뭐가 됐든 지원은 보내야겠지.”
지원을 보내도 네르하 본인이 직접 출격하느냐, 아니면 휘하 세력만 보내느냐의 문제였다.
네르하는 고민했다.
‘고작 일주일 남은 시간으로는 이곳을 나갈 수가 없다는 게 문젠데.’
전투에 참여하게 되면 최소 한 달은 자리를 비우게 된다. 케프렌으로 가야 하는 네르하의 입장에선 그만한 시간을 비울 수는 없었다.
‘지원을 보내더라도, 최소 7레벨 중반 이상의 실력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레이첼이 있다면 딱이겠지만, 그녀는 이미 리브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뭔가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자가…… 아!’
네르하의 뇌리가 한순간 번뜩였다.
지금 이 도시에서 딱 한 명 존재했다.
이번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존재가.
* * *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 하지?”
마하 라데우스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네르하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번 헤르메스 패배의 후폭풍을 수습하느라 잠시 루리엔 시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리 갑작스레 네르하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마하의 싸늘한 냉대에도 네르하는 싱글거리며 답했다.
“이번에 손해를 많이 보셨을 텐데, 이 기회에 그걸 벌충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그 손해가 누구 때문인지 알면서 지껄이는 것이냐?”
“그야 내기에 패배하셨으니까요. 그 정도 리스크는 지셔야 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능글거리며 속을 긁는 네르하의 모습에, 마하는 하마터면 눈앞에서 마력을 모아 쏘아 버릴 뻔했다.
‘빌어먹을!’
확실히 그와는 별개로 네르하의 말이 맞긴 했다.
전쟁이 벌어지는 사이 네르하의 세력을 실각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직 루리엔 시를 떠나지 않았던 건 가까운 곳에서 남부의 상황을 체크하고 유사시에 개입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남부의 패잔병들을 수습하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면, 떨어진 입지를 회복시킬 수 있을 텐데.’
문제는 현재 마하에겐 군권이 없다는 점이다.
사설 병력을 모을 수 있는 역량은 대부분 중앙에 있고, 그나마 남부의 유일한 거점이던 루리엔 시는 네르하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그 네르하가 직접 찾아와 루리엔 시의 군권을 넘겨주겠다는 상황.
루리엔 시의 병력만 있다면, 남부 사령관과 조율해서 충분히 남쪽 전선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너무 사정이 좋군.”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말해봐.”
“동원하실 수 있는 병력은 그란시스 마탑의 최대 절반까지. 물론 절반을 가져갔다고 해도 의미 없이 소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날 믿지 못하는구나.”
“당연하죠. 제가 누님이었다면, 이 기회에 마탑 세력을 정리한 다음 중앙으로 올라가 누님의 기반을 전부 청소했을 테니까요.”
흠칫!
한순간, 마하는 어깨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뭐, 뭐지?’
그 말을 담담하게 내뱉은 네르하의 눈에선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
마치 자신의 계획이 대번에 간파당한 기분이었다.
“서로가 사정이 있으니, 이번엔 피해 끼치지 말고 이용만 하는 선에서 끝내자는 겁니다.”
“그, 그렇군.”
잠시 자신이 쫄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마하는, 이를 악물며 필사적으로 네르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다른 조건이 더 있나?”
“몇 개 더 있습니다만,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절대로 그렌 타운까지 적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어차피 남쪽 전선에선 그렌 타운보다 수비에 적절한 ‘페트릭 요새’가 존재한다.
마하가 제정신이 박혔다면, 굳이 그 요새를 내버려 두고 그렌 타운까지 적을 끌고 올 이유가 없었다.
마하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 그러지.”
생각보다 화끈한 수락에 네르하의 표정이 순간 멈칫했다.
‘뭐지? 좀 더 튕길 줄 알았는데?’
“조건이 있다면 한꺼번에 말해.”
“아, 예, 그럼…….”
그 이후로 네르하는 마하와 몇 가지 사안을 조율했다.
그리고 마하는 대부분의 조건을 매우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마하와의 협상을 마친 네르하는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세이라를 호출했다.
“세이라.”
“네, 주인님.”
어느덧 널널한 환경에서 뱀파이어로서의 능력을 각성하기 시작한 세이라가 네르하의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네르하는 세이라를 향해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네슬렉 장로에게 연락해. 마하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마하 공녀가, 정쟁을 일으키리라 보십니까?”
경지를 넘어 육감을 개척한 네르하의 감각은 마하의 감정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르하는 확신에 차 말했다.
“분명히. 100%다.”
* * *
그로부터 계속해서 시간이 흘렀다.
네르하에게 군권을 위임받은 마하가 그란시스 마탑의 마법사 3백여 명과 일반병사 3천여 명을 이끌고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라데우스의 사절단을 이끄는 지렌 장로가 루리엔에 도착했다.
북방에서부터 꽤나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지렌은, 네르하를 바라보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헤르메스의 결과는 들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파급되는 영향 역시.”
“운이 좋았죠.”
“흥, 운으로 마하를 꺾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밑에 포진한 수상자들이 죄다 마하의 끄나풀들이었거늘.”
확실히 이번 헤르메스는 마하의 지원을 받은 젊은 마법사들이 상을 독식했을 정도로 다름없었다.
다만 가장 최고봉, 우승을 차지하지 못해 네르하에게 패배했지만 말이다.
지렌이 네르하에게 말했다.
“케프렌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무엇입니까?”
“일단 아렌 루 케프렌의 성인식 자체는 원래 거창하게 기획되었지만, 또다시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상당히 약식으로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순간 네르하의 마음속에 아렌에 대한 동정심이 치솟아 올랐다.
대가문의 후계자가 성인식이 뒤로 밀린 것도 모자라 규모마저 줄어들었으니,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기에 성인식에 가주가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들 역시 푸대접을 받을 가능성도 크지. 그걸 염두하고 사고를 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물론입니다.”
이미 케프렌의 영토인 제국 남서부와, 그에 인접한 왕국과 공국 몇 군데는 완전히 비상사태에 돌입해 있다.
대수림의 괴수 10만.
그 1/10만 있어도 나라 하나 정도는 가볍게 멸망시킬 수 있는 만큼 그야말로 총력전을 동원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케프렌의 본성에 도달하면 고약한 시험을 치러야만 한다.”
“고약한, 시험 말씀입니까?”
그 시험의 내용이 생각났는지, 지렌의 표정이 대번에 썩어들어갔다.
“검의 성지에 발을 내민 만큼 그 자격을 증명하라고는 하는데, 말만 그럴듯하지, 실상은 케프렌 놈들의 악질적인 심술이야.”
지렌은 ‘이래서 케프렌엔 가고 싶지 않았는데.’ 하며 혀를 찼다.
“뭐, 그쪽의 대공자가 왜 널 지목했는지는 몰라도, 별일은 없을 거다. 편히 갔다 오면 돼.”
지렌으로선 당연한 판단이었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전쟁이 터진 이 시점에서, 케프렌이 굳이 라데우스에 시비를 걸어서 좋을 게 1도 없으니까.
‘과연 그럴까?’
하지만 네르하는 그런 지렌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의 옆에서 조용히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는 루시아의 존재 때문이었다.
―미안한데, 케프렌의 내부 사정이 조금 변한 모양이야. 마기우스가 후계 관련으로 뭔가 일을 벌일 모양이더군.
‘일을 벌인다고요? 무엇 때문에요?’
―그거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 아무튼 전했으니 난 간다.
‘아니, 잠깐! 정확히 설명해! 야! 이 빌어먹을 도마뱀아아아!’
―이 몸도 나름 바빠서 말이야! 나머진 알아서 알아보도록! 하하하하!
약간의 대응할 시간이 있을 거라 장담했던 아그란바드가, 이후 네르하를 찾아와 자신의 발언을 정정한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문제는, 이 이후로 루시아가 네르하에게 대련을 요청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는 점에 있었다.
헤르메스가 끝난 이후. 정확히는 네르하가 아그란바드와 헤어진 이후부터 루시아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달라진 루시아의 모습에, 네르하는 직감했다.
‘분명, 케프렌에서 뭔가 사고를 칠 생각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