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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196화 (196/237)

196화

<케프렌 (2)>

물론 물어본다면 루시아는 대답해줄 것이다.

하지만 루시아의 사정은 어디까지나 루시아의 것.

동료든 뭐든, 타인이 그것을 함부로 들춰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루리엔 시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루시아가 네르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성인식에서 아렌을 죽일 겁니다.”

“……뭐?”

뜬금없는 급 전개에 네르하는 당황했다.

“가주님의 확언을 받았습니다. 아렌을 죽일 수 있다면, 후계자의 자리를 제게 주시겠다고요.”

“아, 아니, 이렇게 갑자기?”

“제게 남은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기회이니까요.”

루시아는 이미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아렌의 성인식은 그의 소가주 취임식과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가문의 기반이 모두 날아간 제게, 이 성인식이 무사히 끝난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네르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성급해.’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루시아의 말이 사실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이길 자신은 있냐?”

루시아는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몰라요.”

“지면 죽는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설사 당신이라 해도, 모든 싸움에 확신을 가지진 않잖아요? 이것도 마찬가지라 생각해요.”

그 말은 맞다.

과거 천마와의 싸움도, 그리고 비슈나르와의 결전에서도 그 자리에서 죽을 생각으로 놈에게 달려든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승산 없는 싸움에 어리석게 머리를 들이미는 건 별개의 일이야.”

중원의 마지막 결전에선 수많은 동료들이 시간을 끌거나 천마의 힘을 빼준 탓에 승리 할 수 있었다.

북방에서도 마찬가지. 만년빙정과 엘로이아, 클로이아라는 최후의 변수가 존재했기에 낮은 승률이라도 도박에 나선 것이다.

“아렌 루 케프렌의 역량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상, 섣부른 일대일 대결 신청은 금물이다, 루시아.”

나름 신경을 써서 한 조언이었지만.

루시아는 뭔 말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그러진 않죠. 제가 미쳤다고?”

“으응?”

“애초에 아렌이 제 일대일 승부를 받아준다는 보장도 없어요. 단순히 시간만 끌면 후계자의 자리가 굴러오는데, 아무리 일 공녀였다고는 해도 가문 밖을 뛰쳐나온 저의 제안은 아렌의 수하들 선에서 차단당할 가능성이 크겠죠.”

“그, 그렇군.”

네르하는 반성했다.

루시아의 정직한 면만을 보아 왔던 만큼, 솔직히 그녀가 성인식에서 다짜고짜 깽판을 놓을 줄로만 알았던 것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 깨끗하든 더럽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최종 결전이 아렌과 루시아의 싸움으로 결판난다는 건 변함이 없다.

“그래서? 아렌에게 어떻게 접근할 생각이지?”

“현재 상황에 불만을 가진 자가, 케프렌 내에 저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겠지.”

“전, 성인식에서 그들과 아렌을 상잔시키려고 합니다.”

케프렌의 가계도는 라데우스만큼이나 복잡했고, 현 가주 마기우스의 자녀들 역시 라데우스만큼이나 수가 많았다.

“하지만 괜찮을까? 성인식과는 별개로 소가주가 된다는 건 어느 정도 세력 정리가 끝났다는 뜻일 텐데?”

“물론 그렇겠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이번 일은 대륙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급하게 서두른 느낌이 크니까요.”

원래라면 큰 피가 흐른 뒤에야 정상적인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케프렌은 라데우스 이상으로 조급함을 드러냈고, 그 결과로 케프렌 내부에선 아렌에 대한 반대 세력이 아직 충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케프렌의 힘은…….”

“줄어들겠죠. 분명. 성공, 실패의 여부와 관계없이.”

루시아가 네르하에게 물었다.

“절, 혐오하십니까?”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전 당신처럼 멋지게 판을 뒤집을 힘이 없습니다. 목적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당연하게 하고, 피를 보아야 한다면 기꺼이 봐야만 하죠.”

뭐, 세상 절대다수의 인간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루시아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에서 지금의 지위까지 오른 네르하를 동경했다.

네르하는 피식 웃었다.

“뭘 혐오씩이나.”

“…….”

“예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난 선이 아니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살인도 악행도 저지를 수 있지.”

“하지만 당신은…….”

“내가 별다른 피해 없이 여기까지 온 건, 그냥 운이 좋아서야.”

네르하가 말했다.

“북방에서 네가 나에게 말했지. 패업의 길에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얼마든지 짊을 나눠 지겠다고.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나아가라고.”

그 격려와 뒷받침이 있었기에, 네르하는 망설임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말할 차례로군.”

턱!

네르하가 루시아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정점에 올라라. 뭔 짓을 해서라도. 이기는 게 장땡이야. 세상은 패자의 변명을 들어주진 않는다.”

“…….”

“라데우스고 뭐고 상관없어.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내가 도울 테니까.”

이 말을 저 바깥에 있는 지렌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다 못해 쓰러질테지만…….

그래도 네르하는 진심이었다.

네르하의 말을 들은 루시아는 한동안 멍하니 네르하와 눈을 마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한결 편해진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 * *

제국 서부, 케프렌의 주도.

로엘 소드.

이곳은 마공학의 최첨단을 달리는 라데우스의 주도, 베리타스에 비해 분명 기술적인 문명 면에선 분명 떨어졌다.

하나 천여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발전해 온 덕에 웅장함과 거대함만큼은 베리타스와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 로엘 소드의 최심부이자, 케프렌 혈족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

검의 성지.

그 성지의 어딘가에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한 사내가 사람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장막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루시엘라가, 왔다고?”

“그렇습니다, 나이우스 공자.”

이윽고, 장막 너머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이가 없군.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나이우스라 불린 청년은 진심으로 루시아의 복귀를 이해하지 못했다.

수하가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공자께 힘을 보태려고 찾아온 것이 아닐는지요?”

“흥! 넌 그년이 얼마나 욕심에 가득 찬 년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을 뿐, 확실히 욕심의 정도로만 따지면 자신이나 그년이나 도긴개긴이었다.

“그래서? 뭔가 믿고 있는 게 있을 테니 기어들어 오는 것일 텐데, 원탁 중에 누가 움직이고 있지?”

“검왕 베하나스가 그분에게 동조하는 움직임은 있습니다.”

“하! 검왕? 지금 장난해?”

나이우스는 어이가 없었다.

“실력에 이어 이젠 눈까지 삐었나?”

베하나스가 루시아 암살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라데우스의 포로가 된 사실은 원탁에선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물론 일의 은밀함과 중요도를 생각하면 원탁 밖으로 소문이 퍼지진 않았어도, 나이우스 정도의 지위라면 충분히 알 정도는 되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쩌긴? 다 죽여야지.”

화륵!

마치 불꽃과도 같은 무언가가 나이우스의 등 뒤를 타고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원탁도, 다른 녀석들도. 전부 아렌에게 굴복해서 던져주는 먹이나 받아먹는 개새끼처럼 되었어.”

여덟 쌍의 날개가 나이우스의 등 뒤에서 활짝 펼쳐졌다.

“케프렌은 썩었다! 대공자는 죽었고, 가주는 병에 걸렸지! 재능도 없는 그 머저리가 누군가의 힘을 빌어 소가주가 되려 한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과거 왕국 하나를 단신으로 멸망시켰다던 마계 후작, 마왕 예루리를 상징하는 흑염익(黑炎翼).

그 날개가 어두운 공간에 불길한 빛을 밝혔다.

“그렇다면 나 역시, 타인의 힘을 빌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이 케프렌을 정화하겠다!”

나이우스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마어마한 힘에, 수하는 전율했다.

그는 대번에 머리를 박고 소리쳤다.

“명을 받듭니다!”

그 역시 케프렌에선 나름 지위가 있는 기사.

원탁에 앉은 노괴들의 힘은 물론 가문의 숨겨진 힘이라 불리는 흑천기사단(黑天騎士團)에서도 이만한 위압감을 가진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루시엘라라 할지라도 방해한다면 없애버리겠다. ‘놈들’에게 전해! 이번 아렌의 성인식을, 내 손으로 피의 성인식으로 만들겠다고!”

* * *

루리엔 시를 나선 지 약 15일이 흘러.

백여 명에 달하는 라데우스 사신단 일행은 케프렌의 수도 로엘 소드에 도착했다.

네르하는 로엘 소드의 아름다운 정경에 눈을 빛냈다.

“웅장하군요. 역사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규모만 따져도 베리타스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전생의 중원의 대도시들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렌 장로의 평가는 달랐다.

“흥! 겉만 번지르르한 곳이지. 마법을 배척하는 놈들이라 대륙의 대도시 중에선 물류 상황이나 교통편이 가장 불편한 곳이야.”

확실히 지렌의 말마따나, 길은 잘 닦여 있어도 베리타스에선 볼 수 있는 비행선이나 증기기관 같은 것들은 전혀 보이질 않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라데우스의 사절 여러분.”

막 입구 검문을 통과하자마자, 거의 오백에 가까운 기사들이 라데우스 사절단을 포위하듯이 나타났다.

그 중심에 있는 은색 갑옷의 중년인을 향해 지렌이 인사를 건넸다.

“검백(劍魄), 벨란 케프렌이로군. 원탁의 거물이 우릴 맞이해주러 왔군.”

“라데우스에서 장로가 오는데, 그에 걸맞은 자가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벨란이라 불린 중년인이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반말을 내뱉는 지렌과는 달리 벨란은 정중한 존대를 고수하고 있으니, 두 사람 사이의 연배는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나는 모양이었다.

“시험이 준비되었습니다만, 어떻게, 바로 도전하시겠습니까?”

“흥, 그런 걸 일일이 미뤄두면 할 일도 못 하지. 앞장서게.”

그 말에 따라 라데우스 사절단들은 벨란의 기사단을 따라 로엘 소드의 중심부로 향했다.

‘시험이라.’

지렌이 사전에 알려준 것이긴 하지만, 케프렌과 라데우스는 각 가문의 사절이 도착하면 그냥 들이는 일이 없었다.

당장 십여 년 전만 해도, 서로의 직계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낼 정도로 험악했던 게 두 가문의 사이다.

“이번 시험은 어떤 것이지?”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너무 과격한 것은 배제되었습니다.”

“어이가 없군. 원탁의 장로가 모른다는 말을 하다니.”

“그 부분은 케이오스님의 관할이라서요. 하하, 용서해 주시죠.”

그렇게 약 삼십 분 정도를 잡담으로 보내고.

어느 순간, 네르하는 자신의 시야가 급격하게 뒤틀리는 것을 자각했다.

지렌이 혀를 찼다.

“뭐야, 환영 마법인가?”

사물이 형체를 잃고 본래의 색깔을 잃기 시작한다.

마치 무지개를 이리저리 주무르는 듯한 기괴한 광경이었다.

“쯧! 작정하고 준비한 모양이군. 하지만 놈들이 마법을 이용할 줄이야.”

지렌과 그 수행원들은 어느새 사라진 벨란과 케프렌 기사들의 빈 자리를 직시하며 코웃음을 쳤다.

“감히 라데우스에게 환영 마법을 걸다니.”

“케프렌 놈들, 정말 오만하기 짝이 없군요.”

그렇게 지렌과 수행원들이 마력을 통해 마법진의 해석에 돌입하던 순간.

“뭐, 뭐야? 왜 해석이 안 돼?”

지렌은 자신의 손끝에 술식이 읽히지 않자 크게 당황했다.

사태를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네르하가 소리쳤다.

“장로님, 이건 마법이 아닙니다!”

“뭐, 뭐라고?!”

당황하는 지렌을 무시한 채, 네르하는 그대로 주변을 살폈다.

‘역시 이건 마법이 아니야!’

고위 환영 마법일수록 사람의 오감을 속이다 못해 물리적인 실체화까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네르하가 보기엔, 이건 그런 환영 마법이 아니었다.

‘이건, 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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