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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가문의 무신이 되었다-212화 (212/237)

212화

<드러나는 정체 (4)>

쿠구구궁!

지반이 무너지며 땅이 꺼진다.

네르하는 혀를 차며 부유 마법의 수인을 맺었다.

허공답보니 능공허도니 하는 고난이도의 경공을 펼칠 필요도 없다는 점에서, 확실히 마법은 편리하기 그지없었다.

네르하의 신형이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지?’

5분이 지나도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비록 내려가는 속도가 느릿하다고는 해도 이 정도 깊이면 층으로 나눌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려온 것보다 몇 배는 더 깊은 심연.

그렇게 약 10여 분을 내려가고서야, 네르하는 지하의 끝에 존재하는 거대한 석상을 보았다.

‘저건!’

사슬에 묶여있는 거대한 새가 구슬을 품고 있는 모습.

그 새의 크기는 못해도 백여 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네르하가 놀란 건 새의 거대함이 아니었다.

그 새 석상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빽빽하고 복잡한 마법진들의 향연.

‘봉인진!’

저건 분명 최소 수만 개의 마법진이 중첩된 봉인진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수준이다!’

저 진을 구성하는 줄기 하나하나에서 못해도 7레벨 이상의 힘이 느껴진다.

현재의 네르하로서도 구현은커녕 감히 분석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수준!

그야말로 9레벨조차 넘어선, 신화시대에서나 재현될 법한 마법이었다.

네르하가 봉인진의 수준에 살짝 넋을 놓고 있을 때.

귓가에 괴로워하는 영언이 들려왔다.

―켁! 케엑! 놔, 놔라, 인간!

저 멀리 멱살이 잡힌 채 버둥거리는 자그마한 새.

아렌의 손에 들린 녀석은, 분명 크라수스를 처리했을 때 튀어나왔던 마왕 예루리인지 뭔지가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한눈파느라 저놈의 존재를 깜빡 잊고 있었군.’

그 잠깐 사이에 아렌에게 제압당해 끌려온 모양이었다.

―내, 내 본체만 깨어났어도 네놈 따위는 한주먹이야!

“응? 그러고 보니 모습이…….”

너무 조약해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구슬을 품고 있는 저 거대한 새 석상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저 새와 매우 흡사했다!

‘그렇다는 건, 저 석상이 놈의 본체라는 뜻인가?’

확실히 북방에서 본 비슈나르의 거대 꽃봉오리와 비교해도 덩치 면에선 전혀 꿇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잠재된 힘 자체는 비슈나르보다도 훨씬 강력할 확률이 높았다.

…저렇게 굴욕적으로 파닥거리는 꼴을 보면 그리 위협적이게 느껴지진 않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저 구슬은 뭐지?’

문제는 저 거대한 새의 힘이 네르하의 예상대로라고 해도, 봉인진의 수준은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다.

과하다. 과해도 너무 과하다.

당대 라데우스의 모든 마법사들이 달라붙으면 가능할까?

아니, 그렇다 해도 가능할 거라 보이진 않는다.

“그야말로 신조차도 봉인할 수 있을 법한……응?”

네르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전 아그란바드는 케프렌 최심부에 봉신전(封神殿)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인 즉, 지금 이곳이 그 봉신전이라는 장소가 분명해 보였다.

‘왜 마왕의 봉인지에 신이라는 단어까지 써야 했나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알겠군.’

이곳은 마왕 예루리를 봉인한 곳이 아니었다.

예루리는 어디까지나 ‘덤’이었을 뿐.

“눈치채셨군요.”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아렌이 말했다.

“마신, 네르반.”

뿌득!

이빨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칼날 같은 살기가 흘러나온다.

“저 구슬 안에는 놈의 파편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파편이라고?”

“네, 파편입니다. 온전한 신의 존재를 감히 이 세계가 봉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랬다간 세계 자체가 찢겨버릴 테니까요.”

흔히 마왕이라 불리는 마계 후작들조차 넘어선, 마계의 삼공작 중 하나.

그 아그란바드조차 온전히 현신한다면 중간계의 모든 생명체가 달려들어도 승산이 없을 거라고 딱 잘라 말했던 초월적인 존재였다.

다만 네르하가 주목한 건 네르반이란 존재가 아니었다.

“네가 아까 했던 ‘우리’라는 말. 그건 네가 천마라는 걸 인정한다는 거냐?”

“후후, 집요하시군요.”

“내겐 나름 중요한 문제라. 가능하면 네 입으로 답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떡밥은 줄줄 흘리면서 즉답만큼은 피해왔던 녀석이다.

네르하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놈에게서 답을 들을 기회는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나는.”

아렌의 입에서, 독백처럼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알고 있는 천마이자 천마가 아닙니다.”

“그건 무슨 소리지?”

“그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던 천마란 존재는 500년 전의 항쟁으로 사라졌습니다.”

네르하의 인상이 구겨졌다.

답을 듣긴 들었는데, 되려 놈의 정체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고 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저도 나름 제약이 걸린 몸이라서요.”

천마이되 천마가 아닌 존재.

스스로를 천마라 밝힐 수 없는 존재.

무슨 도가도 비상도도 아니고 저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생각을 정리한 네르하는 그 의문을 접었다.

“좋아, 네 상태가 어떤지 대충 짐작은 가는군.”

“의문이 풀리셨습니까?”

“대충은. 그럼 다음 문제가 남았는데.”

어쩌면 이 물음은 이번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어쩔 거냐?”

네르하가 예루리의 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네르반이란 마신에게 복수를 천명했다고는 해도, 저 봉인을 힘으로 푸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데?”

“음, 아무리 봐도 그렇죠?”

“저건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설사 숫자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단기간에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지.”

그 말을 내뱉었음에도 불안감이 가시질 않는다.

놈은 분명 지금까지 쌓아온 자신의 모든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았다.

그런 만큼 저 봉인을 어찌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수를 사용했을 터.

아렌이 은근한 눈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혹시, 저 봉인을 건 게 누구인지 아십니까?”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아닌 것 같아 보이는군.”

“네, 그렇습니다. 마왕 예루리와 함께 네르반의 파편을 봉인한 건, 다름 아닌 이 중간계의 패자(霸者)들입니다.”

네르하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드래곤인가?”

확실히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 정도는 되어야 이런 짓이 가능할 듯싶다.

‘응? 잠깐?’

그 순간, 잠깐의 위화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 봉인의 주체가 드래곤이라면, 분명 아그란바드는 이곳에 네르반이 봉인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그는 봉인된 당사자를 네르반이 아닌 예루리에게 집중했다.

그 말인 즉, 아그란바드가 네르하를 속였거나.

‘혹은 아그란바드 또한 뒤통수를 맞았거나.’

그 답은, 곧이어 아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은 아그란바드에게 의뢰를 받아 이곳을 조사하러 왔을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당연히 정보의 출처가 따로 있으니까요.”

딱!

아렌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사람 몇이 통과할 수 있을 법한 워프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건, 9레벨의 공간이동 마법!’

아렌이 공간이동을 행한 게 아니다.

‘다른 쪽’에서 이곳을 향해 공간이동을 펼친 것이다!

츠츠츠츠!

공간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워프 게이트를 타고 다섯 명의 존재가 나타났다.

인간뿐만 아니라 엘프, 오크, 트롤 등 아인종이 즐비해 있었는데, 하나같이 그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공간이동으로 건너왔다는 건 저들의 정체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뜻.

“드래곤이로군.”

선두에 있던 엘프 여인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답이네, 라데우스의 아이야.”

“눈치가 빠르군.”

“하긴, 저놈과 같은 출신이라면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순 없겠지.”

네르하가 아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마 드래곤들에게 봉인을 풀어달라고 하려는 것인가?”

“반은 정답입니다.”

“그럼, 나머지 반은 뭐지?”

“풀긴 풀되, 지금 여기서 풀 수는 없다는 거죠.”

이 자리에 튀어나온 드래곤들이 손을 뻗어 거대한 마력장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그 마력장은 봉인 전체를 감싸며 확장했고, 표면 위에 복잡하기 그지없는 술식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네르하는 마력장의 표면에 새겨지는 술식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설마, 봉인 채로 공간이동을 시키려는 건가!”

네르하의 외침에 드래곤들이 눈에 이채를 발했다.

“호오? 공간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알아차리는 게 불가능할 텐데? 아무리 라데우스라지만 제법이군.”

“아그란바드가 눈여겨본 이유는 있다는 건가?”

몇몇 드래곤이 흥미를 보이던 찰나, 엘프 모습의 여인이 짜증을 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빨리 옮기기나 해요. 아그란바드가 눈치채기 전에.”

“쩝, 그러지. 키라네이드.”

드래곤들이 다시금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네르하가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굳이 잘 돌아가고 있는 봉인을 풀겠다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너희 드래곤들이?”

그 질문에 대답은 짜증을 냈던 엘프, 키라네이드의 입에서 나왔다.

“이게 인간들을 위해서도 더 나은 일이다.”

“더 낫다고?”

“네르반의 존재는 마족들이 이 세계를 침략할 수 있게 만드는 이정표 같은 것.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

“스스로 재앙을 불러온다는 게 인간을 위해서도 낫다고?”

네르하는 이를 악물었다.

저건 감당할 수 없다. 설사 눈앞에 있는 천마조차도.

아니, 애초에 이렇게 뒷구멍으로 몰래 일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승산이 그리 크지 않다는 명확한 증거이지 않은가!

“납득하지 못하겠군.”

“훗, 너 혼자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어쩔 거지?”

키라네이드가 조소를 내지었다.

“막아야겠지. 네놈들을.”

“귀찮게 하는군.”

그녀의 시선이 아렌에게로 향했다.

“이봐, 초마인.”

“말씀하시죠, 블루 드래곤 로드.”

“네놈이 끌고 온 놈이니 네놈이 책임져라. 우린 봉인을 옮기는 것만 해도 바쁘니까.”

“뭐, 그러죠.”

어깨를 으쓱한 아렌이 네르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이 미친 짓을 끝까지 벌이겠다고?”

“당신이라면 제 뜻을 이해해주리라 믿고 있었습니다만.”

“이해? 복수를 위해 세상을 말아먹겠다는 걸 이해해달라는 거냐?”

“단순히 복수 때문만은 아닙니다.”

스릉!

아렌이 천천히 자신의 칼을 꺼내 들었다.

“우리가 이 세계에 떨어진 원인은 바로 네르반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기묘한 인과의 근원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네르반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세계의 안전과 우리의 목적, 두 가지를 모두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당신도, 가능하다면 중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네르반이란 존재를 처리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될까?

아니, 그 전에.

“중원으로 돌아간다고?”

“네, 그렇습니다.”

“네놈을, 중원으로 돌려보낸다고?”

“……으응?”

순간 아렌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네르하가 황당함을 담아 아렌을 쏘아보았다.

“네놈이 중원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펼쳐질지 뻔히 보이는데, 그걸 나보고 두고 보라는 거냐?”

“아, 이런.”

마치 실수했다는 듯, 아렌이 자신의 정수리를 콩 쳤다.

“이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을 뻔했군요. 시간이 너무 흘러서 정사마의 경계가 많이 흐트러진 탓인가?”

놈이 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때가 500여 년 전이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긴 하다.

“교섭은 결렬인가요?”

“그렇지.”

네르하가 전신의 투기를 끌어올렸다.

대번에 오러와 마력이 흘러나와 백금의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능숙한 스타 플래티넘이군요. 크라수스와의 싸움도 나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연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넘쳐나는 게 체력이거든.”

과거 이 비루했던 몸을 어떻게든 바꾸기 위해 정말 온갖 개고생을 다 했다.

“아쉽군요.”

그 말을 끝으로 아렌의 검이 빛났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패검기(覇劍氣)

과거 중원에서 지겹도록 보아왔던 검붉은 기운이 네르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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