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드러나는 정체 (3)>
수백에 달하는 기사들이 일제히 주군을 향해 충성을 맹세한다.
뭇 호사가나 음유시인들이 봤으면 감동에 떨어 노래를 불렀을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루시아는 되려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죠?”
베하나스 혼자서 저랬다면 모른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소속이 불분명한 수많은 기사가 있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저들 하나하나가 오러를 사용할 줄 알거나 거의 근접해 있는 실력자들뿐이라는 점이다.
베하나스는 우묵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가씨.”
그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루시엘라 엘 케프렌. 당신께선 원탁에 의결하여 임시 소가주의 자리에 임명되셨습니다.”
“헛소리!”
찌릿! 찌릿!
분노한 루시아의 살기가 베하나스의 피부를 자극했다.
‘허어?’
베하나스는 감탄했다. 저 기세만으로도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총사범이 허언을 날렸다 싶었는데, 정말로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성장할 줄이야!’
루시아가 의념의 검을 정면으로 받았다고 말했을 때는, 원탁의 모두가 라실론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리브라에서 만났던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다.’
이 정도면, 석년의 가주보다도 더한 천고의 재능이다!
베하나스가 감탄하든 말든, 루시아가 그를 향해 일갈했다.
“정명한 소가주 후보가 존재하는데도, 원탁이 감히 케프렌 직계 혈족의 운명에 간섭하는가!”
아무리 아렌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건 그 이전의 문제다.
소가주에 대한 임명 권한은 오로지 가주에게만 있다.
물론 원탁의 구성원 중에선 케프렌의 혈족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그들은 결코 가주의 직계 혈족들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이건 간섭이 아닙니다.”
“아니다?”
“아렌 엘 케프렌 소가주 후보는, 바로 반나절 전 스스로 소가주 자리를 고사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1공녀 루시엘라를 추천하였고, 가주 대리의 권한으로 라이먼 엘 케프렌이 그 추천을 수락하였습니다.”
탈력감에 빠진 듯 루시아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아렌 공자가,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했습니다. 자의로 말이지요.”
“대체, 왜?”
루시아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약속된 승리자의 자리를 걷어찼는가?
‘준비된 무대라는 게, 설마 이걸 말하는 건가?’
아렌의 의도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녀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뭘 노리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추측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루시아가 해야 할 말은 명백했다.
“거절합니다.”
“으음!”
“애초에 소가주 후보의 사퇴를 원탁이 멋대로 받아들였는지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케프렌이란 거대 가문의 소가주 자리는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멋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자리다.
솔직히 이 부분은 베하나스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아렌 편에 있던 원탁의 숫자가 전체의 2/3를 넘어선 탓에 멋대로 의결이 되었을 뿐, 자세한 내막은 그 역시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저는, 아렌이 깔아놓은 판 위에서 노니는, 그런 광대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가씨.”
베하나스가 간곡한 어조로 청해왔다.
“아렌 공자는 정말로 손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렸습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수많은 기사들이 명령권자를 잃어버렸고, 원탁은 아가씨께 권한을 위임한 채 침묵하고 있습니다.”
명령 체계의 붕괴.
이것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 끝은 뻔하다.
“설사 아렌 공자가 기만의 의도로 이런 일을 벌였다고 해도, 이건 아가씨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으득!
루시아는 섣불리 그 기회라는 걸 붙잡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속에 걸리는 게 많았던 탓이었다.
“대공과 총사범은 뭐 하고 있습니까? 원탁의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그들은 언제나 로엘 소드에 거주하며 케프렌을 수호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두 분은, 성지를 수호하던 중 반역자 나이우스에게 중상을 입었습니다.”
“뭐, 뭐라고요?”
“현재 성지는 반역자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아가씨.”
“……!”
설마 나이우스가 두 사람을 동시에 감당할 정도로 강해졌나?
계속해서 말을 들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다만 그 둘을 몰아붙인 건, 테바라와 같이 마기를 내뿜는 케프렌의 다른 직계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원탁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크게 꿇리지 않는 위용을 보이며 두 사람을 몰아붙였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그 두 분이 힘을 합치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쉽게 손을 쓰진 못했겠죠.”
“네, 바로 그렇습니다.”
테바라처럼 혼자 반란을 일으켰다면 모르되, 자신과 아렌을 제외한 다른 직계들이 모두 가담했다면 그 두 사람으로서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아녜스!’
더 큰 문제는, 그 반역자들에 아녜스까지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아녜스가 자의로 나이우스에게 가담했나?
이유를 찾자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혼란에 빠진 루시아를 향해, 베하나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현재 수도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아가씨뿐입니다.”
으득!
루시아는 으스러지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련의 혼란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일어났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산했든, 아니면 흐름만을 유도했든 이 사건의 진범은 분명…….
“지금 수도에 주둔 중인 기사단의 숫자는 모두 몇이죠?”
베하나스의 뒤에 있던 한 단장급 기사가 곧바로 대답했다.
“11개 기사단, 총인원 2320명입니다. 나이우스 공자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의 숫자이므로 변동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적군요.”
어지간한 국가의 기사 수를 아득히 넘어서는 숫자였지만, 케프렌의 규모를 생각하면 확실히 적은 게 맞았다.
“가주님께서 급하게 원정을 나서시며 수도와 인근 전력에 일시적인 공백이 생겼습니다.”
“하긴, 그러니 테바라와 나이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했겠죠.”
하지만 그렇게까지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마치 워게임처럼, 전시 상황을 막아낼 병력 역시 이리 눈앞에 착실히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숫자가 가장 많은 철벽은 모으지 않고 그 자리에서 대기, 시민들의 혼란을 수습합니다.”
“예!”
“붉은 장미, 페가수스, 강철기사단 역시 대기. 현 위치를 고수하고 도시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인원을 통제하라 알리세요.”
“명을 받듭니다!”
“남은 다섯 기사단에게 전하세요. 성지를 둘러싸고 포위진을 만듭니다.”
“바로 성지를 탈환하시진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베하나스가 의외라는 듯 물어왔다.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지가 점령당했다는 건, 그곳을 수호하던 새벽과 낙일 역시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런 전력에 정면으로 들이박아봤자, 피해만 커질 뿐입니다.”
나이우스는 테바라와는 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검제급 기사 둘을 처리할 정도면 분명 전력상으로는 분명 철저하게 준비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이우스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실수, 라고 하신다면?”
“녀석이 성지를 장악한 건, 성지의 최심부에 있는 케프렌의 성물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던 거겠죠.”
가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케프렌의 성물.
초대 가주가 사용했다던 성검(聖劍), ‘라 케프렌’.
“하지만 성검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그의 권위를 인정할 존재는 이곳엔 없죠. 우린 국가가 아니니까요.”
케프렌의 근본은 ‘귀족’이 아닌 ‘기사’.
자신의 검을 타인에게 증명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나이우스가 그걸 모르고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 말씀은?”
“가주의 권위를 대신 세워 줄 존재가, 분명 있었다는 거겠죠.”
“네? 그런 자가 대체 어디 있다고?”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걸 느끼며, 루시아가 이를 악물 듯이 대답했다.
“전대 가주, 크라수스 엘 케프렌.”
“……!”
“그분… 아니, 그자라면 모자란 명분 정도는 충분히 채워줄 수 있습니다. 일단 가문의 중추를 장악했다면 말이지요.”
“그, 그럼, 큰일 난 것 아닙니까?”
전대 가주라고는 하나 가주의 자리에 있었던 자다.
그가 성검을 가지고 가주 자리에 복귀를 천명한다면 호응할 이가 분명 적지 않을 거다.
그렇게 되면 케프렌은 분명 두 조각으로 찢어질 게 분명했다.
“나이우스의 실수가 그것입니다. 전대 가주가, 반드시 자신에게 호응해줄 것이란 믿음.”
하지만, 크라수스는 절대로 나이우스의 곁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앞엔 네르하와 아렌, 두 사람이 가로막고 있을 테니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베하나스야 궁금증을 표했지만,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루시아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도시에 나타난 마물들을 소탕하고 착실하게 병력을 집결시켜 나이우스를 압박하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아가씨!”
‘그리고, 이 일이 끝난 뒤, 이 모든 사태의 배후인 아렌에게 반드시 죄를 물을 것입니다.’
이 말은 속으로 삼키며, 루시아가 성지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 * *
불현 듯 아렌이 네르하에게 물었다.
“혼천의 문이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
혼천의 문?
뭔가 어딘가에서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걸 어디서 들어보았는지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뭐지?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네르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아렌이 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하계에서 지성을 지니고 태어난 생명체가 일정한 격에 이르면 어떤 ‘문’에 도전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문의 이름은 ‘승천의 문’이라고 합니다.”
“승천의 문이라…….”
우화등선(羽化登仙). 도가의 많은 문파에서 그 존재를 긍정하고 있어 딱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었다.
“잉어가 용이 되기 위해 오르는 문처럼, 수행에 극에 이른 도인이 신선이 되기 위해 도전하는 것과도 같죠.”
그 말을 들은 네르하의 표정이 굳어졌다.
등용문(登龍門)의 고사는 오로지 중원인들만이 아는 이야기.
그걸 아렌이 언급했다는 건, 적어도 그가 자신과 같은 환생자 비슷한 것이라는 건 거의 확실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는 별개로, 절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혼천의 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문에 발을 들이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격을 잃게 됩니다. 영영.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는 재천(再天)의 문에도 발을 들이밀 수 없는, 영원한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죠.”
아렌은 우뚝 선 채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그 혼천의 문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순간.
무적권신으로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던 때.
[이, 이런! 재천(再天)이 아닌 혼천(混天)의 문이라니!]
네르하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흑암의 구체 속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 끝까지 당당했던 천마의 감정이 처음으로 무너지던 모습!
네르하의 얼굴에 적의가 생겨났다.
“역시, 네놈은…….”
“후후.”
아렌이 웃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자조가 섞인 처연한 웃음이었다.
“내게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 물으셨지요?”
기습적으로 아렌이 발을 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쿠웅!
그러자 지진과 함께 바닥이 쩌적거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반이?!’
네르하는 저 밑에 빈 공간이 더 숨겨져 있다는 것에 놀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묵직했던 지반이었다.
그러나 아렌이 발길질을 하는 순간, 마치 공간 마법이 발현한 듯 텅 비어 버린 것이다!
‘이곳이 최하층이 아니었나!’
이대로라면 밑으로 추락한다!
지반이 무너지는 와중, 아렌의 눈에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 드러났다.
“내 복수의 대상은, 혼천의 문을 열어 ‘우리’를 이쪽 세상으로 끌고 온 존재. 마신(魔神) ‘네르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