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은 천천히 그 독특한 걸음걸이로 하남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남성은 전 무림인들이 존경을 아끼지 않는 대 사찰 소림사(小林寺)와 20만 거지들의 왕초가 거주하는 개방이 있는 곳이다. 오래전 세력 다툼에 의해 10만의 거지가 떨어져 나가 남개방을 세웠다. 하지만 남개방의 세력이 작았기에 모든 공식행사에는 북개방의 방주가 나서고 있었다. 북개방은 20만 식솔을 거느린 거대 방파지만 그래도 두 토막이 난 후 세력이 급속도로 쇠퇴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섬서성의 남단에 위치한 황제가 거주하는, 오래전 장안이라고도 불렸던 중경(中京)……. 중경에는 중앙원수부와 비극적인 사건으로 해체되어 버린 찬황흑풍단이 있는 곳이다. 그렇게도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중경의 동쪽 관문이라 볼 수 있는 낙양. 하남성의 북쪽에 위치한 낙양은 넒은 평야 지대로, 예전에 몇몇 국가의 수도가 위치한 곳이었지만 지리상 수비에 난점이 많은 도시다. 그렇기에 송대에 이르러 장안에서 멀지 않은 낙양에 정북원수부를 두었으니 사실상 황제로서는 두 개의 원수부를 직할하게 되어 버렸고, 상대적으로 왕들보다 더욱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묵향이 가는 곳은 오래전 자신이 잠시 살았었던 정북원수부가 위치한 낙양인데, 이곳은 군사, 상업, 교통의 중심지로 대단히 시끌벅적한 도시였다. 묵향은 낙양으로 발길을 돌린 후 포목점에서 무명을 세 필 사다가 너무나 잘 알려져 버린 이놈의 묵혼검을 칭칭 동여매어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만든 후 상자 하나를 구해서 그 안에 집어넣고 어깨에 메고 다녔다. 평소에는 귀찮다고 변장 따위 하지도 않았고 또 암습 따위를 걱정하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양녀를 만나러 가는데 꼬리를 달고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묵향은 한참 길을 가다가 시장기를 느끼고 그럴듯한 식당을 찾았다. 평소대로 길바닥을 힐끗 훑어본 다음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근처에 유명한 명소인 동백산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묵향은 다행히 자리를 하나 찾고는 그곳에 앉아서 점소이를 불러 주문을 했다.
“오리탕 한 그릇하고 죽엽청 두 병, 그리고 신선한 소채가 있으면 좀 다오.”
“예.”
식당 안의 대화는 요와의 전쟁 얘기나 얼마 전에 일어난 서경의 패주(覇主) 진천왕(眞天王)이 오랜 전쟁과 흑풍단의 해체, 금의위의 몰락으로 인한 황권의 약화를 틈타 정서원수부의 부수장 광해(廣海) 대장군과 모의하여 곽진(郭璡) 원수를 살해한 후 반란을 일으킨 것에 집중되고 있었다. 묵향이야 세상이 뒤집히든 말든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입장이었지만, 나약한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한참 맛있게 오리 고기를 뜯으며 죽엽청을 마시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야 그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만약 그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칼 차고 다니는 거 보니 무림인이군.’
하지만 조금 더 관찰력이 있다면 저런 생각도 했으리라.
‘남자답게 생긴 데다 제법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고… 차림새가 그럴듯한 걸 보니 막돼먹은 놈은 아니군.’
거기에 그 사람이 무림인이었다면 요런 생각도 했을 것이다.
‘제법 근사한 눈을 하고 있어. 꽤 수련을 잘한 놈이야.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닌 것 같은데?’
거기에 그 사람이 묵향 정도의 안목을 가진 놈이라면 그런 생각들에 조런 생각까지 보탰을 것이다.
‘제법 검을 잘 아는 놈이군.’
묵향은 찬찬히 상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대단히 흥미가 당기는 상대였다. 많은 인물들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검만을 꼽는다면 자신이 아는 자들 중에서 상위 5천 명 안에는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법 흥미를 돋우는 놈이군. 추정되는 나이에 비했을 때 놀라운 성취를 지니고 있는 놈이야. 아직 애송이라는 게 흠이지만, 어쩌면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능가할지도…….’
초고수라면 대부분 그 막강한 내공으로 육체의 노화를 억누른다. 그렇기에 그놈이 그놈 같아 보이지만, 실상 막강한 고수를 알아보기는 힘든 게 아니다. 우선 눈. 눈만 봐도 이자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섰는지 화경에 들기 전이라면 대강은 눈치 챌 수 있다. 현경이라면 반박귀진(反樸歸眞)의 단계라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히 숨길 수 있기에 그 내막을 알아보기는 화경보다도 더욱 힘들다. 그렇지만 화경에 들지 못한 고수들이라면 한눈에 뻔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내공 조예가 어느 정도인지…….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밝혀지면 익힌 바 무공이나 수련 정도에 따라 공력의 차이가 심하기에 오차가 크긴 하지만, 일정 나이에서 죽자고 쌓을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영약(靈藥)이라도 먹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는 나이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음식 떠먹는다고 치아가 약간이라도 보이면 이건 도저히 속이기가 힘들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빨의 상태도 개개인의 습관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기도 하기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생전 이빨 관리를 안 하는 일부 게으른 놈들하고 미용을 위해 죽자고 양치질을 해 대는 일부 부지런한 년들하고는 색깔이 많이 다르니까…….
이때 묵향의 눈에 힐끗 보인 게 그의 검이었다. 어딘지 낯익은 검……. 언젠가 한 번쯤은 저 검의 주인을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 애송이는 아니야. 누굴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꽤 오래전에 본 모양인데……. 흔한 검은 아니야. 손잡이의 형태, 검집의 모양, 전체적으로 봤을 때 흔한 검처럼 아주 수수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저건 뛰어난 장인이 만든 솜씨야. 조각되어 파 들어간 칼자국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런데 저걸 어디서 봤었지?’
묵향이란 인물은 원체가 무골(武骨)이라 그림 따위는 알지 못했고 알려고 노력도 안 했다. 하지만 공예품이나 특히 조각된 것이라면 그것을 만든 장인의 섬세한 솜씨를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조각칼도 칼은 칼이었고, 그는 그 칼을 사용한 상대의 솜씨를 읽는 것이었다.
상대는 음식을 시키더니 꽤 허기졌는지 술을 반주 삼아 열심히 먹어 대기 시작했다.
‘검집만 봐서는 알기 힘들고, 검을 직접 보면 떠오를까? 그래도 안 떠오른다면 저놈의 검술을 보면 기억이 날까? 저놈보고 검 좀 보여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가장 좋은 방법은 검을 뽑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유도하는 게 최고지. 그렇다면 어떻게 시비를 걸까……. 그런데 만약 아는 놈의 제자쯤 된다면 나한테 칼을 겨눈 저놈을 죽여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술을 마시는 사이 그 청년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향은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식탁에 돈을 던져 놓고 따라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검의 주인인 애송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묵향이었다.
묵향이 애송이를 따라다닌다고 정신이 팔려 있는 이 시간, 하남성으로 들어가는 관도상에서는 웃지 못할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10여 명이나 되는 허리에 장검(長劍)을 찬 장정들이, 옷도 그럴듯하게 차려입고는 땅바닥을 헤매고 있었으니 기괴할밖에…….
열두 번째 행인이 설설 기어 다니고 있는 꼴을 보며, 칼을 차고 있는지라 대놓고는 못하고 얼핏 비웃음을 띤 눈으로 힐끔거리며 지나가자 한 여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짜증을 폭발시켰다.
“오빠!”
그러자 땅바닥을 기고 있는 남자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귀 안 먹었으니까 조용히 말해.”
“도대체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보면 모르냐? 흔적을 찾고 있잖아.”
“도대체가 추격술에 있어서는 도가 텄다고 떠들던 양반이 지금 땅바닥에서 뭐 하는 거예요? 그것도 대로 한복판에서……. 사람도 많이 지나다녀서 창피해 죽겠단 말이에요. 그러고도 오빠가 전직 살수예요?”
“제발 좀 떠들지 마라. 전직 살수였던 초고수의 흔적을 좇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냐?”
“그래 흔적을 찾기는 찾았어요? 오빠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여기는 하남성으로 가는 길이라구요. 하오문으로 갔다면 호남성으로 가야지. 왜 이리 오는 거예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호남성 쪽으로 가다가 이상하게 위쪽으로 길을 바꿨다는 것 외에는…….”
“맞기는 맞는 거예요?”
“이 녀석이 날 뭐로 보고……. 아무리 쉬었다고 해도 내 눈이 그 정도로 썩지는 않았다구.”
이때 저 앞쪽에서 땅바닥을 기고 있던 장한 한 명이 외쳤다.
“막주님, 찾았습니다.”
“그래? 확실히 이쪽이 맞군. 이리 와 봐라. 내가 설명해 줄 테니…….”
여인이 따라가자 몇 개 나 있는 발자국을 보여 주며 말했다.
“여기는 관도상이라서 땅이 굳어 발자국을 찾기 힘들어. 거기다 행인도 많아서 기껏 찍힌 것도 잘 지워진다구. 여태까지는 그놈이 으슥한 길을 골라 왔기 때문에 발자국 따라오기도 편했는데, 그 녀석이 방금 지나온 마을을 통과한 다음부터 아예 대로로 다니는 바람에 더욱 힘들어졌다.”
“아, 그가 무명하고 나무 상자 산 걸로 추정되는 마을 말이에요?”
“그래. 아마 나무 상자 크기로 봤을 때 검을 숨겼겠지. 그의 독특하게 생긴 검만 잘 숨긴다면 쉽사리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니까……. 여기 발자국을 봐라. 아주 지독한 놈이야.”
여인은 발자국을 열심히 쏘아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도저히 모르겠는데요?”
“보통 무림인이라면 평지에서는 일정한 보폭으로 걷지. 그건 보법이나 신법, 경공술을 오랜 시간 연마하면서 만들어지는 습성이야. 그리고 군인들도 보폭이 거의 일정하지. 하지만 이놈은 보폭이 일정하지 않아. 첫 발자국에서 2척 5촌이면 다음 발자국은 언제나 반 촌(약 1.5센티미터) 정도가 불규칙적으로 더해지든지 빠지든지 한다구. 무지렁이 촌민들도 이놈만큼 보폭이 들쑥날쑥하지는 않아. 그만큼 걸으면서 지속적으로 보폭에 신경을 쓰는 거야. 그리고 무림인이라면 절대로 발뒤꿈치로 걷지 않지. 그건 발소리를 죽이려는 것이기도 하고 언제든지 몸을 날릴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인데, 이놈은 보란 듯이 뒤꿈치를 디딘다구. 거의 촌민들과 같은 발자국이야. 여태껏 예까지 추격해 온 것은 보폭이 일정하지 않은 것만 찾은 덕분인데, 이렇게 탄탄한 관도 위라면 그것도 힘들군……. 하남성으로 간 것 같으니 일단은 계속 따라가 보자구.”
묵향은 애송이의 검술을 구경하기 위해 이럴지 저럴지 망설이며 따라다니면서 상대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히 관찰해 나갔다. 상대의 몸동작은 하나하나가 절도가 있는 것이 과연 명문의 제자임이 확실하니, 묵향으로서는 더욱 오리무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정파의 인물은 많지 않은데…….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의 검술 실력을 쌓으려면 상당한 인물이 지도한 것이 틀림없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대단한 실력자, 실력자라……. 맞아! 혹시 저놈이 그 맹주라는 놈의 제자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죽여 없애는 게 울분을 삭이는 데 도움이 되지? 맹주란 놈의 제자가 확실하면 먼저 분근착골을 한바탕한 후에, 손가락과 발가락의 뼈들을 자근자근 다 부숴 버리고, 음, 또 뭐가 있지? 그래! 가죽을 벗긴 다음, 아니지 다 벗겨 버리면 오래 못 사니까 즐거움을 좀 더 지속하기 위해 먼저 한쪽 다리만 벗기자구. 그런 다음 소금을 뿌리는 거야. 그래, 그런 식으로 느긋하게 즐기면서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자.’
자신의 목숨이 어떤 모진 놈에게 위협받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천천히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며 걷고 있는 애송이의 뒤를, 묵향이 느긋하게 따라다니며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별의별 고문 방법을 다 생각하고 있었다. 고문을 시작하면 그놈의 생명이 쇠심줄처럼 질겨서 오래 버틴다 하더라도 3일 정도일 테니… 묵향은 곧 맛보게 될 희열을 상상하면서 기다림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교주는 요즘 들어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남는 시간을 사냥에 쏟아 부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냥은 매를 이용한 사냥이었다. 교주는 여러 종류의 잘 훈련된 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냥을 하면 사냥개 몇 마리와 10여 명의 경공이 빠른 고수들이 몰이꾼을 했고, 그 외에 다섯 명의 전문적인 매 사육사가 다섯 마리의 매를 이끌고 그를 따랐다. 다섯 마리의 매는 두건을 쓰고 있었지만 그중 교주의 손 위에 앉은 조금 덩치가 작은 한 마리는 두건을 쓰지 않고 있었다.
교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 마리의 매들 중에서도 특히나 고려에서 수입한 두 마리의 송골매를 좋아했다. 그가 송골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적당히 잔인하면서도 우아한 품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송골매의 비상(飛翔)은 마치 꿈처럼 더없이 완벽했다. 그리고 먹이를 향해 다가갈 때는 그 잔인한 성격으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달려들어 완벽하면서도 우아하게 상대의 숨통을 조이며 요리하는 것이다.
오늘 사냥에서도 송골매들을 두 번씩 사용했는데, 사냥감을 향해 멋지게 비상하여 천천히 우아하게 상대를 향해 압박을 가해 가다가 나중에는 그 목숨을 발톱을 이용해 멋지게 끊어 놓는 그 장면을 보며 교주는 언제나와 같이 갈채를 보냈다. 사실 교주 정도의 고수라면 표창 몇 개만 가지고도 단시간에 토끼를 몇 마리고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매 사냥이란 번거로운 방식을 즐기는 이유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그 멋있는 눈요기 때문이었다.
몇 번 매를 날린 후 다시 수하들을 몰이하러 내보낸 다음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어떤 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수하 한 명이 길 옆 덤불 속을 가리키고 있었다. 교주는 말을 멈추게 하고는 자신의 손 위에 앉아 있는 두건이 없는 혈전(血電)이라 부르는 새매의 발목 끈을 풀었다.
“지금.”
교주가 작은 음성으로 말함과 동시에 끈을 잡고 있던 수하 하나가 개들을 풀었다. 개들이 짖어 대며 달려들자 토끼는 덤불 속에서 튀어나와 숨을 곳을 찾아 달렸다. 그 순간 교주는 혈전을 날렸다.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매는 마치 화살과도 같이 똑바로 제물을 향해 날아갔다.
앞쪽으로 25장(약 75미터)쯤에는 잡목 숲이 펼쳐져 있었다. 토끼는 엄청난 속도로 그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혈전은 땅에서 불과 몇 척쯤의 높이로 나지막이 미끄러지듯 날며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혈전은 제물 바로 위에 이르러 아래로 몸을 덮쳐 갔다.
토끼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뒷발로 몸을 세웠다가 다시 날쌔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혈전은 실패한 것이 너무나 분한지 켁켁거리며 뒤를 쫓다가 토끼가 피신처를 향해 마지막 달음박질을 치는 순간 그 발톱을 토끼의 목에 깊숙이 박았다. 새매가 날개를 접었다. 마지막 토끼의 꿈틀거림……. 새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주를 오만하게 바라봤다.
교주는 다가가 말에서 내리며 미끼를 내밀었다. 순순히 혈전이 토끼의 시체를 떠나는 순간 재빨리 미끼를 감추자 매는 내뻗은 그의 장갑 낀 손 위에 앉았다. 그는 장갑에 달린 매의 발목 끈을 조이며 말했다.
“참 잘했다.”
이때 수하 한 명이 토끼 귀의 일부를 잘라 매에게 상으로 먹였다. 너무 많이 주어 배가 부르면 말을 안 듣기에 조금만 주는 것이다.
교주는 혈전이 오만하게 주위를 둘러본 후 만족스레 먹이를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훌륭하게 죽였어. 하지만 송골매와 같은 흥분감은 없었어. 새매는 새매일 뿐. 그 짧은 날개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죽이기 위해 태어난 새. 두건을 쓰지 않고, 쓰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날카로운 눈매로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며, 때로는 좋은 친구가, 때로는 무서운 적이 되지. 기분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광폭한 매. 그대와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자주 드는구려. 묵향 부교주, 당신을 적으로 만든 것은 어쩌면 내 일생일대의 실수일지도 모르지…….’
묵향이 애송이를 따라다닌 지 어언 3일……. 손을 쓰면 금세 죽여 버릴 것이 뻔한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지라 쉽사리 손을 안 쓰고 내일 내일 하면서 미뤄 오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검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그날도 애송이의 뒤를 느긋하게 뒤쫓으며 각종 고문 방법을 상상하면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 애송이를 네 명의 괴한이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들리는 괴한 중 한 명의 목소리…….
“네놈이 다섯째를 병신으로 만든 놈이냐?”
애송이는 상대를 쭉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당신들이 하남5괴(河南五怪)라면 바로 찾아오셨소.”
“클클클, 광오한 놈이군. 다섯째를 병신으로 만들어 놨으니 네놈도 병신이 되는 것이 정해진 도리. 네놈이 자진해서 자르겠느냐? 아니면 본좌가 손을 쓰랴?”
“하하, 나를 그렇게 물컹하게 보다니…….”
그와 동시에 애송이가 검을 뽑았다. 검이 뽑혀 나오자 투명한 옥빛을 띤 보검에서 뻗어 나오는 예기(銳氣)가 사방을 뒤덮었다. 하남5괴도 상대가 예리한 보검을 뽑자 모두들 뒤로 물러서며 저마다 가진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애송이의 검을 본 순간 묵향은 경악했다.
“명옥검(明玉劍)!”
자신도 모르게 명옥검이란 말이 입속에서 새어 나옴과 동시에 그의 놀람은 곧이어 활화산 같은 분노로 폭발했다. 묵향의 신형은 거의 뇌전과 같은 기세로 쏘아져 들어갔다. 애송이는 옆에서 뭔가가 덮쳐 옴을 느끼고 대비하려고 몸을 옆으로 틀었으나 열여섯 개의 혈도가 순간적으로 제압당하면서 쓰러져 버렸다.
자신도 꽤나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상대의 얼굴도 못 보고 혼혈이 짚이는 그 순간 애송이에게 떠오른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그의 사부에게 하늘 위에 하늘이 있으니 언제나 조심할 것을 재삼 당부받았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묵향이 쓰러진 애송이를 잡아서 어깨에 들쳐 메고 떠나려는 것을 보고 하남5괴 중의 한 명이 이의를 제기해 왔다.
“잠깐만, 이놈은 우리들과 먼저 선약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방금 전 상대가 보여 준 무시무시한 무공으로 인해 하남5괴도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잘못 시비가 붙으면 오늘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죠. 우선 저희들이 놈의 팔 하나를 자를 테니, 헤헤… 그다음에 끌고 가시면 안 될까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묵향은 그의 제의를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 네놈들이 감히 본좌의 즐거움을 방해하겠다는 거냐?”
그래도 상대는 아쉬움이 남는지 다시 한 번 더 사정했다.
“그대의 실력이라면 저희들이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희들도 그놈에게 구원(構怨)이 있는지라…….”
“네놈들의 원한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냥 잊거라.”
그러자 그중에서 가장 무공이 강하게 보이는 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침중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소. 지금은 실력이 딸려서 눈앞의 먹이를 양보할 수밖에 없지만, 그대가 사문을 밝힐 용기가 있다면 대를 이어서 오늘의 수모를 갚겠소.”
“흐음, 꼴에 밸이 있다 이거지. 좋아. 본좌는 천마신교의 부교주이니 죽이고 싶은 아들이 있으면 검을 줘서 십만대산으로 보내게나. 소원대로 모두 다 목을 따 줄 테니…….”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경악해 있는 무리들을 뒤로하고 애송이를 어깨에 진 채로 묵향의 신형은 조용한 장소를 찾아 사라져 버렸다.
애송이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웬 허름한 흑의를 입은 남자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면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혈도가 제압당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싸워 이기려면 상대를 알아야 한다고. 이 남자가 자신에게 암습을 가한 자라는 생각에 세심히 그를 뜯어봤는데 놀라운 것은 너무나도 젊다는 것이었다.
애송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낀 묵향이 씩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호오, 깨어나셨구만. 이리 초대를 한 이유는 이 검이 어디서 났느냐 하는 것을 물어보려는 의도에서지. 자, 좋은 말로 할 때 대답을 해 주실까?”
애송이는 상대가 부드러운 말투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소름이 끼쳐 옴을 느꼈다.
‘정말 재수 없는 놈이군. 저놈이 나한테 암수를 쓴 놈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수가 한 명 더 있나?’
“당신이 나한테 암수를 가했소?”
“그래, 본좌가 했지.”
그러자 애송이는 상대의 몸을 뚫어져라 훑어봤다. 껍데기는 젊게 보이지만 이자는 아마도 반로환동의 경지에 들어간 영감탱이 고수가 분명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부인 청혜(淸慧)도 ‘네 연배에서는 아마도 네가 가장 검술에 대한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칭찬을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이기기 힘들 거야.’
상대가 가만히 있자 묵향이 또다시 질문을 했다.
“자, 빨리 대답을 해 주실까? 본좌는 인내심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사실 애송이한테는 그것이 뭐 숨겨야 할 치부 같은 것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 검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무림인에게서 받은 것이오.”
“그래? 그 사람은 너와 어떤 관계지?”
“한 10년 정도 그분에게서 검술을 배웠소.”
“그럼 너의 사부인가?”
“아니오. 그냥 내가 마음에 든다면서 검술만 가르쳐 줬을 뿐……. 사부는 아니오.”
“좋아, 그 사람 이름이 뭐지?”
“이름은 모르고 독고구패(獨孤九敗)라는 명호만 알고 있소.”
“독고구패? 좋아. 그놈이 환사검(幻邪劍) 유백(柳伯)을 죽였나?”
“에… 유백은 또 누구요?”
“유백은 본좌의 사부님 이름이지. 이 검은 사부님이 애지중지하던 검이었는데, 이걸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단 하나, 어떤 놈이 그분을 죽이고 뺏었다는 말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지. 안 그래?”
“…….”
“좋아. 그 독고구패란 놈은 어디 있지?”
“얼마 전에 돌아가셨소.”
“죽었다고? 옳아. 이제 알겠군. 그래서 이 검을 물려받았다 이거지?”
“그렇소.”
“크흐흐흐, 그놈이 정말 죽은 게 확실한가?”
“못 믿겠으면 관두슈.”
그와 동시에 묵향이 애송이의 혈도 몇 군데를 짚었다. 그러자 애송이의 온몸에서는 뚜둑거리는 괴이한 음향이 터져 나왔지만 식은땀을 흘려 대면서도 악착같이 고통을 참고 있었다. 가히 초인적인 인내력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각 정도가 지나자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비명성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묵향은 더 이상 하면 사람 잡겠다는 생각에 3각 정도가 되자 분근착골의 수법을 해제했다. 그리고 계속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고문을 하는 놈이 그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말을 사용한다면 아주 기분이 나쁘리라…….
“어때? 온몸이 짜릿하니 평생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겠지? 자, 좋은 말로 할 때 불어.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헉헉, 돌아가셨소. 그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오.”
“흐음, 진짜 죽은 게 확실해?”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소.”
“좋아. 죽었다고 하기로 하지. 대신 내 사부를 죽여 놓은 놈에게서 검을 받았으니 네놈도 공범이야. 알겠어?”
“그건 억지요.”
“아니야, 본좌에게는 억지가 아니지. 너도 공범이니 미안하지만 내 화풀이 상대가 되어 주어야겠어. 가만있어 봐라, 분근착골은 했으니 그다음은… 발가락 뼈다귀를 모조리 부술 차롄가? 참, 뼈를 부수는 그 충격에 기절이라도 하면 안 되지.”
그러면서 상대가 기절하지 않도록 몇 군데 혈도를 때리며 상대의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애송이는 도대체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무뢰한이 도대체 다음에는 무슨 짓거리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일말의 공포를 느끼며 자신의 사문을 들어 약간의 협박을 했다.
“이보시오, 나는 명문 화산파의 제자요. 나를 이렇게 핍박한 게 밝혀지면 당신도 편안한 생활은 하기 힘들 거요.”
“흐흐흐, 남 걱정하지 말고 네놈 걱정이나 해. 본좌는 남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적은 없으니까…….”
그러면서 애송이의 옆에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손바닥이 호미라도 되는 모양인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땅을 잘도 파내고 있었다. 묵향이 조금 수고를 하자 비스듬하게 경사진 작은 구덩이가 생겼다. 묵향은 애송이를 그곳에 눕혔는데 머리가 아래쪽으로 가게 했다. 아무리 모진 고문을 가해도 머리를 심장보다 낮은 위치에 두면 머리에 원활히 피가 공급되기에 아무리 기절하고 싶어도 기절이란 단어는 자신에게서 완전히 말 타고 멀리멀리 떠나 버리는 것이다.
상대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애송이는 지금 뭣 때문에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지 눈치 챘다.
‘이놈이 아예 날 잡으려고 작정을 했군.’
“좋았어.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하게 갖춰진 상태고, 이제부터 본론을 시작해야지. 원래가 분근착골은 오래하면 온몸의 근골(筋骨)과 신경이 망가지기 때문에 네놈에게 오히려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결과밖에 안 된다 이 말씀이야. 뼈를 자근자근 부수는 것은 제일 마지막에 해 주지. 자 그럼 이제부터 고전적인 방법을 써 봐야지.”
묵향은 상대의 허리에서 띠를 끌러 낸 뒤 상의를 벗겼다. 그런 다음 띠를 주워 들고 공력을 주입시키자 천으로 만들어진 띠가 꼿꼿하게 일어섰다. 묵향은 그걸 채찍 대용으로 삼아 애송이의 몸을 자근자근 다져가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이건 고문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고문이란 것은 원래가 상대가 숨기고 있는 어떤 비밀을 불게 만들기 위해 육체적 또는 정식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송이의 입장에서는 그놈의 검 하나 때문에 분풀이 상대로 자신이 잡혀 와서는 죽기 일보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모른다. 상대가 휘두르는 띠는 그의 살가죽만을 후려치고 있었기에 그의 상체는 이제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고통을 참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애송이의 입에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차라리 날 죽여라.”
한참 비명성을 반주 삼아 두들겨 대다가 더 이상 하면 죽어 버릴 것 같자 묵향은 고문 아닌 고문을 멈췄다.
“헤헤헤, 오늘은 이쯤 하고. 그래! 소금하고 고춧가루가 어디 있지? 맞아, 거기다 놔뒀지.”
주섬주섬 꾸러미에서 그것들을 꺼내더니 둘을 섞어서 애송이의 상처에 뿌렸다.
“크아아악.”
또다시 터지는 비명 소리. 애송이가 비명을 질러 대다가 기진맥진해서 더 이상 비명 지를 힘도 없는지 잠잠해지자 묵향이 비웃듯 한마디 던졌다.
“이걸 뿌리면 상처 소독도 되고 좋지. 걱정 마. 빨리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독고구패란 놈은 유백에게 묵향이란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어야 했어. 내 손에 걸려서 살아 나간 놈이 거의 없거든. 독고구패가 죽었으니 너라도 나를 위해 몸으로 때워 줘야지.”
그러자 뻗어 있던 애송이가 헐떡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끄으으으, 묵향…, 묵향이라고… 했소?”
“그렇다. 본좌가 묵향이란 나으리지.”
“어른의…, 구패 어르신의… 마지막… 제자가 묵향이라고… 했소.”
“뭐야?”
‘그럼 독고구패하고 환사검 유백 사부하고 동일 인물이란 건가? 저놈이 내가 마지막 제자란 것을 알 리는 없을 테니. 이런 실수가 있나.’
“이봐, 괜찮은 거야? 이런 빌어먹을! 가까운 의원이 어디에 있지?”
묵향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애송이를 어깨에 짊어지고는 의원을 찾아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