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930)

“이야, 내 생전에 왕궁에서 목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 봤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나체로 걸어 나오는 팔시온을 보면서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이게 무슨 왕궁이냐? 왕궁이었지. 그 둘은 천지 차이라구. 왕이 살지 않는 궁은 대저택 이상의 의미는 없어.”

그렇게 이죽거리는 미카엘은 팔시온보다 먼저 목욕을 마쳤고, 편안한 옷을 입은 채 푹신한 의자에 앉아 젖은 긴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남자들, 특히 귀족들인 경우 머리를 길게 길렀으므로 귀족물을 좀 먹었다는 미카엘은 그의 탐스러운 금발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끈으로 묶었고, 씻을 때마다 귀찮다고 떠들어 대지만 아직까지 자르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그 금발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좀 차이 나면 어때? 왕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정말 으리으리하더군. 세상에, 수도꼭지 봤냐? 은(銀)이었어. 그거 하나만 뜯어다가 팔아도 제법 돈이…, 으악!”

팔시온이 비명을 지른 이유는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소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렇고, 또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다. 입고 있던 옷은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썼기 때문에 목욕하면서 빨았고, 이에 알몸으로 목욕탕에서 나와 미카엘과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가 튀어 들어왔으니 당황하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저 녀석 왜 저래?”

팔시온은 후다닥 목욕탕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 모습을 보면서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보며 미카엘이 투덜거렸다.

“네 모습을 보고 생각 좀 해 봐라. 어떤 남자가 여자 앞에서 알몸 보이고 당황 안 하겠냐?”

그러자 다크의 뻔뻔한 대답.

“상관없어. 나는 원래 남자잖아.”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군.”

“그건 그렇고, 요즘 지내기가 꽤 좋은 모양이네. 예전에 비해 꽤나 취향이 고급스러워졌어.”

전에는 못 보던, 멋지게 세공된 목걸이나 반지. 그리고 옷은 헐렁하고 편한 형태지만 꽤나 고급 천을 사용했고, 거기에 우아한 무늬가 매우 꼼꼼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걸 다크가 한눈에 알아보자 미카엘이 미소 지었다.

“원래 내가 고귀하신 혈통 아니겠냐? 요즘 들어 나의 이 섬세하고도 격조 높은 취향을 조금씩 살려 나가고 있지. 월급이 제법 풍족하게 나오니까 말이야.”

“살기가 괜찮다니 다행이군.”

“잠깐만 기다려, 딴 사람들도 불러 올게.”

“그래, 좀 있으면 세린이 차와 먹을 걸 가져올 거야.”

미카엘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목욕탕 안에서 다급한 팔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내 옷이나 좀 가져다주고 나가.”

“직접 가져다 입어.”

“너 죽을래?”

미카엘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팔시온의 짐을 뒤져 비교적 깨끗한 옷 몇 가지를 찾아 건네주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 오랜만에 만났으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팔시온 일행은 세린이 차와 과자,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와 테이블에 차리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모습이 눈에 익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몇 달 전 모두들 휴가를 내어 다크를 만나러 갔을 때, 다크는 왕궁을 떠났다고 알려 준 하녀가 그녀였던 것이다.

그들은 차를 일찌감치 마셔 없앤 후 과자를 안주 삼아 브랜디(포도주를 증류하여 40퍼센트 정도로 도수를 올린 강도 높은 술)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다크는 자신의 신상 내력이나 추억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대화는 팔시온 일행의 몫이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정규군에 편입되었는지, 또 이번에 참전한 스바시에 전투의 경험담 등 할 말이 무지하게 많았다.

“그때 말이야. 타이탄이란 것들이 싸우는 걸 볼 수 있었어. 정말 엄청나더군. 특히 푸른색과 붉은색을 칠해 놓은 그 타이탄 이름이, 에…….”

팔시온이 약간 버벅거리자 미디아가 옆에서 살짝 참견했다.

“카프록시아.”

“응, 그 카프록시아. 정말 엄청나더군. 상대방 타이탄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는데, 모두 검술 실력이 정말 대단했어. 어떻게 그 덩치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특히 그중 하나는 정말 대단했지. 한 번에 두세 대의 적을 베던데……. 타이탄에 안 타고 있어도 힘든 동작인데, 정말 대단하더군. 단연 돋보였어.”

그 말에 다크는 싱긋 미소 지었다.

“루빈스키 폰 크로아 공작이야. 나도 왕궁에서 들었는데 그때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더군. 직접 만나 봤는데 멋진 눈을 가지고 있었지. 성실한 노력형이라고 할까?”

“공작 나으리라구? 작위야 어쨌든 간에 정말 화려한 검술 실력이었어. 너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내 생전 그렇게 엄청난 검술은 한 번도…….”

“그거야 당연하지. 그 양반 소드 마스터거든.”

“정말이야?”

“응.”

“어쩐지, 엄청나더라니. 그래듀에이트도 저 먼 산인데, 거기 타고 있던 사람은 아예 하늘이었군. 제길! 꼭 노력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풍겼었는데, 말짱 망상이었다니…….”

“망상은 아니었을걸? 얘기 들으니까 첩자들을 의식해서 일부러 실력을 숨기고 싸웠으니까 말이야.”

“그래? 그럼 마스터의 실력은 아니었군. 그럼 열심히 노력하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그 말과 동시에 미카엘과 미디아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이죽거렸다.

“꿈 깨!”

“나도 꿈 좀 꾸자. 이상은 넓고 크게. 몰라?”

“이런 말도 있지. 이루지 못할 이상은 이상(理想)이 아니라 망상(妄想)이다. 그런 말 못 들어 봤냐?”

“제길, 친구라는 놈들이……. 그건 그렇고 스커트가 잘 어울리네. 이제는 아주 여자다워졌는걸?”

약간은 장난기가 섞인 팔시온의 칭찬에 다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이거? 보통 때는 그냥 편하게 바지를 입는데, 요즘 생리 때문에 치마를 입는 거야.”

그 말에 몇 명은 얼굴이 완전히 굳어 버렸고, 주량이 약한 관계로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지미는 갑자기 “쿡! 으읍, 푸!”하면서 앞자리에 앉아 있던 미디아에게 붉은 액체를 뿜어 버리고는 심하게 기침을 해 댔다. 갑작스런 상대방의 썰렁한 반응에 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뭐가 이상해? 기저귀 차고 바지 입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치마를 입는 거라구. 뭐 잘못됐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듯한 다크의 반문에 오히려 기가 더 막혀 버린 미카엘은 숨을 좀 고른 후 말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진짜 여자는 절대 그런 말 입에 못 담지. 도대체 여자로서의 자각이 없는 녀석이야 너는.”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남자야. 그런데 여자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였냐?”

“그럼, 너는 도대체 예전에 남자였을 때 여자에 대해 호기심도 없었냐?”

“호기심? 무술 익히느라 바빠서 여자라고는 사귀어 본 적도 없었다. 바빠 죽겠는데 당연한 거 아냐? 또, 생리라는 것은 여자가 성장하면 모두 한다면서? 그런데 그걸 말하는 게 왜 잘못된 거야? 모두들 다 아는 사실인데……. 이상한 녀석들이군.”

이렇게 당당하게 반론을 펼치는 데야 오히려 이쪽이 주눅이 들 수밖에.

“에……. 음, 도저히 나는 설명 못 하겠으니까 나중에 미디아하고 상의를 해 보든지, 아니면 세린한테 물어봐. 사람 당황하게 만들지 말고.”

“뭐, 그러지.”

대화가 일단락되자 팔시온은 서둘러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런데 총독부 건물 앞에 그려져 있는 웃기는 그림은 뭐야?”

“무슨 그림?”

“아주 웃기게 생긴 황금색 드래곤 말이야.”

“아, 그거? 내 가문의 문장(文狀)이지.”

“세상에! 그게 문장이라고? 문장이라면 좀 더 멋지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드래곤은 드래곤이지만 꼭 입을 쫙 벌리고 있는 꼴이 그 뭐냐, 오리가 꽥꽥거리는 모습하고 비슷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그야 당연하지. 원래가 잔소리꾼 골드 드래곤이거든. 깃발에 그려진 모양이 꼭 잔소리하는 것처럼 생겼잖아. 적당히 설명해 줬는데, 그 화가(畵家)가 아주 내 마음에 쏙 들게 잘 그렸더군.”

“잔소리꾼? 어감이 꼭 실존하는 드래곤처럼 들리는데, 설마?”

“응, 실존하는 드래곤이야. 내 의부지. 엄청난 잔소리꾼 영감이야. 나중에 찾아오면 소개해 줄게.”

“맙소사.”

군사 재판

즐거운 만남의 시간도 잠시, 다음 날부터 팔시온 일행은 매우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실 다크가 이들을 불러들인 것도 일을 시킬 만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점령지였기에 아직도 반란군이 날뛰고 있었고, 주민들도 점령군을 의심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점잔빼고 있지만, 언제 짐승으로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르지’하는 의심스런 시선이었다. 원래 군대란 것이 조금만 통제가 느슨해지면 완전 무장한 떼강도가 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그걸 시민 탓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스톤은 마법사였고, 마법사 치고 돌 머리는 하나도 없었기에, 며칠 지나지 않아 치레아의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금 징수 부서에 배치되었다. 가스톤은 그 덕분에 불쌍하게도 매일 넘쳐나는, 빽빽하게 숫자들이 기록된 서류 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실바르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별로 없다는 점을 높이 사서 치레아 귀족들의 색출과 포획을 담당하는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귀족들의 대부분은 치레아 병합 시에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린 지 오래였고, 가까스로 도피에 성공한 자들은 이미 국외로 탈출해 버렸다. 그래도 실바르는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아직도 국경의 삼엄한 감시망 덕분에 도피하지 못한 귀족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인물들과 악덕 상인 등을 족치는 데는 돈을 별로 밝히지 않고,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실바르가 최고 적임자였다.

로니에 사제에게는 치료술사 몇 사람을 붙여 줘서 전쟁 후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고아나 질병, 부상자 치료 등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을 처리하게끔 했다.

치레아는 아르곤과 국경을 접하는 곳인 만큼 샤이하드라는 신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나라였다. 물론 이곳에서도 법으로 샤이하드를 믿는 것은 금하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들보다는 비교적 탄압의 강도가 약했고, 시민들도 샤이하드를 받드는 신관이라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로니에 사제가 활동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또 로니에 사제는 빈민들의 치료 등과 같은 실속 없는 일을 ‘품위 없는 일’이라 무시하고 겉멋만 잔뜩 든 다른 신을 모시는 사제나 마법사들과 달리 매우 열성적이었기에, 그에게 잘 맞는 일이었다.

그 외의 인물들은 다크가 직접 검술을 가르쳤다. 다크가 그들에게 가르친 검술은 크라레스 기사들이 익히게 되는 화려한 검술인 비류검(飛流劍)의 일부를 다크가 고친 것이었다. 비류검은 이전에 루빈스키 공작이 보여 준 것과 같은 매우 빠르면서도 화려한 검형(劍形)들로 이루어진 검술이었다.

물론 다크는 비류검을 겨우 3일 배우고 모든 것을 파악해 버렸지만, 그녀의 제자들은 한 달이 흘러가도 제대로 소화를 해내지 못했다. 다크는 매우 바빴기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직접 지도를 해 주었고, 평일에는 제2친위 기사단 소속의 그래듀에이트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또 다크는 바쁜 와중에도 하루 한 시간씩은 꼭 시간을 내어 타이탄 조종법을 배웠다. 물론 한 시간 정도 이론으로 배우고는 곧장 다음 날부터 한 명씩 돌아가면서 타이탄에 탑승한 채로 비무를 했다. 그녀의 발전 속도는 친위 기사단 기사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3일도 안 되어 평수를 이루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친위 기사단 내에는 상대할 만한 자가 없어 다(多) 대 일로 격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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