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시온 일행이 총독부에 근무하게 된 지 거의 3주가 흐른 어느 날.
“무슨 일이냐?”
다크는 검은색의 바지와 상의를 입고, 이제 화사한 꽃들이 피기 시작하는 봄이었지만 아직 날이 그렇게 따뜻하지는 않았기에 위에는 우아한 디자인의 얇은 검은색 코트를 걸쳤다. 코트 위에는 총독을 표시하는 문장과 오른쪽 가슴에는 ‘Ⅱ’ 자가 표시된 포악하게 생긴 검은색 드래곤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왼쪽의 옷깃에는 예의 그 웃기게 생긴 황금색 드래곤 문장이 단출하게 붙어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들은 모두 제2친위 기사단의 정식 복장이었다. 그녀는 한 달의 며칠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이 단순한 장식의 군복을 즐겨 입었다. 움직이기도 편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투박한 생김새의 옷조차도 그녀의 미모를 가리기는 힘들었다. 누가 봐도 미소년의 경지를 넘어 미녀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자임이 확실히 드러나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발코니에서 루빈스키 공작이 선물한 스바시에의 특산물인 브랜드 ‘레드 드래곤’을 마시고 있었다. 오후의 한가로운 한때를 방해한 젊은이도 그녀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은 총독의 문장이 없고, 골드 드래곤의 문장 대신 붉은색으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꽃의 문장을 달고 있었다.
“몇 가지 아뢸 상황이 있어서 뵙기를 청했사옵니다, 전하.”
“뭐냐?”
“저, 이것을.”
다크는 실바르가 건네준 서류를 쭉 훑어본 후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경은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가?”
“솔직히, 눈감아 주고 싶사옵니다.”
“호오, 눈감아 주고 싶다? 귀족 도피 방조죄(傍助罪)는 매우 크다. 경의 목을 걸고라도 놓아 주고 싶은가?”
‘네 까짓 게’하는 듯한 냉소적인 미소와 눈빛을 보자 울컥하는 성질에 실바르의 입에서는 생각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예, 그 때문에 전하께 직접 보고드리는 것이옵니다.”
“나는 경이 좀 더 똑똑한 놈인 줄 알았는데…….”
“죄송하옵니다, 전하.”
“그들을 풀어 줄 수는 없다. 아무리 그들이 뼈대도 없는 잔챙이 신흥 귀족이고, 또 민심을 많이 얻고 있는 훌륭한 인물들이라 해도 그들은 치레아의 귀족이었다. 또 무가(武家)가 아니기에 회유할 명분도 없다. 경이 그 보고서를 이리 가져오기도 전에 경이 불순한 마음을 먹고 있다고 보고해 온 자가 있었다. 이제 경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대가 바라고 있는 것을 말해 보라.”
단순한 실바르에게는 아마 이때가 태어나서 최고로 빨리 머리가 회전한 때였을 것이다. 그들을 살리고자 하면 자신이 죽고, 또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안전할지에 대한 보장은 없었다. 또 그들이 죽는다 해도 이미 고자질한 놈이 있는 한은 자신이 안전할 수 없었다. 이래저래 걸리는 것 투성이였고,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빠져나갈 방법은 단 하나, 과거 그를 죽일 뻔했던 자신의 이 아름다운 상관이 이해해 주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초리로 봤을 때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실바르는 1분 정도 생각하는 듯하다가 자신의 검대를 풀었다. 검대에 잘 묶여 있는 롱 소드는 그의 세 번째 애검이었다. 그 첫 번째와 두 번째 검이 모두 눈앞의 상관에 의해 사라졌고, 세 번째 검은 아예 마음을 비우고 거리에서 대강 쓸 만한 거 하나 장만해서 허리에 걸었던 것이다. 마음에 들던 검일수록 없어지면 쓰라린 마음만 더해지기 때문에 선택한 수수한 검이었다. 실바르는 검대를 롱 소드에 돌돌 말아서는 소녀에게 두 손으로 바치며 풀 죽은 어조로 말했다. 속으로는 ‘이게 아닌데…’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제 목을 드리겠사옵니다. 대신 주제넘은 부탁인 것을 아옵니다만 그들은 살려 주시옵소서. 그 정도 처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옵니다.”
“좋다. 하지만 지금 판결을 내리지는 않겠다. 오후의 즐거운 이 시간에 부하의 사형 선고를 내려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내려가서 기다려라. 두 시간 후에 부를 것이다. 참, 그들은 어디에 있지?”
“카르토 마을에 구금되어 있사옵니다.”
“일가족 모두 다 잡았나?”
“예, 전하.”
“그들을 숨겨 준 농민은?”
“그들도 잡아 놨사옵니다.”
“좋아, 내려가 보도록.”
“예, 전하.”
실바르는 이제 비무장인 상태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공작의 방을 나섰다. 그에게 이런 빌어먹을 일이 생긴 이유는 이렇다. 우연히 정보망에 이미 국외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이 걸려들었다. 카르토 자작은 전공을 높이 세운 것도 아니었지만 꽤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물로 사리사욕 없이 열심히 일했다. 그의 부친은 크라레스 병합 후 처형대 위에서 고인이 된 지크란 반 리에 백작이었다.
카르토 자작은 둘째 아들이었기에 물려받을 영지도 없었고, 작위도 허울뿐인 자작의 칭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관부에 들어가 소신껏 일했다. 물론 처음에는 열심히 일하는 그를 모두 좋게 봤지만, 점점 더 그의 관직이 올라가면서 껄끄러운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뇌물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 직위가 낮을 때는 돈 안 줘도 열심히 일해 주고 편의를 봐주니 좋지만, 지위가 높아진다면 비합법적인 행위를 좋아하는 인물들은 아무래도 껄끄러워지게 마련이 아닌가?
그 때문에 부패한 귀족들은 단합하여 이 귀족의 이단아를 관부에서 추방해 버렸다. 국왕에게 상소하여 카르토라는 제법 널찍한 마을을 영지로 주어 그리로 보내 버린 것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일약 정계의 중심에서 물러나 한가로운 농장 관리인이 되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카르토라는 마을과 마을 외곽에 위치한, 성(城)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은 카르토 요새(要塞), 그리고 카르토라는 성(姓)뿐이었다.
이제 한창 일할 나이인 마흔다섯 살에 강제로 은퇴당했지만 그는 직접 자그마한 농장을 경영했고, 영지의 농노들에게 40퍼센트라는 아주 낮은 세금을 징수했다. 세금을 낮췄으니 수입이 감소했지만, 그래도 국왕에게 바칠 정도는 충분히 되는 액수였다. 관례대로 국왕에게 영지에서 거둬들인 소득의 30퍼센트를 바치고, 나머지로 사병들의 월급도 주고 여러 가지 자잘한 일도 처리했다.
자신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거둬들이는 것으로도 일가족과 그의 사병 3백 명의 식사는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리저리 무도회다 뭐다 하며 돌아다니며 가산을 탕진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자신에게 떨어지는 10퍼센트만으로도 아주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쓰고 남는 돈으로 영지 내의 주민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다리도 만들고, 비만 오면 진창길로 바뀌던 도로 위에 자갈도 깔았다. 또 농노들을 위해 작은 사설 병원까지 마련해서는, 마법 학교를 갓 졸업해 아직 실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젊은 치료술사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풍년일 때는 세금을 좀 많이 거뒀지만 가뭄일 때는 대폭적으로 세금을 낮췄고, 그것도 안 될 때에는 자신이 농노들에게 식량을 무상으로 지원해 줬다. 그리고 주변의 영세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 주는 등 농노들과 부근의 자립 영세 농민들에게 착실하게 민심을 얻고 있었다. 이렇듯 애정을 쏟아 왔던 영지였기에 갑자기 치레아가 크라레스에 병합된 후 곧이어 국경이 막혀 버렸음에도 그는 구차하게 도망치지 않았다. 죽어도 조국에서 죽겠다는 생각으로 아직 그 마을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실바르는 단순한 무인이었지만 그래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기에, 착실하게 자작 가족을 추격하면서 얻은 정보들을 통해 솔직히 처형해 버리기 매우 아까운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하러 총독부에 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작 가족을 살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무언중에 가해 오는 다크의 압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울컥 그런 소리를 내뱉었던 것이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었지만―그때 내 정신이었나 하고―다시 공작에게 찾아가서 이미 지나간 일을 구차하게 사정할 위인은 아니었다.
두 시간 후 다크가 아래로 내려갔을 때는 제2친위 기사단 소속의 무사들이 그녀의 명령에 따라 모두 집합해 있었다. 50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교가 외쳤다.
“일동(一同) 착석!”
그와 동시에 모두들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 수는 현재 3개 사단의 보병과 1개 여단급의 기병, 그리고 제2친위 기사단과 파병 나온 콜렌 기사단원 40명이었다. 물론 콜렌 기사단원들 중 20명은 그들의 타이탄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제2친위 기사단 소속의 무사들뿐이었다. 나머지 장병들이 반란군 토벌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든지, 아니면 사창가에 모여 창녀들과 노닥거리고 있든지 이들의 관심 사항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상당히 뛰어난 치레아의 귀족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을 건 실바르의 군사 재판을 참관(參觀)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다크는 천천히, 하지만 매우 냉정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제군들! 드미트리 실바르 경은 치레아의 귀족 일가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놨다. 이봐! 그를 데려와라.”
그러자 장교 한 명이 비무장 상태의 실바르를 인도해서 총독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혔다.
“이제부터 제군들에게 실바르 경이 조사한 결과 보고서와 실바르 경을 탄핵한 보고서를 함께 보여 주겠다. 20분간 시간을 줄 테니 그동안 충분히 읽어 보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공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명의 장교가―팔시온과 미디아였다―이곳에 모여 있는 제2친위 기사단 소속 무사들에게 서류의 필사본(筆寫本)을 나눠 주었다. 그 서류에는 실바르가 제출한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을 옹호하는 의견과, 그들을 무조건 전례에 따라 처리해야 하며 아울러 그들을 옹호하는 실바르 경도 반란죄를 첨가하여 처리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함께 들어 있었다.
20분 정도가 지난 후 다크 로니에르 총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랭한 표정으로 천천히 한 자 한 자 힘주며 말했다.
“이제부터 제군들의 의견을 들어 보겠다. 실바르 경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주기 바란다.”
여러 명이 손을 들었다. 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쭉 훑어본 다음 총독은 나직하게 내뱉었다.
“사람 수를 기록해 두도록!”
“예, 전하. 25명이옵니다.”
“좋다. 실바르 경을 처형하고, 숨겨 뒀던 그 귀족들도 아울러 그들의 죄에 따른 당연한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주기 바란다.”
이번에 손을 든 사람은 22명이었다. 언제나 각자의 의견을 타진해 보면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이 있듯이, 어느 쪽으로도 손을 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실바르 경과의 친분, 그리고 다크와 자신의 어중간한 관계를 생각해서 뚜렷한 의견을 밝히지 못한 지미와 라빈도 있었다. 지미와 라빈은 다크가 뜻하는 바를 알 수 없었고, 자신들의 의견이 다크의 뜻에 반대될 수 있었기에 그냥 조용히 손을 들지 않았던 것이다.
다크는 손을 든 인물들을 쭉 훑어보았다.
“아직까지 정확한 자신의 주관을 제시하지 못한 바보 같은 녀석들은 일어서라.”
그와 동시에 세 명이 일어섰다.
“네 녀석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도 자신들이 듣고, 느끼고, 보아 온 결과에 자신이 없는가? 모두들 밖으로 나가 대 연병장을 백 바퀴쯤 돌면서 나는 왜 그렇게 멍청한지 곰곰이 생각해 봐.”
그 셋은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 다크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자신들의 진솔한 의견을 듣겠다. 자네!”
“예, 전하.”
“실바르 경과 그가 감싼 가족들을 죽여야 한다고 했는데, 왜 그런지 자네의 의견을 밝혀 주기 바라네.”
지적당한 제법 잘생긴 무사는 열성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예, 전하. 우선 보고서에 따르면 실바르 경은 카르토 자작을 살려 주기 위해 사건을 은폐한 혐의가 있사옵니다. 그것은 국법에서 금하는 귀족 도피 방조죄에 해당하옵니다. 그리고 실바르 경은 거기서 더 나아가 카르토 자작 가족을 살려 주기 위해 그들의 행실을 과장되게 표현한 문서까지 만들어 전하의 이목을 기만(欺瞞)하려는 죄 또한 지었사옵니다. 이는 처형당해야 마땅하옵니다.”
“좋다. 자네, 실바르 경을 살려 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이번에 지명당한 장교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그 표정을 억누르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실바르 경의 의견은 정당하옵니다. 사실 본국은 치레아를 점령한 지 오래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런데 치레아 국민들이 매우 존경하는 인물을 처형하고 또 그를 제대로 평가한 본국의 실바르 경까지 처형한다는 것은 민심을 잃는 행위이옵니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주시옵소서.”
“둘의 의견에 덧붙이고자 하는 의견이 있는 사람은 말해 보라.”
다크는 또렷이 말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번 재판의 모든 결정권이 총독에게 있는 만큼 꼭 지명된 사람 외에는 또 다른 헛소리를 첨가할 의향이 없는 것 또한 사람의 심리였다. 잘되어 봐야 제대로 된 의견을 말했다는 칭찬 정도나 받을 뿐이었고, 잘못 풀릴 때는 말 한마디로 감옥에 들어가서 인생 망치는 사태도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의견이 없자 다크는 천천히 침착하게 말했다.
“더 이상의 의견은 없는 것으로 알겠다. 그러면 이제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를 들여보내라.”
“예, 전하.”
그와 동시에 노년 티가 팍팍 나는 남자가 등장했다. 사실 그는 겉모습에 비해 젊었지만, 요 몇 주간의 지독한 사태가 그를 더욱 폭삭 늙어 보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대가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인가?”
잘해야 17세 정도로 보이는 소녀에게 엄청난 권력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카르토는 대충 대답했다.
“예.”
“자, 그렇다면 이제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를 재판하기로 한다. 그는 관부에 재직 시에 자신의 높은 직위를 이용해 법대로 행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수많은 귀족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또 그는 직위를 박탈당한 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농노들을 위해 40퍼센트라는 저렴한 세금을 징수했다. 그리고 마을로 들어서는 다리를 새로 만들었고, 또 도로를 포장했다. 그 외에도 무상으로 농노들에게 먹을 것을 지원해 준다든지, 또 농민들에게 매우 싼 이자로 대량의 식량을 빌려 준 것 따위의 추가적인 죄목도 있다. 그 외에 이자의 파렴치한 죄목이 더 있는가?”
다크의 말은 파렴치가 아닌 사항을 쭉 나열한 것이었지만 그 누구도 군소리를 할 입장은 아니었다. 또 진짜 파렴치한 죄목을 뒤집어씌울 만한 증거도 없었기에 모두들 조용히 앉아 있었다.
“피고(被告)는 방금 말한 모든 사실이 진실임을 인정하는가?”
“그렇소. 내가 한 행위가 잘못이라면 죄의 대가를 받겠소.”
“좋다. 더 이상의 반론도 없고 피고 또한 죄를 인정했기에, 그에게 그에 적합한 응분의 대가를 주고자 한다.”
다크는 앞에 앉아 있는 인물들을 쭉 노려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자에게 새로이 백작이란 칭호를 내리고, 총독부의 요직에 앉히고자 한다. 이의 있는 사람?”
모두 서로의 눈치만 보고 가만히 앉아 있자 다크는 또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 그대를 이제부터 크라레스 제국의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백작으로 임명한다. 이는 이미 황제 폐하께 본인이 직접 문의하여 폐하의 허락이 떨어진 사항이니 경들도 그렇게 알고 있도록. 또 그대는 영지를 직접 다스릴 만한 시간이 없을 테니, 대신 맡아 다스릴 인물을 구할 수 있도록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대리인을 구하여 나에게 보고하도록. 알겠나?”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판국인지 애매해진 카르토 자작은 거의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예.”
“좋아. 가스톤에게 가서 경의 영지와 작위에 관계된 서류를 받으면 된다. 그리고…, 실바르!”
“예, 전하.”
‘전하’라는 실바르의 외침에 카르토 자작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오만한 인상을 가진 소녀의 신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마도 황녀(皇女) 정도 될 것이리라.
“네 녀석의 이번 판단은 매우 정확했다. 세린!”
그러자 문을 열고 세린이 쫓아 들어와 다크에게 매우 호화로운 검을 건네주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이 호화로운 검은 다크가 세린에게 구입해 오라고 시킨 것이었다. 다크는 그 검을 실바르에게 내밀었다.
“무릇 요직에 앉아 있는 자들은 자신이 맡은 바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황제 폐하와 국가에 보탬이 될 것인지 심사숙고한 후 실행해야만 한다. 설혹 자신이 한 일 때문에 타인들에게 모함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겁내지 않고 실행해야 한다. 또 그 모함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충성심이 밝혀지게 되어 있다. 우리들이 모시고 있는 황제 폐하께서는 그따위 모함에 흔들릴 정도로 어리석은 분이 아니시다.”
다크는 부하들을 날카로운 눈길로 쭉 훑어본 후 말을 이었다.
“기사로서 국가와 폐하께 충성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묵묵히 수행하는 자들을 찾아내어 상을 주는 것 또한 윗사람인 내가 해야 할 의무다. 나는 경이 국가와 폐하를 위해 일하는 그 충성된 마음을 높이 사 이 선물을 하고자 한다. 받으라.”
다크는 이리저리 주워들은 결과 실바르의 검 두 자루를 박살 낸 원흉이 자신임을 알게 되었고, 미안한 마음에 이번 쇼의 주역으로 그를 선택했다. 폐하가 원하는 바가 뭔지 이 멍청한 무인들에게 명확하게 인지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이번의 군사 재판을 연 것이었다.
갑자기 정말 멋진 검을 자신에게 내미는 총독을 보고 실바르는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게 된 실바르는 그냥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어 검을 받았다.
다크는 실바르에게 검을 건네준 후 싸늘한 표정으로 쭉 나열해 앉아 있는 흑색 군복을 입은 무사들에게 외쳤다.
“들어라, 이 멍청한 녀석들아. 폐하께서는 인재를 원하신다. 네 녀석들은 그것 하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나? 그 인재가 어느 나라 사람이건, 또 귀족이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도 적국의 귀족이라고 해서 당연히 처형해야 한다는 돌대가리들이 있다는 사실에 본인은 매우 가슴이 아프다. 더 이상 그대들을 질책하지 않겠다. 그대들은 제2친위 기사단의 엘리트들이다. 나의 말을 밑거름 삼아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각자의 임무를 수행해 주기 바란다. 알겠나?”
“예, 전하.”
다크는 그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가 버렸고, 이제 주눅 든 표정의 무사들만 남아서 쑤군거렸다. 그러다가 한 명씩 또는 무리를 지어 자신들의 근무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을 체포한 후 매우 동정적으로 대해 주던 실바르가 호출당해 돌아간 직후, 그란트 반 리에 카르토 자작 또한 총독부에 강제로 끌려왔다. 다크가 두 시간이란 여유를 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카르토 자작이 도착해야 그때부터 연극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르토 자작은 한 시간쯤 전에 도착했고, 여태껏 총독부 부속 건물에 위치한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재판을 한다고 이리로 끌려올 때 이제 끝장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아마도 총독부 건물 앞에서 목 매달릴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왔는데, 갑자기 백작으로 승격되었고, 자신의 모든 재산도 온전하게 유지되었다. 이 모든 게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고, 그 냉랭한 표정을 가진 소녀가 사라진 다음에도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아둔한 머리로 어느 정도 상황을 대충 정리한 실바르가 이제 카르토 백작이 된 남자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잘되셨군요. 모든 게 공작 전하께서 상황을 잘 판단하신 덕분입니다. 일단 제가 가스톤 경에게 안내해 드릴 테니 그곳에서 서류를 수령하신 후 돌아가셔서 가족들을 안심시켜 주십시오. 이리 따라오세요.”
“예, 감사합니다. 실바르 경. 그런데 아까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 소녀 말입니다.”
카르토 백작의 물음에 실바르는 무의식중에 새로 생긴 자신의 애검 손잡이를 꽉 쥐며 미소를 지었다.
“치레아 총독이신 다크 폰 로니에르 공작 전하시죠. 크라레스 최고의 검객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