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티어스가 점소이에게 주문을 하고 있을 때,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장한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술 몇 병을 시켜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이보게, 봉황이 나타났다는 말 들었나?”
“아, 물론일세. 황금빛 찬란한 봉황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봉황이라면 상서로운 동물이 아닌가? 그걸 보면 이제 좀 살기가 좋아지려나……”
객잔에서 오가는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아르티어스가 묵향에게 물었다.
“도대체 봉황이라는 게 뭐냐?”
묵향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했다. 전설상의 영물 따위는 믿지도 않았기에.
“저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봉황이라는 새는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하죠. 오색 무지갯빛을 띠고 있다고 들었는데…. 뭐, 전설에나 나오는 소리들이니까 믿거나 말거나죠. 세상이 어수선할 때가 되면 꼭 어떤 놈이 봉황을 봤다느니, 뭐 그런 식으로 헛소문을 퍼뜨린단 말이에요.”
묵향의 얘기를 들은 장한이 벌떡 일어서서는 묵향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뭔가 모욕이라도 당한 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그는 묵향 등이 앉아 있는 탁자를 쾅 내리치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헛소문을 유포한다고 했을 뿐이오.”
장한은 커다랗게 콧김을 뿜어내더니 악을 써 댔다.
“헛소문? 이런 빌어먹을 놈을 봤나. 내가 직접 봤단 말이다.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봤다고 증언하는데, 감히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묵향도 장한에 못지않은 커다란 콧김을 거칠게 뿜어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놈의 잘난 영물을 어디서 봤소?”
“태호(太湖) 근처에서 봤다. 저 멀리 황해 바다에서부터 날아왔으니, 그 인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본 거지. 지금 소주나 항주 일대에는 봉황을 봤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야.”
“태호? 태호라고? 으하하핫!”
묵향은 배꼽이 빠져라 웃기 시작했다. 아르티어스가 날아가는 모습을 밑에서 보면 아마도 봉황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황금빛 봉황으로……. 사실 봉황이라는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 아무거나 거대한 게 날아가기만 한다면 봉황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어쨌건 그의 비행하는 모습을 봉황으로 착각했다는 것이 묵향으로서는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이봐, 간만에 재미있는 얘기를 했으니 내 용서해 주마. 빨리 가서 술이나 마셔.”
으드드득!
장한은 이빨을 갈더니, 곧장 주먹을 날려 왔다. 하지만 묵향은 가볍게 주먹을 낚아챘다. 손목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가하자 장한의 얼굴이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이제 장난은 그만 치고 술이나 마시지?”
한순간 장한의 손목에 가해지던 힘이 사라졌다. 묵향이 풀어 줬기 때문이다. 장한은 떨리는 음성으로 다급히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짙은 공포가 어려 있었다.
“하, 하늘을 몰라 뵙고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이,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한은 물러나자마자 일행과 함께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객점에서 도망쳐 버렸다. 괜히 무림인들을 건드렸다가 경을 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르티어스는 묵향을 향해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런 너절한 놈들과 놀지 말고, 어서 봉황이나 잡으러 가자. 응? 영물이라고 하니까 뭔가 좋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에 묵향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묵향은 아르티어스를 향해 비비꼬인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호오, 저보고 드·래·곤·슬·레·이·어가 되라는 말씀이세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놀랍다는 듯 대꾸했다.
“뭐? 드, 드래곤? 설마, 여기도 내 동족이 살고 있단 말이냐?”
“아뇨, 저자들이 말하는 봉황을 잡는다면…, 어쩌면 저는 부친 살해의 죄를 저지른 패륜아가 될지도 모르는데요?”
묵향의 말에 아르티어스는 그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다. 그놈의 봉황이라는 것이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말이다.
“제, 젠장.”
투덜거리는 아르티어스를 뒤로하고 묵향은 창밖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거리에는 어쩐 일인지 거지들이 떼거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것이 이상한 건 아니다. 문제는 거지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매우 맑고 깊다는 데 있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개방의 거지들이다.
“저…, 아버지.”
아르티어스는 점소이가 가지고 온 오리 다리를 신나게 뜯고 있다가 대꾸했다.
“왜 그러냐?”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그 말에 아르티어스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빌어먹을! 그런 일은 그냥 슬그머니 갔다 와. 음식 맛 떨어지게 말하지 말고.”
묵향은 객점 밖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거지들을 족치는 것은 오랜만이군. 역시 정보 획득에는 개방의 떨거지들을 조지는 것이 최고지, 흐흐흐흐.”
묵향은 음흉스런 미소를 흘리며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는 개방도들을 따라갔다.
방금 전에 일어난 참상을 이야기해 주듯 현장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세 명의 거지가 길게 뻗어 있었고, 나머지 거지들은 공포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은 오줌까지 지렸는지 아랫도리가 축축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길래?
“짜식들, 빨리빨리 털어놓을 일이지. 개기기는…….”
묵향은 손을 탈탈 털면서 이죽거렸다. 개방의 하급 요원들이라서 그런지 족쳐 봐야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역시 느긋하게 주리를 틀려면 분타주급은 되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옥과도 같은 정보가 술술 튀어나오는 게, 고문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나 해야 할까?
‘분타주를 찾아서 족쳐 볼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것만으로도 꽤 쓸 만한 정보를 획득한 셈이다. 묵향은 객점으로 돌아가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방금 전에 개방도들에게 뺏은 것이다.
“사내답게 잘생겼군. 이놈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인걸?”
장인걸을 제압한 후, 그의 수하였던 무영신마 장영길을 받아들일 때가 생각났다.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하고 묵향이 질문을 던졌을 때, 장영길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표정에는 결코 비굴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장인걸 교주를 향한 의리는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대답이야 어떻든 간에, 묵향은 장영길의 사내다운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그의 목숨을 살려 줬다. 사실, 장인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고수들의 대부분이 그때 처형당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사후 처우는 파격적이기까지 했었다. 왜냐하면 묵향은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자성만마대를 맡겼기 때문이다.
“클클클, 아마 그때 무영신마 녀석, 속으로는 식은땀깨나 흘렸을 거야. 제법 마음에 드는 놈이라서 자성만마대를 맡긴 것이었는데, 그놈이 왜 무림에 튀어나온 거지? 그것도 호위도 거의 없이.”
묵향이 객잔에 돌아왔을 때, 아르티어스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이빨에 고기가 끼었는지 이쑤시개를 쑤셔 대며 말했다.
“꺼억! 이쪽 음식은 정말 마음에 드는군.”
“정말이세요? 잘됐네요.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좀 더 돌아다녀야 될 것 같으니까요.”
드러나는 정체
개방은 무림맹이 진행 중인 무영신마 추살 작전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중원에서 손꼽히는 정보 단체 개방. 하지만 거지로 이뤄진 단체였기에 다른 문파와는 다른 독특함이 있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관제묘(關帝廟).
원래 삼국지의 영웅들 중 한 명인 관우 장군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었지만, 현재는 거지 떼의 본거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관제묘는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지붕의 일부는 무너져 안에까지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지붕 틈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끄덕끄덕 졸고 있던 늙은 거지는 늘어지게 하품을 한 후, 품속에 손을 넣어 벅벅 긁으며 일어섰다.
“젠장, 이놈의 이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군.”
온몸을 벅벅 긁던 늙은 거지는 관제묘의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좀 어둡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낮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거지 몇이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잠시 물끄러미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늙은 거지는 문짝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햇볕이 잘 드는 뜰에 삼삼오오 사이좋게 모여서 이를 잡고 있는 거지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혹시 연락 온 것 없었냐?”
“아직 없습니다.”
“젠장,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로군. 도대체 어디로 숨어 버린 거지?”
이때 밖에서 거지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타주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라는 말에 늙은 거지의 눈빛이 불타듯 빛났다. 과연 방금 전까지 나태하기 그지없던 늙은 거지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무슨 일이냐?”
“취풍개(醉風쾬) 일행이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분타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누가 무슨 목적으로 우리 거지를 습격했단 말이냐?”
“그놈은 갑자기 나타나서 단번에 형제들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분타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럴 수가, 취풍개라면 꽤나 무공이 뛰어난데, 어찌 그렇게 가볍게 제압을 당했다는 말이냐? 그리고 그를 따라간 형제들의 수가 10여 명인데…….”
“어쨌건 일순간에 제압했다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고수인 모양입니다. 그는 형제들을 붙잡고 차마 입에 올리기도 거북할 만큼 지독한 고문을 가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좀 이상합니다.”
“뭔데 그러느냐?”
“왜 이 근처를 얼쩡거리느냐고 했답니다. 그러면서 대답을 안 하면 자근자근 짓밟았다고…….”
도무지 짐작조차 안 간다는 듯 분타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가려운 곳을 찾아 북북 긁어 대고 있었다.
“거참 이상하군. 고문을 하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래, 어떤 정보에 그가 가장 관심을 보였다고 하더냐?”
“예, 무영신마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형제들이 지니고 있던 그의 초상화까지 뺏어갔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분타주는 손바닥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옳거니. 그렇다면 놈이 원했던 정보는 처음부터 그것일 가능성이 크겠어. 나머지는 연막이겠지. 그건 그렇고, 그런 무지막지한 놈을 피해서 용하게 살아서 탈출한 형제가 있었던 모양이군.”
거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예? 죽은 자는 하나도 없는뎁쇼? 몇 명이 의원에 실려 갈 만큼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거지의 대답에 분타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뭐야?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거지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워낙 순식간에 제압을 당하다 보니, 사상자가 있을 수가 없었죠. 반항하며 치고받아야 누가 다치든지 죽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의원에 실려 간 형제들은 정보를 누설하지 않기 위해 버티다가 그렇게 되었답니다. 그놈은 모질게 고문하며 알아낼 것은 다 알아낸 후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하더군요.”
거지의 말에 분타주는 인상을 찡그리며 한동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요상하네. 고문을 한 후에 왜 죽이지 않았지? 보통 뒷감당이 두려워서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하는 것이 정석인데 말씀이야.”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던 분타주는 이윽고 뭔가 떠올랐는지 버럭 소리쳤다.
“그놈이 감히 개방을 우습게보고 그냥 살려 둔 건가? 뒷감당 따위는 겁나지도 않는다고?”
분타주는 곧이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일부러 흔적을 남겨 우리의 이목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인지도 몰라. 에잇, 젠장.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구먼.”
원래 분타주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로 내뱉는 경우가 많았기에, 거지는 분타주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분타주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멀쩡한 놈들은 고문당하는 게 무서워서 나불나불 다 실토했다는 소리 아냐? 멀쩡한 놈들 다 튀어오라고 그래! 고문이 무서운지, 내 몽둥이찜질이 무서운지 단단히 가르쳐 줘야겠다. 썩을 놈들!”
그 말에 보고를 올리던 거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분타주의 그 난폭하기 그지없는 성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거지는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이놈들, 그냥 고문 좀 당하고 의원에 실려 가고 말지. 분타주 성격상 반쯤 죽여 놓을 텐데, 젠장! 한동안 골병 든 놈들 뒤치다꺼리하려면 허리가 휘겠군.”
남궁세가에서 협조 공문과 함께 날아온 초상화는 무영문에 소속된 하급 무사들의 손을 떠돌다가, 이윽고 총관에게로까지 올라왔다.
“무슨 일이냐?”
“남궁세가에서 보내온 초상화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빨리 파악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수하의 말에 총관은 짜증 어린 어조로 대꾸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초상화 한 장만 가지고 그게 누군지 알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지금 그따위를 조사할 시간이 어디 있나? 마교의 장로를 척살하는 일만 해도 일손이 딸리는데…….”
“남궁세가에서는 그자가 마교의 장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속하가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긴 했지만 도무지…….”
총관은 신경질적으로 초상화를 뺏어 들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빨리빨리 가져와야 할 것 아닌가? 마교의 고수들만 조사해 보면 곧바로 알 수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수하는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놨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어떤 장로의 초상화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젠장, 또 새로운 고수인가? 어쨌거나 마교 놈들 워낙 보안이 철저해서, 상층부 고수들의 얼굴은 거의 알려진 게 없으니…….”
총관은 투덜거리며 초상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이어 초상화를 쥐고 있는 총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인물을…….
초상화를 움켜쥔 총관은 곧장 옥화무제에게 달려갔다. 그가 얼마나 다급하게 뛰어들었는지, 옥화무제가 그의 경망스러움을 탓할 정도였다. 하지만 총관의 얘기를 듣자 그녀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뭣이라고?”
옥화무제는 총관의 손에 들린 초상화를 뺏듯이 잡아들었다. 그런 다음 종이를 쫙 펴니 드러나는 얼굴.
세부 묘사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했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틀림이 없었다. 옥화무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총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이 일을 당장 남궁세가와 무림맹에 통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옥화무제는 편두통이라도 시작되는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자, 잠시만요.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에요.”
말을 마친 옥화무제는 마음이 심란한지 실내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회한 그녀였기에 곧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 이 인물이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말인가? 여태껏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너무나도 조용하게 지냈다. 그게 오히려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곤 했었다. 그가 그렇게 조용히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무림에 20여 년 동안 그 모습을 보이지 않자 강호에는 죽었을 거라는 둥, 생사경을 깨닫기 위해 무공수련을 한다는 둥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어쩌면 그녀도 그런 식으로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 건강상 더욱 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는 마교 교주가 새로이 선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세월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왜, 이제야 출도하는 것인가? 그동안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설마, 생사경의 벽을 깬 것은 아니겠지?”
자신의 생각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는지, 옥화무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생사경이라는 것 자체가 호사가들이 만든 헛소리야.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옥화무제는 갑자기 총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차가운 어조로 지시했다.
“당분간 이 사실은 총관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총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 그건 어쩐 연유에서 그러시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쩌면 그가 가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그리고 만약 그가 진짜라 할지라도 이번 기회에 그의 실력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겠어요?”
총관은 당황스러운 듯 대꾸했다.
“하,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 잘못되면 정파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는 탈마의 고수입니다. 겨우 마교의 장로급을 처치하기 위해 동원한 무림맹의 고수들로는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옥화무제는 그렇지는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과거에도 그는 그렇게 대량 학살을 저지르며 다니던 사람은 아니었어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의 행동은 정당했죠. 그걸 믿는 거예요. 가짜라면 천라지망에서 살아나올 수 없을 것이고, 진짜라면 무분별한 살행을 저지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총관은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사실 어떻게 되더라도 무영문에는 피해가 없지 않은가. 무림맹으로서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은 무영문의 입지는 무림맹 내에서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번 기회에 마교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라고 총관은 생각한 것이다.
“오, 그렇게 깊으신 뜻이 있으셨다니…….”
하지만 옥화무제가 총관에게 말하지 않은 가능성이 하나 있었다.
2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묵향의 성격이 혹 변하지 않았는가하는 점이었다. 일부 고수들 중에서 폐관수련 중에 인간성이 완전히 바뀌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정종무공을 익힌 정파의 고수들 중에도 간혹 그런 경우가 발생하는데, 패도적인 마공을 익힌 마교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만에 하나 만약 그가 잔혹한 성격으로 바뀌었다면 아마도 무림은 피에 잠기게 될 것이 뻔했다. 그는 충분히 그럴 능력과 세력이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질리는지 가만히 고개를 흔들던 옥화무제는 총관을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아무래도 내가 안휘성분타로 직접 가 보는 것이 좋겠군요. 여기서 보고를 듣고 판단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요하니까요.”
확실히 시시각각 변해 가는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려면 안휘성분타와 총단과의 거리는 너무도 큰 방해 요소였다. 그렇기에 총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런데 호위는 어느 정도 규모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잠시 궁리하던 옥화무제는 마음을 정했는지 총관에게 입을 열었다.
“그와 싸울 게 아니니 호위는 필요 없고, 가만있자…, 부문주는 어디 있죠?”
“아마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좋아요.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지금 당장 이쪽으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옛, 그럼 속하는 물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