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옥대진을 상대로 입씨름을 하던 취조관은 떨떠름한 얼굴로 옥대진의 방을 나섰다. 사실 죄를 고백받는 것쯤이야 오랜 세월 이 직책을 맡아 왔던 그에게 있어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주리를 틀어 대면 열에 아홉은 없는 죄도 시인했다.
물론 끝까지 죄를 시인하지 않는 자도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어 버렸다. 죽어 버린 자를 비호하는 자가 있을 리 없었으므로 대충 죄를 뒤집어씌워 결과를 발표하면 모든 게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 직책에 오랜 세월 종사한 그인 만큼 이렇게 큰소리를 쳐 대는 죄인을 상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배알이 뒤틀리는 것을 억지로 참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다그치자니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배경이 마음에 걸렸다. 까딱 잘못하면 되려 자신의 목이 날아갈 우려가 있는 것이다.
취조관은 밖으로 나온 후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여기에 오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했거늘……. 개새끼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있어야 조사를 하든지 신문을 하든지 할 거 아냐!”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객잔을 경비하고 있는 책임자가 눈에 띄자 서둘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자네 잘 만났군. 안 그래도 찾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무슨 하명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모두들 명문의 자제들인 만큼, 감시에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결코 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 주게.”
“물론입니다. 이미 수하들에게 대접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해 뒀습니다.”
“잘했군. 빌어먹을! 저런 세도가의 자제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원…….”
경비 책임자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마 조만간 위쪽에서 가부간에 결정을 내리시겠지. 사실 맹에서도 그 명문들과 척을 질 결심이 아닌 바에야 어찌 징죄를 할 수 있겠나? 그냥 대충 조사하는 척하다가 모두 방면될 게 분명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런 만큼 저들의 대접에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야. 저놈들이 나중에 문파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험담이라도 늘어놓으면 자네는 물론이고 나까지도 박살이 나는 수가 있으니까.”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경비 책임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내는 길게 자란 턱수염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쓰다듬으며 맹주에게 말을 건넸다.
“금으로부터 밀서가 도착했습니다.”
도사들이나 입는 도복을 입고 있는 이 선풍도골형의 사내를 향해 맹주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대답했다.
“밀서라……. 무슨 일인데 그들이 노부에게 밀서를 보냈다는 말인고?”
“예, 혹시 무슨 사단을 부려 놨을 가능성도 있기에 밀서를 개봉한 후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아무런 문제점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그 내용이…….”
독이라든지 기타 이물질 등을 발라서 밀서를 보냈을 수도 있기에 그렇게 조사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왜 이런 말을 맹주에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그가 바로 맹주 직속에 있는 감찰부(監察部)의 수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맹주의 사질이었다. 사실 맹 내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그런 중요한 직책을 다른 인물에게 맡길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는고?”
“그들에 대한 적대 행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번에 그들이 포로로 잡은 무림인들을 처형하겠답니다.”
그러면서 감찰부주는 두툼한 서신을 맹주에게 전했다. 금제국이 포로로 잡은 인질들을 출신 문파별로 정리해 놓은 목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협박문을 냉철한 표정으로 끝까지 다 읽은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이 내용이 발표된다면 무림맹은 크나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기에.
“그래, 사질의 생각은 어떤가?”
“예, 빈도의 의견을 물으신다면…, 이것을 그냥 밝히는 편이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대외에 공포하면서 대 금제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간다면 오히려 본맹으로서는 더욱 이익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맹주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숨기지 말고 그냥 드러내자…….”
“예, 사실 맹에서 그들이 보내온 서신을 비밀에 붙인다고 해도 한순간을 넘기기 위한 미봉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본맹에 서신을 보낸 이상, 여기 관련되어 있는 많은 문파들에 개별적으로 서신을 보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각 문파들을 뒤에서 협박한다면 더욱 큰 혼란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맹주는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하구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파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진대, 그에 대한 대책을 생각한 것이 있는가?”
“이번 인질 사건에 관련이 있는 문파와 연관이 있는 맹의 높은 직위를 지닌 자들을 모두 추려 낸 후 한직으로 돌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그들이 금에 굴복하여 협조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한다면 반발이 클 텐데…….”
“밀서를 공개하여 금에 대한 공분을 유도하는 한편,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려 있을 때 이 일을 비밀리에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호, 그렇겠구먼.”
이때,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후, 경비 책임자가 들어왔다. 그는 예를 갖춘 후 맹주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수개 장로께서 독대를 청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올지 하명해 주십시오.”
“공수개 장로가? 그가 무슨 일로 독대를 청한다는 말인가? 혹시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겁 때문인가?”
맹주의 추측도 일리가 있었다. 요즘 들어 여기저기에서 마교도의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 사건이 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찰부주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일 때문이라면 굳이 맹주님께 독대를 청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 양양성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개방에 그 죄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겠지요. 사실 개방에서 젊은 것들에게 정보가 새 나가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 일로 공수개 장로가 찾아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가 만약 그런 일로 찾아온 것이 맞다면 노부는 실망할 걸세.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숙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감찰부주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조언했다.
“맹주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 적당히 넘어가시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개방과 사이가 틀어져 봐야 본맹만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감찰부의 정보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점을 유념해 주십시오.”
씁쓸한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맹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질의 말이 옳은 듯하구먼.”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닐세, 그럴 필요 없네. 그냥 앉아 있게.”
그렇게 말한 후 맹주는 밖에 대고 외쳤다.
“공수개 장로에게 들어오라 이르게.”
“옛.”
곧이어 공수개 장로가 들어왔다. 그는 맹주가 혼자가 아니고, 그 옆에 감찰부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흠칫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표정을 바로잡으며 맹주에게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게. 노부와 독대를 요청했는데, 무슨 일이오? 공수개 장로.”
맹주의 태도는 독대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감찰부주가 있는 이 자리에서 밝히라는 말이었기에 공수개 장로는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생각을 바꿨다. 사실 조금 지나면 맹주는 감찰부주나 몇몇 측근들과 대화를 나눌 것이 분명한데 독대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음을 정한 공수개 장로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예, 남양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해 맹주님께 아뢸 말씀이 있어서 감히 독대를 청했습니다.”
“그래, 무슨 말씀이시오?”
“이번 사건을 맹주님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실 요량이신지 여쭤 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맹주는 슬쩍 감찰부주를 바라본 후 난감한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허∼ 그것 참. 난처한 질문이구려.”
물론 맹주가 그에 대한 답을 자신에게 해 줄 리가 없음을 공수개 장로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개방의 잘못은 아예 거론하지 않고 옥대진을 물고 늘어졌다.
“이번 사건의 생존자들 중에서 옥진호 장로의 손자인 옥대진이 끼어 있지 않습니까?”
“보고서는 받아 봤소.”
“예, 본방에서는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인 옥대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무림맹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말에 맹주는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무슨 말이오?”
“본방에서는 모든 생존자들과 면담을 했고, 또 이번 사건에 가담한 자들이 소속된 문파들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들 한결같이 옥대진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얼굴을 봐서 그를 용서해 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며 공수개 장로는 맹주의 표정을 힐끗 훔쳐봤다. 사실 맹주로서야 옥진호가 사라져 주는 것을 바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맹주가 옥대진을 봐줄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설혹 맹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은 실례였다.
“노부가 인정에 치우쳐서 그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노부는 이번 사건을 통해 개방의 정보망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공수개 장로는 펄쩍 뛰듯 놀라며 말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문제가 있다니요.”
“젊은 것들만 가서 일을 망쳐 놨다면 그들을 치죄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노부가 받은 보고로는 절파검 같은 절정고수도 거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가 죽음을 당했을 정도라면 저쪽도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나? 오히려 그 아이들 덕분에 더욱 큰 화를 모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맹주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맹주가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상대는 수라도제였다. 만약 이번에 금군의 촉각에 걸려든 자가 수라도제였다면, 무림맹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변했다.
“그건 맹주님께서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겁니다. 물론 절파검이 뛰어난 고수라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맹주님께서 남양을 치라고 명령한 사람은 절파검이 아닌 수라도제 대협이 아닙니까? 또, 절파검이 처음부터 침투를 목적으로 그곳에 갔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침투가 아닌 황보세가의 어린 것을 보호하기 위해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 망할 철부지 녀석들이 금군 병사들에게 들키자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방에서는 이 계획을 맹주님께 말씀드리며 신신당부 드렸었습니다. 정면 공격을 해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입니다. 우수한 고수가 인기척을 숨기고 몰래 침투하여 불만 지른 후 재빨리 후퇴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작전의 가장 중요한 점이었습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사실 몰래 침투해도 성공했을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게 시도해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맹주는 공수개 장로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과연! 공수개 장로의 말이 옳은 듯하구려.”
“이번 사건을 젊은 것들의 객기 정도로 너그럽게 넘어가시겠다는 맹주님의 넓은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다면 마교 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갑자기 공수개 장로가 마교를 들고 나오자 맹주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마교가 말이오?”
“예, 남양을 칠 계책은 마교에서 먼저 흘러나온 것입니다. 교주가 본방에 정보 요청을 했는데, 본방에서 철저하게 조사를 해본 결과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생각되어져서 그것을 우리 쪽에서 가로채자고 맹주께 청을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성공했다면 이쪽에서도 마교 쪽에 대고 할 말은 있었을 겁니다. 그쪽에서 하는 것보다는 이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성공확률이 높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둘러 대면서 마교 쪽 정보망이라든지 그쪽이 취약한 부분들을 물고 늘어지면 어느 정도 그들을 무마시킬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일이 실패한 이상 마교에서 수긍할 만큼 뒤처리를 해 줘야만 합니다.”
공수개 장로는 맹주와 감찰부주의 눈치를 힐끗 살펴본 후 말을 이었다.
“양양성에서 온 정보에 따르면 교주는 이번 일이 실패하자마자 수라도제 대협의 숙소에까지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모양이더군요.”
교주는 그날 수라도제의 숙소는 물론이고 양양성에 있는 개방도들까지 묵사발을 만들어 놨다. 하지만 공수개 장로는 개방에서 있었던 일은 쏙 빼놓고 수라도제의 일만을 말하는 것이다.
맹주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다는 듯 혀를 끌끌 찬 후 감찰부주에게 말했다.
“쯧쯧, 그런 일이 있었나?”
그 말은 감찰부주도 처음 듣는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도 그런 말은 처음 듣는지라…….”
“아아, 모두들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하기야 수라도제 대협처럼 속이 깊으신 분이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맹주님의 심기를 어지럽게 하는 연락을 했을 리 없겠지요. 하여튼 부상자가 30여 명에 이른다는 것을 보면 교주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말은 속이 깊다고 했지만 수라도제의 성질이 개 같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죽하면 신경질 난다고 소림사 정문을 박살 냈겠는가. 그런 인물이 그걸 쉬쉬하며 감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마도 마교 교주에게 줘 터진 것이 쪽팔려서 입을 다물었겠지.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서로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것 큰일이구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 마교와의 연합이 파기될 가능성까지 있다고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맹주도 예측하지 못했는지 불신 어린 어조로 물었다.
“흑살마왕이 금에 있는데 설마 그럴 리가……?”
“아닙니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들이 정파와 손을 잡은 이유는 흑살마왕을 잡는 데 그편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연합 작전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마교에서 거둔 전과는 엄청난 것이 아닙니까? 3만에 달하는 정파의 고수들에 비해 겨우 1만 남짓한 마교도들이 세운 전과가 더 크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거기에다가 아직까지도 마교는 주력을 투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맹주는 감찰부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감찰부주의 안색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림맹 내 정보 조직의 수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그쪽으로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문득 감찰부주의 뇌리를 스치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마교에서 공식적으로 보내온 항의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공수개 장로의 말을 들으니 마교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맹주님, 공수개 장로님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감찰부주까지 찬성해 주자 공수개 장로는 더욱 힘을 얻어 맹주에게 말했다.
“맹주님께서는 이번 사건의 사후 처리를 마교 쪽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셔야만 합니다. 인정에 치우쳐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신다면 마교와의 동맹이 파기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동맹을 파기한다고 했는가? 허어, 그렇다면 요 근래 몇몇 문파에서 일어난 마교도 소행으로 보이는 혈겁도 그들이 본맹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한 짓거리라는 말인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맹주님. 교주는 지금 양양성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흑풍대도 현재까지는 대단히 협조적이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천마혈검대의 고수들이 저질러 놓은 소행이 아닐까 본방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공수개 장로의 말에 감찰부주도 찬성했다.
“저희 쪽도 그럴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사실 마교 쪽의 첫 번째 목표는 흑살마왕입니다. 흑살마왕이 제거되지 않은 상황에서 마교가 본맹과 전면전을 벌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마도 흑살마왕이 꾸민 짓거리임에 분명하다고 판단됩니다.”
맹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사실 자신도 그것이 마교 쪽의 소행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 외에도 공수개 장로는 이런저런 말을 나눈 후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공수개 장로가 물러가고 난 후 맹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질, 과연 이런 일로 마교가 동맹을 파기할까?”
“개방의 추측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마교에서 항의문이 도착했었는데,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노부도 그걸 읽어 봤네. 자신들이 계획한 일을 무림맹이 가로 채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점잖은 어조로 질책하고, 더불어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의 조속한 처리와 그 처리 과정을 자신들에게 상세하게 보고해 달라고 쓰여 있었지 않은가? 사실 그쪽에서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공수개 장로의 지적을 받은 후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더군요.”
“뭐가 말인가?”
“예, 공수개 장로는 마교 교주가 그 사실을 알자마자 수라도제 대협을 찾아가서 행패를 부렸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성질이 급한 인물이 공식적인 통로를 밟아 항의서를 보내다니요. 너무나도 이성적인 행동이 아닙니까? 양양성에서 직접 항의문을 작성하여 수라도제를 통해 무림맹에 보내도 되었을 텐데, 왜 굳이 마교 총타로 연락을 보내고 또 그곳에서 무림맹으로 공식 서한을 보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까지 치밀한 처리를 한 것을 보면 교주는 만약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동맹 파기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허어…, 하지만 그는 흑살마왕을 없애기 위해 본맹의 힘이 필요할 텐데…….”
“어쩌면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본맹이 별 필요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맹주를 향해 감찰부주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조목조목 말했다.
“먼저 지금껏 금과 전쟁을 벌이면서 마교에서 투입한 흑풍대의 전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교의 정예들을 몽땅 투입한다면 본맹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한 일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번에 남양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마교는 본맹이 오히려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훼방 놓는 훼방꾼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믿지 못할 동료는 없는 편이 더욱 편하다는 사실을 맹주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허어, 그럴 수도 있겠구먼.”
“지금까지 맹주님께서는 옥진호 장로의 처결을 미뤄 오셨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결단을 내리셔야 할 듯합니다.”
여태껏 맹주는 옥진호 장로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맹주파로 꼽히는 몇몇 장로들이 그의 제거를 비밀리에 거론해 온 적이 있었지만, 맹주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무당산에서 심신을 청결하게 닦아오던 그에게 있어서 권력욕에 물든 그러한 행동들이 다 헛되게만 느껴졌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거론된 옥진호 장로의 제거 안은 조금 다른 면모를 띄고 있었다. 옥대진을 처리하려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옥진호 장로도 없애야만 하는 것이다.
“무량수불…, 이런 식으로 그를 보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것도 다 원시천존님의 뜻인 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