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의 재가(裁可)가 떨어지자마자 각 전투단들 및 호법원은 대대적인 재편성 작업에 들어갔다. 너무 많은 고수들이 죽었기에 충원할 만한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전투단의 규모를 조금씩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숫자만 늘리는 것보다는 평균적인 전투력을 높은 게 아무래도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때문에 혈랑대는 100명, 수라마참대는 400명, 천랑대는 800명, 염왕대는 1,400명, 자성만마대는 5,000명 수준으로 그 규모를 맞췄다.
물론 흑풍대는 재편성 작업에서 제외되었다. 딱히 충원할 인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인원을 영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재편성 작업을 끝마친 후, 관지 장로를 제외한 다른 장로들은 자신이 맡은 전투단들이 제대로 된 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각 전투단마다 고유의 진법이 있었고, 권장하는 무공이 있다. 천마혈검대처럼 소속원의 무기를 하나로 통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여러 무기를 조합하는 쪽을 택했다. 단일 병기로 통일시키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더러, 잡다한 무공들을 익힌 단원들을 포용하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각종 무기술을 익힌 자들은 물론이고, 권장법을 익힌 자들까지 두루 모여 진세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공격과 수비에 있어서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치는 쪽이 훨씬 더 강하다는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바로 진법이다. 집단의 힘은 통일성에서 나오는 만큼,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복 숙달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거 아닌가?”
묵향의 집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는 건 수라마참대였다. 얼마나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는지 모두들 땀에 푹 절어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훈련이, 잠시의 휴식도 없이 오후인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었던 것이다.
묵향의 말에 뒤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석장로였다.
“대원들이 너무 많이 바뀐지라, 제대로 손발을 맞추려면 최소한 몇 달은 족히 걸릴 겁니다.”
“몇 달이라…….”
수석장로는 교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훈련기간을 좀 더 단축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장로들을 독려할까요?”
잠시 생각하던 묵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 정도만 해도 충분해. 지금 당장 할 건 늙은 여우 사냥밖에 없으니까.”
묵향의 집무실에서 지금 북궁뇌 수석장로와 소무면 외총관, 비마대주 홍진 장로, 그리고 군사 설민이 모여서 전략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묵향으로부터 늙은 여우라는 말이 나오자, 수석장로는 고개를 돌려 홍진 장로에게 물었다.
“뭔가 흔적이라도 찾아낸 게 있나?”
“아직 없습니다.”
“거~ 참, 재주도 좋군.”
“지금껏 무영문이 위험한 줄타기를 하면서도 안전할 수 있었던 게 다 그 재주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수석장로님.”
수석장로는 묵향에게로 시선을 돌려 한 가지를 제안했다.
“교주님, 무영문을 찾을 때까지 그냥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본교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무림맹부터 손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수하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그 잡것들부터 멸해 버리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니야, 오랜 원정으로 인해 다들 지쳐 있는 상태지. 일단 푹 쉬면서 원기도 회복해야 할 테고, 각 전투단들마다 교육도 끝마쳐야 할 것 아닌가.”
“진법 훈련이 아직 미흡하다 뿐이지, 개개인의 실력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전투에 동원한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전투를 시작할 이유는 없다고 본좌는 생각한다네.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에 중원을 도모하는 것에 대한 의논을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교주님.”
묵향은 소무면 장로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외총관.”
“하명하십시오, 교주님.”
“정말 전투단을 맡을 생각이 없는가?”
인사이동 전에 묵향은 소무면 장로에게 전투단을 맡으라고 제안했었다. 그는 한영성 교주 시절에 자성만마대를 맡았었고, 장인걸 교주 밑에서는 수라마참대를 맡았었다.
그러던 그가 묵향 밑에 들어와서 외총관을 맡게 된 것은, 그 당시 외부 지단이 대폭 축소되어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묵향은 장인걸 밑에 있었던 소무면 장로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그런 한직에 앉혀 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소무면 장로는 분타들을 건설해 나가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고, 묵향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행정 업무가 주를 이루는 외총관에 앉혀 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력 낭비라고 볼 수 있었다. 그게 아쉬웠던지 묵향이 또다시 묻는 것이다.
묵향의 물음에 소무면 장로는 싱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해 온 일입니다, 교주님. 아마 속하보다 더 외부 지단을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네를 못 믿어서가 아닐세. 쓸데없이 일거리만 많은 직책이니 그런 게지.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이 더욱더 늘어날 게야. 어쩌면 수련할 시간조차 내기 힘들 정도로…….”
“안 그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교주님. 춘릉 대회전에서 본교가 승리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본교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정도입니다. 각 지역을 주름잡고 있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두 다 본교와 손을 잡기를 원하고 있으니, 본교의 영역은 더욱 넓어질 것입니다. 나날이 본교의 세력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속하에게는 크나큰 기쁨이니, 교주님께서 너무 심려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소무면 장로의 눈에는 강한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교주가 돌아온 이후, 외부 지단들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자기 입맛대로 키워 나가는 재미. 전투단을 맡게 되면 이런 재미는 절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고해 주게. 자네가 있기에 바깥쪽 일은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교주님.”
묵향은 설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회의할 안건이 더 있나?”
설민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제 급한 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상황이니, 교주님의 결혼식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석장로님.”
“그건 군사의 말이 옳구먼.”
수석장로는 웃으며 찬동했지만, 묵향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결혼식을 꼭 올릴 필요가 있나? 이미 같이 살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자 수석장로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결혼식을 올리셔야지요. 야인(野人)도 아니고, 교주님께서는 본교의 지존이십니다. 지존께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신다는 건 본교의 위신 문제입니다. 게다가 수하들 앞에서 체면도 서지 않고 말입니다.”
위신이라는 말까지 들먹거리는 것으로 봤을 때, 결혼식을 결코 조촐한 규모로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수석장로가 꽤나 강하게 나오자, 묵향은 다급히 핑계거리를 대야 했다.
“그건 그렇지만 아버님도 안 계신데 결혼식을 올릴 수는 없지 않겠나.”
묵향이 아르티어스를 방패로 들이밀자 모두들 찔끔하는 게 느껴졌다. 아르티어스의 괴팍함에 곤욕을 치룬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특히 수석장로가 가장 크게 고생을 했었다. 역시나 수석장로의 어조는 한풀 꺾였다.
“그렇다면 결혼식은 어르신께서 돌아오신 후에…….”
하지만 이때 의외의 복병이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소무면 장로였다. 그는 지금까지와 달리 매우 강경한 태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수석장로님. 만약 마화 님께서 본교의 안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 보십시오. 본교와 연을 맺은 모든 문파의 수장들이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자신들을 하찮게 생각해서 결혼식에 초대조차 하지 않은 거라고 오해할 겁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하,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지 않는가. 그들에게 교주님께서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신 거라고 해명한다면…….”
지금까지 옆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설민이 끼어들었다. 비록 아르티어스가 겁이 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냥 묻어 두지도 않았다.
“그런 해명은 먹히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어떤 문파는 초대를 받았는데, 어떤 문파는 초대받지 못했다는 식의 유언비어까지 퍼진다면 더욱 감당하기 힘든 사태로 발전하겠지요.”
“군사의 지적이 옳습니다. 교주님께서는 본교의 지존이십니다. 좋던 싫던 지존에 어울리는 행보를 밟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수석장로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놈들을 몽땅 다 초청해서 거창하게 결혼식을 올린 다음, 어르신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리면 되겠군. 그러면 어르신께서도 토를 다시지 않으실 게야. 아, 어쩌면 소문을 듣고 오실지도 모르겠군, 그래.”
묵향은 골치가 아픈지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사실 드레곤인 아르티어스가 자신의 결혼식 따위에 신경 쓸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좋은 것이고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묵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수 없지. 결혼식을 준비하게. 그리고 아버님이 참석하지 못한다고 해서 결혼식을 두 번씩이나 치를 필요는 없다네. 아버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 말이야.”
그 말에 수석장로는 희색이 만연하여 복명했다.
“옛, 그렇다면 지금 당장 결혼식 준비 작업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규모는 최대한 줄여서 하도록 해. 오랜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진 상황이니 말이야.”
“지존의 격에 맞도록 적당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집스럽게 대답하는 소무면 장로를 보며 묵향은 내심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면,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기로 하지.”
모두들 밖으로 나갈 때, 묵향은 홍진 장로를 불러 세웠다.
“자네는 잠시 나하고 얘기 좀 하세.”
묵향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홍진 장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게.”
난생 처음 보는 해괴한 문양에 홍진 장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글자인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어느 문파의 암호문입니까?”
“나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발해 문자일 거야. 그것도 꽤나 오래전에.”
묵향이 홍진 장로에게 건넨 것은 과거 북명신공을 익힐 때 그 비급에 기록되어 있었던 해독 불가능한 문장이었다.
묵향은 총단으로 돌아와 처음 며칠간은 전쟁의 뒤처리를 하다 보니 꽤나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논공행상도 끝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따분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그를 긴장시킬 적이 없다는 게 이렇게 따분할 거라고는 묵향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현재 정체되어 있는 무공을 수련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현경부터는 마음의 무공이다. 즉,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떤 것인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다. 현경으로 올라가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바로 급속히 성장한 내적 성장을 마음이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보다 더욱 강한 고수가 존재해서 그와의 대련을 통해 이런 무공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면 혹 몰라도, 천재라기보다는 노력을 통해 지금의 경지에 다다른 묵향의 상상력은 빈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문제가 현경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커다란 장벽일지도 몰랐다.
그때 우연히 묵향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예전에 북명신공을 익힐 때, 비급에 적혀 있던 한 토막의 발해 문장.
그게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나 중요한 말인 듯 하여 한동안 그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꽤나 노력하지 않았던가.
당시에 그 문장을 적어 놨던 종이는 언제 어떻게 없어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지만, 다시금 알아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북명신공의 비급은 지금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니까.
‘한동안 할 일도 없으니, 예전부터 궁금했던 수수깨끼나 풀어 보도록 하자.’
이런 이유로 홍진 장로에게 그 문장의 해석을 맡기게 된 것이다.
발해라는 말에 홍진 장로는 난감한 모양이었다.
“수하들에게 조사해 보라고 이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원의 옛문자도 아니고 이민족의 언어를…, 그것도 지금은 사용되지도 않는 고대문자를 연구하는 학자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묵향은 이미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고려에 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발해나 고려나 모두 다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들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같은 동이족이라고 해도 갈래가 틀립니다. 발해는 동이족 중에서도 북방계가 세운 나라고, 고려는 남방계가 세운 나랍니다.”
“어쨌든 일단 조사는 해 봐. 북방계건 남방계건 간에 그놈들 입장에서는 조상들의 언어가 아니겠나. 더군다나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옛 고구려의 뒤를 계승한다고 들었으니 어쩌면 성과가 있을지도 몰라.”
“옛, 지금 당장 고려에 수하들을 파견해서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