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전투라고는 몬스터들만을 상대해 온 도렌 영지군이기에 계책 따위는 쓸 줄 모른다고 생각하고 모두들 편히 잠들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말이다.
어떤 부대는 이곳에서 16일씩이나 야영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도 지금껏 아무런 이상이 없다 보니, 모두들 긴장이 풀려 해이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곤히 잠들었던 연대장은 새벽녘에 울려 퍼진 요란한 경보음에 잠이 깼다. 그는 미처 갑옷도 갖춰 입지 못한 채 검만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그의 천막 주변에는 이미 50여 명의 병사들이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적의 기습입니다.”
부관(副官)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저 멀리 어두운 산 쪽에서 불화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불화살들이 떨어지고 있는 지점에서는 화광이 충천했다.
“떠돌이 용병들의 구역입니다.”
체계적인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경계병을 세웠을 리 없었다. 그야말로 적들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도와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연대장은 산 쪽에서 날아오는 화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과연 일반적인 활에 비해 사거리가 반도 되지 않았다. 저런 식의 야습이라면, 그리 큰 타격을 입히기도 힘들 것이다.
그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불화살의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화살은 보이지 않기에 정확한 숫자는 계산할 수가 없었지만, 그는 적의 숫자를 한눈에 파악해 냈다. 지금까지 무수한 실전을 통해 쌓은 경험이 있었기에.
“많아 봐야 1백 명 정도다.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야.”
연대장의 시선은 화광이 충천하고 있는 떠돌이 용병 구역에 있지 않았다. 그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어둠에 잠겨 있는 주변 숲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귀관은 지금 즉시 달려가 노예병들의 상태를 점검하도록! 아무래도 그쪽이 걱정되는군.”
“옛.”
부관을 보낸 후, 연대장은 급히 전령을 불러 지시했다.
“각 대대장들에게 노예병 숙소의 경계 병력을 2배로 늘리라고 전해라. 그리고 숙소 주위로 적군이 침투해 있을지도 모르니, 정찰병들을 내보내 살펴보라고 일러라.”
“옛.”
전령들을 보낸 후에도 연대장은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적군의 지휘관이었다면, 떠돌이 용병 구역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이쪽의 노예병 숙소로 침투했을 것이다. 떠돌이 용병들을 상대로 밤새도록 살육전을 벌여 봐야 겉만 요란할 뿐 실속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노예병 숙소로 침투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투가 끝난 후 해방시켜 주겠다는 허울 좋은 약속 한마디만으로도 그들을 간단하게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렌 영지군에는 엄청난 전력의 증가를, 그리고 이쪽에는 전력의 반 이상이 감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어쩌면 그 한 방으로 이번 영지전의 승패가 정해질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때, 제1대대장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자신이 보낸 전령의 지시를 이행하고 왔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내가 보낸 전령은 만났나?”
대대장은 군례를 올리며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미 주변을 다 살펴보고 오는 길입니다.”
연대장은 의심스런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떤 의미로 그렇게 물었는지 눈치 챈 대대장은 노회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누굽니까. 적들의 기습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미 부하들을 이끌고 주변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저런 떠돌이 용병들 몇 명 죽인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효과가 있겠습니까. 뭔가 딴 속셈이 있다는 거겠지요.”
“나도 그게 걱정이었네.”
“그런데 의외로 조용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중요 길목마다 매복까지 시켜 놓고 오는 길입니다. 오늘 밤 야습당할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 염려 푹 놓으십시오.”
“수고했네.”
대대장은 아직도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는 떠돌이 용병 구역을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군요. 이렇게 후방 깊숙이까지 들어와서 야습을 할 줄이야…….”
“그만큼 저쪽이 필사적이라는 뜻이겠지. 영지 내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뺏기게 생겼는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런 식으로 기습할 바에는 아예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대대장은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결국 여기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 준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대대장의 장난스런 말투에 연대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이쪽의 약점을 파악해서 기습한 것까지는 칭찬해 줄 만해. 하지만 저런 식으로 해 가지고는 실익을 챙기기가 힘들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일 전투가 기대됩니다. 하지만 아쉽군요. 일방적으로 학살을 하면 뭐하겠습니까. 값나갈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을 텐데…….”
“크하핫! 그래, 자네 말이 옳은 듯하구먼. 하핫.”
한참 웃음을 터뜨리던 연대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말일세. 오늘 밤 있었던 야습이 우리 쪽에는 비웃음거리밖에 안 되겠지만, 영주 쪽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이로군.”
대대장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렇게 간덩이가 작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2천의 병력을 밖으로 빼낸다고 해도, 그의 수중에는 아직 1천이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영지 내 모든 거점에 방어 병력을 배치하고도 남을 텐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심리는 알 수가 없다. 괜히 불안감을 느껴 병력의 출동을 늦출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지금껏 수많은 의뢰를 수행하며 별의별 인간들을 다 겪어 본 연대장이었기에 그런 사소한 걱정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괜한 변수는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다른 용병대 지휘관들에게 전령을 보내게. 오늘 밤 있었던 일이 영주 쪽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연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