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2화 (768/930)

세상사 서로 속고 속이고

다음 날 아침, 용병들이 일제히 이동을 시작했다. 제일 앞에서 행군하는 부대는 용병들 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붉은 전갈 용병단이었고, 그 뒤를 돌핀 용병대가 뒤따랐다. 세력이 강한 순서에 따라, 길게 줄을 지어 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떠돌이 용병들의 무질서한 행렬이었다. 앞서 지나간 용병대들과 달리, 질서나 규율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만큼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몇몇 용병들은 창녀들을 잔뜩 태운 마차 옆을 걸어가면서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활기찬 모습을 보인 자들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어젯밤 늦게까지 야습해 들어온 적들과 난전을 치른 탓인지 피곤에 지친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개중에는 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자들도 보였는데, 절룩거리면서도 대열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비록 상처가 심해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사한 시체의 몸을 뒤지는 것만으로도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 호기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붉은 전갈 용병단의 맨 앞 선두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진격하고 있는 부대는 제1대대였다. 그 뒤를 6백 명 정도의 전쟁 포로들이 발에 매인 쇠사슬을 철그렁거리며 뒤따라 걷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포로 주변을 제2대대가 엄중히 포위한 채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그 어디에도 라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7독립대대는 적들의 배후를 치기 위해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몰래 주둔지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후방 침투 임무를 부여받은 제7독립대대원의 수는 겨우 136명에 불과했다. 결원도 꽤 있었지만, 곳곳으로 흩어져 있던 부대원들이 아직 메르헨 영지에 도착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지시를 내린 연대장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적의 배후를 치는 데는 그 정도 병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제5정찰대로부터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전갈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연대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든 게 그의 예상대로였다. 어젯밤 아무 실속도 없는 야습(夜襲)을 한답시고 진을 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적들은 몬스터들을 상대로 한 실전 경험은 풍부하다 해도, 사람을 상대로 한 전투에는 숙맥인 것이다.

게다가 1차전 당시에도 메르헨 영지군이 요새 지대에 도착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어젯밤에 야습을 해 온 것은 좀 의외이기는 했지만, 아마 이번 전투 역시 1차전처럼 요새에서의 공방전으로 판가름이 날 게 틀림없다고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

“부관.”

“옛, 연대장님.”

“진격 속도를 조금 더 올리라고 하게. 해가 있을 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할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관은 즉시 전령을 한 명 불러, 연대장의 명령을 제1대대장에게 전하기 위해 보냈다. 지시를 받은 전령은 1분이라도 빨리 상관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서둘렀지만, 그의 마음과는 달리 쉽사리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좁은 산길이 노예병들로 꽉꽉 막혀 있었던 탓이다.

“급한 전령이다! 비켜! 비켯! 야, 이 자식들아! 옆으로 좀 비키란 말이닷. 비키라는 소리가 안 들려?”

말이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니 노예병들은 무서워서라도 피해 주고 싶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망을 방지하기 위해 십여 명 단위로 쇠사슬을 발에 연결해 놨기 때문이다.

전령은 어쩔 수 없이 길 바깥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자 노예병들은 서로의 몸을 바짝 밀착시켜 말이 달릴 수 있도록 길가 쪽 자리를 내주었다. 노예병들의 협조로 그럭저럭 말을 달릴 수는 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나뭇가지들이 말썽이었다. 나뭇가지를 피하면서 말을 몰자니 속도가 날 턱이 없었다.

앞으로 나가려고 애쓰는 전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관은 눈길을 돌려 주변 산세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험한 산길 옆으로 수목들이 짙게 우거져 있어, 만약 기습이라도 당한다면 움치고 뛸 수도 없이 막심한 피해를 각오해야 하리라. 연대장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정찰조를 몇 개씩이나 선행시키며 앞길을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 아니겠는가.

‘멍청한 것들! 나 같으면 야습하는 데 기력을 낭비할 게 아니라, 이런 곳에서 미리 매복해 있었을 거다. 주변 환경을 봐. 얼마나 매복하기 좋아.’

* * *

저 멀리 산봉우리 쪽에서 갑작스레 뭔가가 반짝반짝하는 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모두의 안색이 환해졌다.

“대장님, 제대로 걸렸습니다.”

대장이라고 불린 중년의 사내. 언제 씻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먼지투성이에다가 머리카락은 떡이 져서 엉망이었다. 그런 더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박력이 느껴지는 매서운 얼굴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 한순간 미소가 어렸다.

그는 옆에 서 있는 마법사로 보이는 음침한 표정의 사내에게 부탁했다.

“도렌 쪽에 전갈을 보내 주십시오. 앞으로도 최소한 두 차례 이상 적 정찰병이 올 것이 예상되니, 발각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말입니다.”

대장의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인 후 수정구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때,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짙은 불쾌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우리 쪽은 신경 쓰지 말고, 그쪽이나 잘하도록 하시지요.”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급히 시선을 돌려 보니, 하급 용병들도 입지 않을 것만 같은 허름한 갑옷을 입은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대장은 알고 있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만든 솜씨마저 개판이었지만, 그 재료만큼은 최고급이라는 사실을. 질기디 질긴 몬스터 가죽을 실력도 없는 장인이 손을 댔으니, 저런 형편없는 모양새의 물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겉모양이야 어떠하든 간에, 방어력 하나만큼은 끝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름한 갑옷의 사내는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인간에 비해 수십, 아니 수백 배나 뛰어난 감각을 지닌 몬스터들을 상대로 매복전을 펼쳤던 우리들이오. 정찰병들을 수십, 아니 수백씩 보내 탐색한다 해도, 내 부하들은 절대로 찾아낼 수 없을 거요.”

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사내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말없이 산 아래쪽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지금껏 그래 왔듯, 산 아래쪽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보는 것과는 달리 저 아래쪽에는 지금 3개 대대, 총 6백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중 1개 대대는 자신의 부하들이었고, 나머지는 눈앞의 이 사내의 부하들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이야 밥 먹고 하는 짓이 이것이니 그렇다고 쳐도, 도렌 영지의 병사들이 보여 준 매복 실력은 정말 놀라웠다. 본능적으로 최대한 자연지물을 이용해 녹아들어 가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다 보면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아주 훌륭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트레친 준남작님. 하지만 이번 작전이 워낙에 중요하다 보니, 재삼 당부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트레친 준남작은 흥! 하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말했다.

“영주님께서 당신을 사령관으로 내세우신 이상, 그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없소. 하지만 불필요한 지시가 계속 반복되다 보니, 약간 짜증이 나는군요.”

“짜증이 나셨다면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서로가 잘해 보자고 하는 거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외에 더 이상 할 말은 없소?”

“준남작님 같으신 분이 지휘를 하고 계신데, 제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게 있겠습니까.”

“그럼 나는 가 보겠소.”

트레친 준남작은 뻣뻣한 자세로 군례를 올리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매복을 하고 있는 자신의 부하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준남작이 충분히 멀리 떨어진 후에야 지금까지 조용히 서 있던 마법사가 열 받는다는 듯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새끼. 이런 중요한 시점에 지휘관이라는 놈이 마법사는 어따 팽개치고 혼자 여기에 나타나.”

“핫핫, 지금껏 마법통신을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죠. 마법사님께서 이해하시죠.”

“어쨌거나 아주 기분 나쁜 놈이야.”

연신 투덜거리는 마법사를 달래며 대장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도렌 영주가 신임하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요새 지역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던 귀족이, 우리 같은 용병 나부랭이의 지시를 받아야 되는 처지가 된 게 아니겠습니까. 저 정도만 해도 아주 잘 협조해 주는 거라고 봐야겠죠.”

“어쨌거나 기분 나쁜 놈임에는 변함이 없어.”

수천이 넘는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그가 이번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6백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총 병력은 8백 명이 약간 넘었지만, 2백은 요새의 수비를 위해 남겨 놓고 와야 했던 것이다.

그런 소수의 병력으로 그가 감히 승리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은 다 도렌 영지의 병사들이 실전으로 단련된 정예병들인 덕분이었다. 도렌 영지의 병사들은 그가 이곳에 오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훈련이 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도렌 영지병을 이끌고 있는 지휘관이 왜 안 좋게 보이겠는가. 아니, 상대가 아무리 까칠하게 나온다고 해도, 좋게좋게 넘어가는 것 외에는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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