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루는 모두들 긴장한 채 오크의 습격에 대비했다. 특히, 밤이 되었을 때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오크가 야습을 좋아한다는 것은 상식이었으니까.
습격에 대한 불안감에 모두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밝아 오는 아침 해를 보며 젠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한 게 아닐까요?”
젠슨의 물음에 리치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습했는데도, 스물두 마리가 순식간에 죽어나갔으니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지.”
하나의 오크 부족이 보유한 전사의 숫자는 통상 100~150마리 수준이다. 물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전사를 보유한 부족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만한 숫자를 유지하려면 그만큼 더 많은 식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참인 데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제 의견을 말씀드리는 게 주제넘는다는 건 잘 압니다만…….”
어렵게 말을 꺼내는 라이를 바라보며 리치몬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며 짜증을 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말해 보게. 오크의 습격을 경고했던 건 자네였지 않은가. 지금 자네의 말을 무시할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다네.”
“그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나?”
“먹을 것에 대한 놈들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당나귀 네 마리가 있는 한 그놈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리치몬드는 당나귀를 힐끗 바라봤다.
“당나귀라…….”
당나귀들은 한가로운 표정으로 주위에 돋아 있는 풀을 뜯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쪽의 전력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정면 대결은 삼가겠죠. 하지만 당나귀만 죽인다고 생각한다면 그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높은 곳에서 바위를 굴려도 되고…….”
그제서야 리치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리치몬드는 젠슨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놈들의 목표가 당나귀라면, 그냥 던져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자 닉이 즉각 반대하며 나섰다.
“말도 안 됩니다. 그럼 저 많은 짐을 다 지고 가자고요?”
“하지만 오크들의 습격을 받을 위험까지 생각한다면 당나귀를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놈들이 끝까지 따라다니며 해꼬지를 해 댄다면, 당나귀는 물론이고 필경 누군가 죽거나 다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라이의 말에 젠슨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동조했다.
“전 라이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교활한 놈들인 만큼,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죠. 더군다나 우리들은 기습당하기 아주 좋은 곳만 골라서 걸어가야 하는 처지고요.”
“흠, 자네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때, 닉이 리치몬드의 말을 끊었다. 그는 지금껏 조용히 앉아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던 소피아 수녀를 향해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졌다.
“잠깐, 수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치몬드도 소피아 수녀를 무시하기는 힘들었는지, 그녀가 의견을 개진할 때까지 결론을 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생각하던 수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라이의 의견도 맞긴 합니다만, 던전에서 찾은 보물을 운반할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짐을 실을 당나귀가 없다면 기껏 개고생을 하며 보물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것을 들고 산을 내려올 수가 없게 된다.
그러자 닉이 재빨리 그 의견에 동조했다. 당나귀를 없앴을 때 그 많은 짐들을 자신이 직접 지고 가야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라이가 잘난 척하며 나서는 것도 기분이 나빴기에 이렇게 심통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수녀님의 말씀이 바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라니까요.”
“흠, 소피아 수녀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나귀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하지요.”
순간 라이는 리치몬드의 리더로서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당나귀 몇 마리 때문에 오크 부족과의 충돌을 감수하려 하다니. 그것도 절대적으로 오크에게 유리한 산악 지대를 통과하면서…….
어제 있었던 오크들의 기습은 이쪽에서 대처를 조금만 잘못 했어도 몰살당했을 게 확실했을 정도였지 않던가. 30마리 내외의 오크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이 정도였는데, 부족 전체가 덤비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겠는가.
‘젠장, 파티를 잘못 골랐어. 저렇게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사람이 리더라니. 몇 사람 죽어 나가야 정신을 차리려나? 우리 소대장이었다면 당나귀 따위는 부담 없이 버렸을 텐데……. 그리고 저 닉이라는 놈은 이번에 보니까 실력도 별 볼일 없던데, 왜 파티원으로 받아들인 거지?’
머릿속은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라이는 입을 꾹 다물고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는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젠장, 용병단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어째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조신하게 붙어 있을 걸.’
라이 일행은 없는 길을 개척하며 이동하고 있는 게 아니라, 길을 따라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을 따라 전진할 것이다. 오크들도 그걸 잘 알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놈들은 이 일대 지리를 자기 손바닥 들여다보듯 빤히 알고 있을 테니, 기습하기에 가장 좋은 곳에서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크가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는 만큼, 모두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다. 물론 대부분은 건성건성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고, 제대로 주위를 살피고 있는 건 젠슨과 라이 단 둘 뿐이었다. 그 두 사람만이 오크를 찾아낼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산길을 타고 가다 보면 바람 방향이 자주 바뀐다. 오크 뱃속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던 라이였기에, 바람 방향이 바뀔 때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확인했다. 오크족에 대한 대비를 후각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라이로서는 바람이 뒤쪽에서 불어오는 게 제일 싫었다. 앞쪽에 오크가 매복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다시 모퉁이를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라이는 급히 리치몬드를 불러 세웠다.
“리치몬드 씨, 잠깐만요.”
“무슨 일인데 그러나?”
“저쪽에 오크가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라이가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저 앞 급경사 위쪽이었다. 산을 한 바퀴 돌면서 이쪽으로 왔기에, 저 위쪽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하지도 못한 상태다. 더군다나 바람은 등 뒤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제아무리 후각이 좋다고 해도, 앞에 숨어 있는 오크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리치몬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의 감이 좋은 건 이미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게 단언하는 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구먼. 바람 방향으로 봐서 저쪽의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까지 저런 지형을 만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도 저 위에 오크가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다니. 무슨 근거라도 있나?”
라이는 자신 있게 말했다.
“이쪽으로 돌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예. 방금 전에 리치몬드 씨가 말씀하셨듯 저런 지형을 꽤 많이 만났었죠. 하지만 그때는 다 바람이 이쪽으로 불어 줬었습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부는 상태에서 저런 지형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라이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젠슨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줬기에 라이는 힘을 내서 덧붙였다.
“오크는 후각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리고 오크들이 사냥하는 대부분의 동물들도 후각이 뛰어난 편이죠. 제가 만약 오크라면 저 위쪽에서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완벽한 기습이 가능하니까요.”
라이는 리치몬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했다.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곧장 앞으로 나갈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 위쪽으로 누군가 정찰을 보내 확인해 볼 것인가…….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세 번째일 것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위쪽으로 헐떡거리며 올라간 사람을 오크가 가만히 놔두겠느냐 하는 것이다. 필히 죽임을 당할 게 뻔한데,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사지(死地)로 보내겠는가.
‘젠장.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만만한 게 나니까, 나보고 올라가라고 하겠지? 저 위쪽에 오크가 있다고 말을 꺼낸 것도 나니까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조용히 있을 걸 그랬나…….’
심각한 표정으로 살길을 궁리하고 있는 라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치몬드는 급경사 위쪽을 살펴보고 서 있었다.
“적게 잡아도 백 마리쯤은 있다고 봐야 하겠지? 나 혼자서는 조금 벅차겠군.”
리치몬드는 젠슨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도와줘야겠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둘의 대화를 듣고 라이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 자신이 저 위에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의견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리치몬드의 리더로서의 자질에 대해 더욱 불신감만 느끼게 만들었을 뿐이다.
라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급히 물었다.
“설마 둘이서 저 위로 올라가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일세.”
“만약 제 추측이 옳다면, 두 분은 살아서 내려오기 힘들다구요.”
“자네가 그런 걱정까지 해 줄 필요는 없다네.”
단호하게 말을 끊은 리치몬드는 고개를 돌려 수녀를 향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에게 축복을 부탁드립니다, 소피아 수녀님. 속도 증가와 근력 증가가 좋겠군요.”
“그렇게 되면 한동안은 치료마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소피아 수녀님. 오크들의 숫자가 많은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저 위에 오크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거지요.”
라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속도 증가? 근력 증가? 그게 뭐지? 사제는 상처 치료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지금껏 라이가 봐 왔던 사제들 중에서 상처 치료 외에 다른 마법을 구사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발생한 무지였다. 라이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소피아 수녀가 신성마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춤과도 같은 부드러운 율동. 그리고 그에 맞춰 입으로는 특이한 음률의 노래를 나직이 부른다. 곧이어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현실이 아닌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느껴졌다.
라이가 홀린 듯 바라보는 가운데, 언제 주문이 끝났는지 수녀의 행동이 멈췄다. 그 순간, 리치몬드와 젠슨의 몸에서 뭔가 희뿌연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빛이 사그라졌다.
“휴우, 다 끝났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소피아 수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듯하더니, 다음 순간 그 둘의 신형은 엄청난 속도로 산 위를 향해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놀라운 속도였다. 일행 중에서 가장 중무장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라이가 맨몸으로 올라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파른 산길을 달려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라이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저런 게 실제로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잠시 후, 충격에서 깨어난 라이는 소피아 수녀를 향해 황급히 물었다.
“수, 수녀님. 방금 전에 본 게 꿈은 아니겠죠?”
호들갑스런 라이의 반응에 수녀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그리 대단한 마법도 아니야.”
“대단한 마법이 아니라뇨. 저 둘이 산 위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시고도……. 참,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만든 건 수녀님이었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런 게 마법으로 가능하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일반인들이 마법사나 신관을 볼 일이 거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세월이 흘러 네가 좀 더 경험을 쌓게 되면 알게 될 거야. 나 정도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것을 말이야.”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데요.”
소피아 수녀는 생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야. 각 종단의 대신관님들의 능력을 언제 볼 기회가 생긴다면, 나랑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소피아 수녀의 말에 라이는 과거를 떠올리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까……?”
라이가 기억하는 대신관의 능력은 그리 대단할 게 없었다. 무슨 정신계 마법을 쓴답시고 하다가 안 되자 허둥거리던 모습, 그러다가 갑자기 불을 뿜어 화상을 입히지를 않나, 곧이어 난처한 얼굴로 치료해 주지를 않나…….
대신관이라면 뭔가 대단한 권세와 위엄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함에도, 그가 기억하는 대신관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당황하고, 허둥대는 그런 초보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때, 테귤러가 해 줬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