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관께서 행한 것은 너의 육체적 능력을 좀 더 활성화시키기 위한 비법이다.」
그날 이후, 자신의 몸이 조금씩 달라진 게 사실이지 않은가. 웬만해서는 지치지도 않았고, 아무리 고된 일을 해도 다음 날 일어나면 온몸이 상쾌했다.
‘그러고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셨을지도……?’
신성마법이라는 것에 대해 소피아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닉이 소피아 수녀에게 말을 걸기 전까지.
“이제 끝난 모양입니다. 가시죠, 수녀님.”
그제야 라이는 산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젠슨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손짓으로 이동해도 좋다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다.
나귀를 이끌고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저 높은 비탈에서부터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리치몬드와 젠슨이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으로 봐서 다행히도 부상을 당한 사람은 없는 듯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서로 간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라이는 그 둘이 벌인 엄청난 격전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은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합류하자마자 리치몬드는 활짝 웃으며 라이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자네 공이 커. 놈들이 이 위쪽에 매복하고 있다는 걸 자네가 눈치채지 못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네.”
“오크가 꽤 많았었던 모양이죠?”
닉의 물음에 젠슨이 대답해 줬다.
“100여 마리는 족히 되었던 것 같아. 그중 70여 마리쯤 죽였더니, 나머지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 버렸지. 아마 두 번 다시 우리를 노리고 공격해 오지는 못할 거야.”
젠슨의 말에 라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둘이서 오크를 70여 마리나 죽였다는 겁니까? 그게 대체 가능한 건가요?”
며칠 전에 오크 떼의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 이들의 실력을 살짝 구경할 수 있었다. 리치몬드나 젠슨의 실력이 꽤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오크를 무자비하게 학살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파티 전체가 오크 30여 마리 때문에 하마터면 전멸당할 뻔했었으니까.
그런데 겨우 둘이서 산 위로 달려 올라가 오크 100여 마리와 싸워 그중 70여 마리를 죽여 없앴다니. 저게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라면, 신성마법 덕분일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
‘우와, 신성마법이라는 게 이렇게나 대단한 것일 줄이야. 세상에! 이래서 옛날 영웅담에 나오던 용사 파티에 사제가 빠지지를 않았던 거였구나. 나는 그거 다 재미있자고 써 놓은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젠슨은 외갑과 투구, 방패를 벗어 당나귀 등에 실으며 연신 투덜거렸다.
“에휴~, 어디 씻을 데 없나? 피가 말라붙으면 씻어 내기 힘든데…….”
그러자 리치몬드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말게. 반나절쯤 더 가면 냇물이 나올 거야.”
“망할 오크 놈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꼭 시비를 걸어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에휴, 그나저나 이거 온몸이 온통 피로 끈적거려서 기분 더럽네.”
배신, 그리고 도주
오크족과의 전투 이후, 그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3일을 더 간 후에야 그들은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에 동굴이 보이지? 저곳이 바로 던전 입구일세.”
리치몬드의 손가락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랗게 뚫려 있는 동굴이 보였다. 동굴 입구 크기만 해도 엄청나게 커서, 안에 굉장한 던전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동굴 입구를 바라보던 라이는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들과 만나 모험을 떠난 이래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어렸을 때의 꿈을 이루게 될 줄이야. 더군다나 던전은 그런 꿈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악당 보스가 숨어 있는 곳이 바로 던전이었으니까.
해가 지려면 아직 반나절 정도의 여유가 있었지만, 리치몬드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며 준비를 단단히 한 다음, 동굴에는 내일 아침 들어가기로 하세.”
리치몬드의 제안에 모두들 찬성했다. 일주일간의 강행군으로 인해 모두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쉴 곳을 찾아 지친 몸을 눕히기 바쁜데, 리치몬드는 젠슨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쉬려고 하는데 이런 말 꺼내기는 좀 미안하네만, 자네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 슬쩍 살펴보고 오게. 잠자다가 동굴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몬스터에게 습격당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으니 말일세.”
“핫핫, 그러지요, 뭐. 얼른 둘러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떠난 지 삼십 분쯤 지난 후, 젠슨이 돌아왔다.
“생각 외로 발자국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법 깊은 곳까지 들어가 봤는데, 안쪽은 석회동굴이더군요. 워낙에 습기가 많은 곳이라 동굴에 자리잡은 동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리고 습기가 많다는 점도 꽤 마음에 들어.”
그 말에 젠슨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축축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뭘 모르는군. 우리들은 지금 던전을 발굴하러 온 걸세. 정밀한 기계장치는 습기에 매우 취약하지. 그만큼 함정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건데, 내가 싫어할 리가 없지 않겠나.”
“그건 그렇군요. 자, 오늘은 모두들 배불리 먹고 푹 쉽시다. 내일은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다음 날, 일행은 10시쯤 되어서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공기가 서늘하면서도 축축하게 느껴졌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 석회석 동굴 특유의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횃불의 밝은 불빛을 받고 반짝이는 석순들. 흔히 보기 힘든 석순의 아름다운 모습에 소피아 수녀는 눈을 떼지 못했다.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바닥의 물기가 점점 더 많아지더니, 급기야는 발목이 잠길 정도의 깊이가 되었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원해 보이는 물의 유혹에 라이는 잠시 투구를 벗고 물을 떠 마셨다. 정말 가슴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질 정도로 맑고 깨끗한 물맛이었다.
그런 라이를 못마땅하다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닉이 도저히 참기 힘들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리치몬드 씨가 허락한 것도 아닌데, 투구를 네 멋대로 벗으면 어떻게 해? 빨리 다시 써.”
오크와의 전투 이후, 닉은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아 라이를 질책하곤 했다. 속이 뒤틀렸지만 라이는 애써 참았다. 어쨌거나 자기는 이 파티에서 신참이었으니까.
‘젠장. 그래 너 잘났다, 새꺄.’
어딘가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큰 만큼, 모두들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며 이동했다. 하지만 아무리 동굴 깊숙이 들어가도 함정 같은 건 나타나지 않다 보니 모두의 조심성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뭔가 시커먼 음영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듯하더니 캉! 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모…, 모르겠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저를 때렸는데…….”
직접 공격을 당한 젠슨조차도 상대가 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모두들 당황하여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이때, 또다시 뭔가가 젠슨을 향해 번개처럼 돌진해 왔다. 이번에는 미리 대비를 하고 있다 보니 적의 움직임을 조금은 파악해 낼 수가 있었다.
놈은 천장의 석주 뒤쪽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불시에 튀어나온 것이다. 석회동굴 안은 꽤나 넓었지만, 어둡고 시야가 좋지 못하다 보니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엇!”
간신히 방패로 적의 공격을 막아 낸 젠슨은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키이익!”
괴성을 지른 것으로 봐서 베인 것 같았지만, 미지의 적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망연한 표정으로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는 젠슨을 향해 리치몬드가 물었다.
“그게 뭐던가?”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제 짐작으로는 놀(Gnoll) 같습니다.”
“놀이라고?”
리치몬드는 다급한 어조로 동료들에게 경고했다.
“그게 정말 놀이라면 큰일이군. 모두들 조심하게. 놀은 독이 있는 몬스터니까 말이야. 만약 작은 상처라도 입게 되면, 곧바로 소피아 수녀님께 치료를 받도록 하게. 알겠나?”
바짝 긴장한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놀이라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얘기는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늑대와 원숭이를 합쳐 놓은 듯한 생김새의 몬스터라고 했다. 독을 제외하면 그리 대단한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놀을 두려워 하는 것은 그 엄청난 숫자 때문이었다. 군집생활을 하는 놀의 습성상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면 그 뒤로 수백 마리는 보통이고, 많게는 천 단위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많이 있다고 봐야 했다.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닉이 두려움 섞인 어조로 말했지만, 리치몬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온갖 개고생을 다 했는데,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이대로 허무하게 포기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천천히 앞으로 전진한다.”
결정을 내린 리치몬드는 각자에게 임무를 배당했다.
“라이, 자네는 후미에서 따라오면서 당나귀들을 보호하게.”
“예.”
“닉, 놈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가급적 화살을 아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