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기억
공간이동 마법 목적지 좌표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바로 연못이나 강물 위쪽이다. 좌표 아래가 물이기에 떨어져도 안전할뿐더러, 물 위에 구조물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속으로 공간이동 마법을 쓸 경우에는 아주 위험했다. 공간 이동할 좌표에 나뭇가지와 같은 이물질이 끼어 있었다가는 곧바로 비명횡사를 당할 수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해밀턴 팀은, 뒤따라올 본대가 안전하게 공간 이동할 수 있도록 지상 20여 미터 위치의 좌표를 불러줬었다.
“도착 좌표 위치가 상공 20여 미터 정도라고 한다. 바로 밑에 나무가 있을 수도 있으니 착지할 때 모두들 주의하도록!”
공간이동이 끝나자마자 대원들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최대한 장비와 짐의 무게를 줄였다고는 하지만, 척살대원 개개인이 지닌 짐의 무게만 해도 거의 20킬로그램에 육박했다.
더군다나 전사(戰士)들의 경우 빠른 추격을 위해 가벼운 가죽갑옷을 착용했는데도, 무기까지 합하면 그 또한 20여 킬로그램에 육박했다. 합계 40여 킬로그램. 이런 상태로 상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니 자칫 실수라도 했다가는 곧바로 피떡이 될 터였다. 대원들은 떨어져 내리면서 지면을 빠르게 훑으며 차분하게 나뭇가지를 밟아 낙하 충격을 줄여나갔다.
공간이동을 하자마자 비행마법을 사용한 마법사가 우아한 모습으로 땅바닥에 착지했을 때, 이미 다른 대원들은 모두 착지를 끝낸 상태였다. 상당한 실력자들만 뽑아온 만큼, 앤트러스는 착지 때 혹 부상이라도 입은 대원은 없는지를 묻지 않았다.
“모두들 흩어져서 해밀턴이 남긴 흔적을 찾아보게.”
대원들이 흔적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자 마법사가 앤트러스에게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깐…,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마법사는 손가락으로 산맥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착지하기 전에 저쪽으로 와이번이 날아가는 걸 봤습니다.”
대원들은 숲 위쪽으로 공간이동을 하자마자, 곧바로 아래로 떨어졌다. 안전하게 착지를 하기 위해 발밑 쪽으로 최대한 신경을 집중시켰기에 주변을 살필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마법사의 경우 비행마법으로 낙하속도를 줄일 수 있는 만큼,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내려오면서 봤다네. 순찰을 돌고 있는 거겠지.”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찜찜해서 말이죠. 작전 지역으로 투입되기 전에 이곳 분견대에서 공간이동 마법진의 사용을 불허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법진이 수리 중이라면서 말입니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와이번을 보고 나니 왠지 마음에 걸려서요.”
앤트러스는 마법사의 말에 공감했는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 역시 지금껏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때로는 이성보다 한순간 번뜩이는 육감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은 결코 반복되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원로원 쪽에서 이번 일을 눈치챘을 가능성은 없었다.
“일단은 좀 더 상황을 두고 보기로 하세. 물론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이때 숲 속으로 흩어진 대원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흔적을 찾았습니다!”
앤트러스가 이끄는 특무대는 킬러 2개 팀(해밀턴 팀, 브레이 팀), 마법사 2명, 신관 1명으로 이뤄진 급조된 조직이다. 선발대로 투입된 해밀턴 팀과 마법사 1명과의 연락이 갑자기 끊긴 게 좀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증원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곧바로 해밀턴 팀의 흔적을 쫓아갔다. 설혹 해밀턴 팀에 뭔가 변고가 생겼다 해도, 지금 있는 인원만으로도 배신자들을 처리하기에는 차고도 넘칠 정도의 전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추적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해밀턴 팀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의문을 떠올려야만 했다. 추적을 따돌리기 위함이라는 건 이해해도, 길도 없는 험지를 억지로 뚫고 나간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배신자들 중에는 레인저도 한 명 있었다. 감찰부 소속 레인저들은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다. 산속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맨몸뚱이로 떨어트려 놓아도 순식간에 적응하고 길을 찾는다.
단 한 줌의 흔적만으로도 적을 추격하고 격살하기 위해 특화된 직종이 레인저였고, 배신자들 중 한 명 역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런 임무를 수행하며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우리가 뒤를 쫓는다는 걸 눈치라도 챈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설픈 방식의 도주 방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흠, 공포에 질리면 그럴 수도. 배신자의 말로가 어떻다는 건 그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야. 어쨌든 이렇게 헤매고 있다면 멀리 가지는 못했겠군. 그런데 왜 해밀턴은 통신에 응답하지를 않는 거지?”
“혹시 매복공격이라도 받은 게 아닐까요?”
해밀턴 팀의 숫자가 겨우 셋밖에 되지 않다 보니 이런 우려를 표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의문을 던진 대원의 말에 앤트러스는 마법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닐 걸세. 마법사의 이목을 숨기고 매복할 수 있는 건 오직 마법사뿐이니까.”
겨우 마법사 한 명이지만 그가 있음으로 인해 발휘할 수 있는 전력 차이는 엄청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락이 되지를 않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전방에서 흔적을 따라가던 레인저가 황급히 한 손을 올려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뒤를 따르던 대원들은 모두 황급히 자세를 낮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매복한 적이라도 있나 싶어서.
레인저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오크 소굴입니다!”
레인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작은 동굴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굴 앞쪽으로는 한눈에 봐도 꽤나 많은 오크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갔나?”
앤트러스의 물음에 레인저는 가소롭다는 듯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아마 그렇게 보이기 위해 꽤나 애를 쓴 것 같지만, 그런 얄팍한 수법에 제가 속을 리가 있겠습니까.”
레인저는 숲 한쪽을 아무런 망설임조차 없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녀석들은 저쪽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럼 오크들이 눈치채서 귀찮게 하기 전에 이곳을 빨리 벗어나자.”
숲을 가로질러 나 있는 수많은 발자국들. 그중에는 배신자들의 것도 있었고, 해밀턴 팀의 발자국도 있었다. 물론 가장 많이 찍혀 있는 것은 오크들의 발자국들. 무수한 오크들의 발자국에 가려 사람의 발자국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베테랑 레인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녀석들이 오크 굴속으로 들어간 줄 알고 따라 들어갔으리라.
발자국들을 이리저리 가리키며 레인저는 자신의 추론을 앤트러스에게 보고했다.
“약 20여 마리 정도의 오크들이 배신자들을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해밀턴 팀이 그 뒤를 쫓아갔고요.”
오크라는 변수가 등장하긴 했지만, 그 누구도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겨우 오크 20여 마리 정도로는 해밀턴 팀은 물론이고, 배신자들의 발걸음조차 막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발자국들을 따라간 지 대략 30여 분쯤 되었을까? 갑자기 격전이 벌어진 흔적이 나타났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오크들의 발자국과 검붉은 핏자국들.
“여기서 오크들과 싸운 것 같습니다.”
“마법의 흔적입니다.”
“여기에 검이 떨어져 있습니다.”
대원들은 빠르게 주위를 살펴보며 흔적들을 찾아서 보고했다. 그런데 오크들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검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게 정말 이상했다. 자체적으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오크들이었기에 날붙이면 아무리 낡아빠진 거라도 무조건 주워 자신들의 무기로 썼으니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벌어진 격전에서 승리한 것은 오크가 아니라 사람들이란 소리다.
이때, 대원들 중 하나가 시커멓게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가죽갑옷을 하나 찾아냈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 부서진 굵은 뼛조각도 함께 발견되었다. 온전한 형태라면 한눈에 알아봤겠지만, 너무 조각조각 부서져 있다 보니 한참을 살펴본 후에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오크 뼈가 아니라 아무래도 사람 뼈인 거 같은데요?”
다시 그 주위를 샅샅이 수색을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원들은 갈기갈기 찢긴 옷 몇 가지와 무기, 그리고 다수의 뼛조각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옷가지 중 하나는 마법사용 로브였기에 이 뼛조각들은 배신자들의 뒤를 쫓던 해밀턴 팀의 흔적임이 분명했다.
마법사는 대원들이 찾아온 무기들과 뼛조각들을 바라보며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불신의 빛을 그대로 드러냈다. 군집생활을 하는 오크는 사냥한 동물을 소굴로 가져가서 무리들과 함께 나눠 먹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 뼈가 있다는 것은, 사냥 후 곧바로 잡아먹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해밀턴 팀이 입고 있던 갑옷과 무기들이 그냥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다 썩어가는 장비조차도 탐욕스럽게 챙겨가서 사용하는 게 오크들인데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원들을 혼란스럽게 했던 건 따로 있었다. 설혹 기습을 당했다고 해도 감찰부의 정예 암살 팀이 오크 따위에게 전멸을 당했다니. 더군다나 마법사까지 동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카렙, 오크와 비슷한 발자국 모양을 지닌 몬스터는 어떤 게 있지?”
앤트러스의 질문에 레인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바로 대답했다.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일반적인 오크의 발자국에 비해 좀 크긴 해도 이 발자국의 형태는 오크의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었던 것이었지만 단호한 레인저의 대답에 앤트러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해밀턴 팀의 장비와 무기를 쳐다봤다. 예상을 벗어난 의외의 상황이 연속으로 이어지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뭔가 고심하던 마법사가 급히 앤트러스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쇼. 어떻게 된 건지 제가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마법사는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에서 쏟아져 나온 건 대량의 숯가루였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면서 숯가루를 솔솔 뿌리자, 그 가루가 이리저리 움직이다 뭉치며 거대한 마법진의 형상이 만들어져 갔다.
뭔가 굉장한 마법이라도 되는 듯 한참 동안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 주문이 완성되자마자 마법사를 중심으로 거의 10여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며 희뿌연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마법이 발현되자, 무척 힘들었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마법사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