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0화 (826/930)

“자, 모두 이쪽으로 모이게. 곧 마법진 위로 이곳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영상이 떠오를 거야. 잘 봐둬.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니까.”

기회가 단 한 번뿐이라는 말에 앤트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지의 기억은 몇 번이라도 읽을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나?”

앤트러스의 지적에 마법사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단지 제 실력이 모자라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무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쯧, 그렇게 자책할 필요 없네. 자네는 지금 충분히 제 몫을 해내고 있으니까 말이야. 자, 어서 영상을 띄우게나.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고!”

“리멤버런스 오브 더 어스(Remembrance Of The Earth; 대지의 기억)!”

마법사가 시동어를 외치자마자 마법진의 중앙에 커다란 원반 형태의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그 안에 세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영상의 화질이 너무 엉망이라 세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들은 분명 해밀턴 팀이었다.

대원들에게 있어서 화질이 나쁜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해밀턴 팀이 이곳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죽었는지만 알 수 있어도 충분했으니까. 문제는 워낙 단편적으로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기 힘들 만큼 뒤죽박죽 떠오르는 짧은 영상들에 있었다. 이런 난잡한 영상만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사방에서 덮쳐 들어오던 시커먼 그림자들이 폭발적인 화염에 휩싸이더니 뒤로 튕겨져나가는 영상이 하나 떠올랐다. 마법사가 오크들을 향해 제대로 한 방 날린 모양이다. 커다란 원반을 가득 메울 정도의 엄청난 화염이었다. 만약 오크가 밀집해 있는 곳에 이 마법이 떨어졌다면, 그 한 방만으로도 승패를 결정지을 치명타가 되었을 것이다.

영상만 봐도 해밀턴 팀이 오크들의 매복에 걸려 손도 못 써보고 당한 것은 아닌 듯했다. 더군다나 오크로 짐작되는 시커먼 그림자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영상 속에 비친 시커먼 그림자는 잘해 봐야 10여 마리 정도였으니 말이다.

“쯧, 저렇게 잘 싸웠는데도 해밀턴 팀이 전멸했다는 게 말이 되나?”

앤트러스의 혀를 차는 소리에 마법사 지크펠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저도 도저히 이해가…….”

이때, 그들의 눈에 상상하기조차 힘든 영상이 하나 보였다. 마법사 뒤쪽에 널브러져 있던 시커먼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저거 분명 마법을 맞고 죽었던 놈 아니었나?”

“그…, 글쎄요……?”

마법사 뒤쪽에서 일어나는 시커먼 그림자. 그건 얼마 전 영상에서 마법에 직격당해 쓰러진 놈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짜던 지크펠은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화질이 워낙에 엉망이었기에 확신에 찬 대답을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저도 뭐라 답변을 드리기가…….”

“이건 뭐 트롤도 아니고, 어떻게 오크가 저럴 수가 있는 거지? 혹시 마법 실력이 모자라면 영상조차 엉망으로 떠오르는 거 아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지크펠이 발끈해서 대꾸했다.

“제 실력이 모자랐다면 아예 대지의 기억 마법이 발현조차 되지 않았겠죠. 하지만 떠올랐다면 그건 제대로 마법이 발현된 겁니다. 뭐, 제 실력이 좀 허접하다 보니 있는 그대로 영상을 띄울 수밖에 없지만 능력 있는 대마법사쯤 되면 대지의 기억 마법에 왜곡된 정보를 섞어 발현시킬 수도 있겠지요.”

지크펠의 반발에 앤트러스는 굉장히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빌어먹을, 그럼 결론은 오크들에 의해 해밀턴 팀이 전멸 당했다는 말인데. 이걸 상부에 보고해 봐야 믿어 줄 것 같지도 않고 말일세.”

“어쨌든 분명한 건 오크들에 의해 해밀턴 팀이 전멸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이를 갈며 이런 소리를 내뱉은 건 마법사인 지크펠이었다. 그 말에 앤트러스의 뒤에 서 있던 신관 역시 살기 어린 목소리로 찬성하고 나섰다.

“맞습니다. 저 망할 것들의 씨를 말려 놔야 합니다.”

앤트러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복수를 외치는 신관과 마법사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감찰부와 킬러 조직은 물과 기름처럼 완전히 별개의 존재였다. 특히 인성(人性)이라는 부분에서는……. 앤트러스는 문득 자신들과 같은 감찰부 특무대원들에게 동료로서의 정이 있기는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동료의 목숨까지도 주저 없이 날려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감찰부의 킬러 조직이었으니까.

앤트러스의 시선이 이번엔 암살 팀장인 브레이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브레이는 앤트러스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듯 곧바로 신관과 마법사를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내팽개치고 동료들의 복수를 하러 가자, 이 말인가?”

브레이의 말에 지크펠은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 그도 아는 것이다.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는 절대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그게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배신자들 역시 이놈의 오크들에게 잡아먹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지크펠의 말에 다른 대원들 역시 공감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까지 끼어 있는 해밀턴 팀이 전멸할 정도라면 배신자들 역시 오크들에게 죽었다고 보는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앤트러스의 시선이 이번에는 레인저인 카렙에게로 향했다. 숲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문가인 그에게 묻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카렙, 자네는 오크 떼가 배신자들을 쫓아가는 중이라고 했어.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대장님.”

“이곳에서 해밀턴 팀을 전멸시킨 것도 바로 그 오크들이고. 맞지?”

“예. 흔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크들이 배신자들을 처치하고 되돌아오는 길이었겠나? 아니면 추적을 포기하고 되돌아오는 길이었겠나?”

자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특무대원 전체의 향방이 정해질 것 같기에 카렙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좀 이해하기 힘든 행동 몇 가지가 있긴 합니다만, 발자국과 흔적들은 오크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영상 속의 그것들이 흐릿하기는 해도 아무리 봐도 오크들이었습니다. 뭐, 평범한 오크들보다는 덩치가 약간 큰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앤트러스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자 카렙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알기로는 오크는 한 번 정한 사냥감을 그리 쉽게 포기하는 몬스터가 아닙니다. 분명 배반자들을 먹어 치웠거나, 아니면 붙잡아 되돌아오는 길이었을 테죠. 해밀턴 팀도 당했을 정도의 오크들인데, 배반자 둘쯤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렇다면 이 오크들을 뒤쫓아 가 봐야겠군.”

앤트러스의 결정에 지크펠이 곧바로 찬성하며 나섰다.

“그게 좋겠습니다. 오크 소굴을 뒤져 보면 혹시 배신자들이 사용했던 물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앤트러스가 오크 소굴을 먼저 토벌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일단 가까웠기 때문이다. 카렙은 배신자들과의 거리가 최소한 사흘 이상 벌어져 있다고 했었다. 전속력으로 쫓아가도 따라 잡으려면 3~4일은 걸린다는 얘기다.

만약 뒤쫓아 갔는데 오크들에게 잡아먹힌 것이 맞다면 배신자들의 죽음을 확인시켜 줄 만한 증거품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오크 동굴부터 뒤지는 게 훨씬 효율적인 것은 당연한 사실. 만약 그자들이 죽었다는 증거를 동굴에서 찾아내지 못하면 그때 다시 추적을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원로원파가 개입되어 일이 복잡하게 흐르기 전에 최대한 빨리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크펠.”

“옛.”

“본부에 연락부터 넣어라. 현 상황을 설명한 뒤 배신자들의 유품을 찾기 위해 오크 소굴을 토벌할 거라고 말이야.”

지크펠은 앤트러스의 명령에 살짝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언했다.

“본부에 알리지 않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배신자들을 추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사로운 복수나 한답시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오해를 살 우려가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크는 그리 대단한 몬스터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방금 전에 지크펠이 보여줬던 영상이 아니었다면 그 또한 해밀턴 팀이 오크 따위에게 당했다는 것을 절대 믿지 않았으리라.

“그건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만에 하나 오크 소굴에 놈들의 유품이 없다면 아주 곤란해지겠지. 그럼 빨리 움직이도록 하자. 오크 소탕을 해지기 전에 끝내려면 서둘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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