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5화 (861/930)

지붕 위의 라이

뚜각, 뚜각, 뚜각…….

둔중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무게에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대는 계단과 복도. 오래된 목조건물만이 지니고 있는 장점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넷…, 아니 열 명쯤 되겠네. 둔중한 소리 속에 작은 울림들이 숨어있어. 패거리를 모아서 본격적으로 복수전을 해보겠다는 건가?’

예전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당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혹시나 싶어 가죽갑옷까지 입은 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놈들이었다. 생긴 것만큼이나 뒤끝이 강한 놈들이니 말이다.

라이는 벽에 걸어놨던 검대(劍帶)를 벗기려다 멈칫했다. 롱 소드는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싸우는 데는 그리 좋은 무기가 아니다. 그리고 수많은 목격자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살인을 하게 되면 대처하기 힘들어진다.

라이는 롱 소드 대신 침대 옆에 세워놓은 피에 젖은 짤막한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이미 한 번 써봤지만, 미친개들 때려잡는 데는 이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쾅쾅쾅!!

“문 열어! 문!”

문짝이 부서져라 쾅쾅 두들기는 소리. 이건 좀 의외였다. 무작정 문을 때려 부수고 들어올 거라 생각했었는데…….

한 손에 몽둥이를 든 채 피식 웃으며 문을 열어주는 라이. 여유 넘치던 라이의 얼굴이 문밖에 서 있는 사내들을 본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내 넷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의 형태 때문이었다.

광을 내 번쩍거리는 투구, 사슬 갑옷 위에 입은 푸른색 서코트(Surcoat : 소매 없는,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얇은 옷. 갑옷에 직접 문장을 그려 넣기 어려운 경우에 애용된다)에는 늑대를 형상화한 것 같은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영지군 병사임이 틀림없었다.

‘병사가 왜?’

선두에 선 병사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네가 저 사람들을 아무 이유 없이 폭행한…….”

여기까지 말하던 병사의 눈이 라이가 쥐고 있는 피 묻은 몽둥이로 향했다. 병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증거물까지 있으니 저들의 말이 틀림없군. 자, 순순히 포박당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지금까지 위협과 협박으로 아래층 손님들을 괴롭히던 놈들이 설마 병사들을 끌어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는데…, 정말 마지막까지 치졸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놈들에 대한 복수는 나중 문제였다. 지금 당장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자리를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저런 중무장한 병사가 상대라면 이런 몽둥이 따위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설혹 상대를 할 수 있다고 해도 병사들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라이는 몽둥이를 던져 버린 뒤 재빨리 벽 쪽으로 달려가 걸려있던 검대를 벗겨 들었다. 그 순간, 뒤쪽에서 병사들의 경고성이 들려왔다.

“네놈! 감히 저항할 생각이냐?”

물론, 저항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라이는 무기를 손에 쥐자마자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좁은 방이었기에 세 발자국도 채 가지 않아 창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라이는 생각할 것도 없이 창문으로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빠져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창문이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병사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어어 거리기만 했다. 저렇게 좁은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3층. 자칫 머리부터 떨어지면 즉사를 면키 힘들 것이고, 갖은 재주를 부려 한 바퀴 회전에 성공하여 다리부터 착지한다고 해도 다리뼈가 부러질 가능성이 컸다.

‘자살할 생각인가?’

병사들이 후다닥 창문 쪽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창문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창 아래로 떨어진 놈이, 어떻게 착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꽁지가 빠지게 내달려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병사들은 더 이상 추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다급한 김에 단 하나의 탈출로인 창문 쪽으로 돌진, 손을 앞으로 쭉 뻗어 좁은 창틀 속으로 머리부터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달려 들어간 속도가 있었기에 다행히 중간에 걸리지 않고 다리까지 모두 다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긴 했다. 하지만…….

‘으아악!!’

머릿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순식간에 지면이 그의 눈앞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생과 사의 갈림길인 그 찰나의 순간, 라이의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것은 검술의 한 초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살려줬다. 너무나도 쉽게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고, 착지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패닉에 빠질 뻔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을 정도로 쉽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지?’

하지만 조금 전의 일을 회상하며 생각에 잠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뛰어내렸던 창문 밖으로 병사들의 얼굴이 튀어나오는 것을 봤던 것이다. 라이는 재빨리 달려 행인들 속으로 몸을 감춰 버렸다.

지금 라이의 머릿속에는 치졸한 놈들에 대한 복수도, 여관에 놔두고 온 릴리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오로지 방금 전에 자신이 행한, 믿겨지지 않는 몸놀림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이런 것도 가능했다니…….”

검술에 포함되어 있는 보법(步法)을 조금만 응용해도 놀라운 몸동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라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경공술은 장거리를 달리기 위해 발달된 기술이다. 내공을 이용하여 최대한 몸무게를 가볍게 하는 한편, 근력을 증가시켜 놀라운 속도로 달릴 수 있게 한다.

그 때문에 경공술의 최고봉으로 초상비(草上飛)가 꼽힌다. 하늘거리는 풀을 밟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을 가볍게 하는 경신술(輕身術)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극단적인 경우고, 일반적으로 경공술이라 하면 장거리를 안정적으로 달리기 위해 가급적 내공 소모를 최소화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 라이가 사용하는 검술에 포함되어 있는 보법의 경우는 얘기가 완전히 다르다.

검술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공격이 시작되는 중심점의 무게가 무거운 쪽이 좋다. 45킬로 몸무게의 가녀린 아가씨가 내리찍는 검압과 120킬로 몸무게를 지닌 건장한 사내가 내리찍는 검압의 차이! 둘이 사용한 검이 똑같은 것이라고 해도 사내 쪽 검의 파괴력이 월등할 것은 뻔한 이치다.

그 때문에 검술에 포함된 보법에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경신(輕身)과 함께 천근추(千斤墜)로 대표되는 몸무게를 가중시키는 신법이 복합적으로 사용된다. 적의 공격을 맞받거나, 혹은 적을 공격할 때는 무게가 곧 파괴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공 고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라이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내공 소모가 극심한 비효율적인 것이었지만, 라이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예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몸놀림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환희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 ✻ ✻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샐러맨더 파의 지원세력이 다란툼에서 도착했고, 그만큼 검문검색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배신자가 루크 단 한 명이라 아직까지는 그들의 이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쪽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 녀석들의 코앞을 지나간다 해도 붙잡힐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틀림없이 배신자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중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건, 루크 휘하에서 일하던 녀석들이다.

‘놈들을 몽땅 다 해치워 버려? 아냐, 그러다 정보 수집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는 곤란하지. 이 상황만 무사히 넘긴다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놈들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모두들 안전한 곳에 끼리끼리 뭉쳐서 숨어 있는 상황이다. 단독행동이 불가능한 만큼, 지부에 있는 전원이 통째로 놈들에게 투항한다면 몰라도 한두 명이 살그머니 빠져나가 투항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이제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야……. 초조해할 것 없어. 어설프게 움직이면 오히려 놈들에게 발각될 확률만 높아지는 거야.’

라이에게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를 척살하라고 지시를 내리기는 했었지만, 박스터는 라이가 그걸 해낼 거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건 샐러맨더 파가 블루썬더 파의 존재를 모르는 만큼, 이 모든 혐의는 숙적인 블랙울프 파에게로 쏠릴 거라는 거였다.

그렇게 시비가 붙어 투닥거리다 결국 그 두 거대조직은 델카의 지배를 위해 정면충돌을 향해 달려갈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라이가 행하게 될 샐러맨더 파 두목에 대한 ‘암살미수’는 블랙울프 파의 짓으로 포장되어 그 둘의 충돌을 더욱 가속화 시키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첫 단추부터 어긋나 버렸다. 루크 녀석이 배신하고 블루썬더 파의 존재를 샐러맨더 파에 밀고해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샐러맨더 파는 지금 블루썬더 파의 조직원들을 찾아 눈에 불을 켜고 요새를 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떠그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이러면 코비 녀석이 잭을 블랙울프 파에서 보낸 자객인 것처럼 위장해 준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잖아.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건가?”

한참을 궁리하던 박스터는 이 사태를 타결하려면 한 가지 희망밖에는 없다는 데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라이의 존재였다.

그가 사고를 대차게 쳐주기만 한다면, 그래서 샐러맨더 파의 이목을 그쪽으로 조금만 끌어주기만 한다면 어쩌면 이곳 요새에서 탈출할 빈틈이 생길지도 모른다.

탈출만 한다면 산맥 속에 숨어들어 10년이든 20년이든, 샐러맨더 파의 추격이 잠잠해질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으리라.

“그래, 지금 믿을 건 그놈밖에 없어. 그놈이 조금만 시간을 벌어 준다면…….”

박스터는 잭이 샐러맨더 파의 이목을 끌어주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지금 라이가 이목을 끌고 있는 건 다란툼의 시민들과 병사들이었다. 라이는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최근에 익힌 몸놀림에 신이 나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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