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6화 (862/930)

✻ ✻ ✻

다다다닷…….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 라이는 골목길 양옆에 놓여 있는 건물들의 벽면을 지그재그로 건너뛰어 순식간에 건물 꼭대기로 올라섰다. 예전에는 맨몸으로도 이런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묵직한 가죽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허리에는 장검까지 찬 채로 해낸 것이다.

“설마, 가능할까 했는데…, 이렇게 쉽게 되다니…….”

그날 창밖으로 탈출한 후, 이런저런 몸놀림을 연습하는 데 꼬박 이틀을 썼다. 밤새도록 성안을 뛰어다니는 게 힘이 들긴 했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라이가 주로 내달린 곳은 건물의 지붕 위였다.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또 건물 위쪽으로 뛰어오르기도 했다. 실수로 지붕이 내려앉는 참사가 몇 번 벌어지기도 했지만, 집주인이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재빨리 도망치는 것으로 그 자리를 모면했다.

병사들도 그런 라이의 뒤를 쫓기는 했지만, 어떻게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만약 라이가 대낮에 그런 짓을 했다면 화살이라도 퍼부었겠지만, 깜깜한 한밤중에 지붕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보니 뒤쫓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살인 사건도 아닌, 그저 시비가 붙어 사내들끼리 투닥거린 정도의 사건이었기에 적극적으로 쫓지도 않았고 말이다.

밤새도록 지붕 위를 뛰어다니다 날이 밝아오면 라이는 여관 근처로 돌아와 숨어서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지붕 위에서 간혹 낮잠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가 여관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지부장이 언제 연락을 보내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부로 찾아갈 수만 있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라이는 지부의 위치를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는 릴리의 방에 은밀히 들어가 혹시 지부장이 보낸 사람이 찾아오면 창문에 흰 천을 걸어 두라고 당부해 뒀다. 그날 이후 라이는 릴리의 방 창문에 흰 천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여관을 찾았다.

✻ ✻ ✻

리카에게 앤트러스를 인도한 후, 월터는 복수전을 위해 알카사스로 돌아갈 궁리를 시작했다. 자신이 복수전을 위해 다시금 예전에 이동했던 루트를 경유해서 들어갈 것이라는 걸 리카에게 말해뒀으니, 자신의 직속상관인 제2근위대장 까미유 드 크로데인 공작에게로 보고가 올라갔을 거다.

만약 대장이 그 의견에 반대라면 리카가 돌아간 바로 그 날 자신에게 통보가 왔었으리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할 일이나 하라고. 하지만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암묵적인 허락을 얻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더 이상의 증원을 받기 힘들다는 것. 앤트러스를 이송하는 것과 같은 하찮은 임무에 리카 같은 거물이 달려온 것만 봐도 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제1근위대나 다른 곳에 증원을 청하기도 힘들었다. 지원받은 마법사를 통해 정보가 새나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증원을 받으려면 왜 증원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알카사스에서 벌어진 일은 우연히 월터가 휩쓸린 게 아닐까 하는 정보부의 분석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보가 새 나가 자신의 행보가 탄로 났을 가능성 역시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우연이건, 첩자가 끼어 있었건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만약 첩자가 정말 있다면, 그놈이 나중에 더욱 높고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앉아 제국의 최고 기밀을 알카사스에 누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토리아 지국장과 통신을 하고 싶다.”

비밀기지에 배속되어 있는 하급 마법사 따위가 월터의 진정한 신분이 뭔지 알 리 없다. 하지만 그도 눈치라는 게 있다. 제2근위대 사령부의 직통 통신채널을 알고 있으며, 수정구슬에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에게 그곳의 마법사 한 명을 지금 당장 이쪽으로 파견해 달라고 지시하는 것을 직접 옆에서 들었으니까. 이러고도 상대의 신분이 뭔지 대충이나마 짐작하지 못한다면, 마법사를 때려치워야 하는 것이다.

마법사는 월터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월터님. 최대한 빨리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라고 했지만, 토리아 지국장과 연결되는데 월터는 거의 30여 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기사단 본부 같은 경우, 통신회선이 항상 열려 있기에 채널만 알고 있다면 언제든지 통신이 가능했다.

하지만 정보부는 달랐다. 워낙에 점조직으로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는데다, 기밀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상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회선은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리저리 빙빙 돌아서 위쪽으로 연락이 올라가야 했기에 이렇게 시간이 걸리게 된 것이다.

통신이 연결됐다는 마법사의 말에 월터가 통신실로 가보니, 커다란 수정구 안에 노회한 인상의 중년인의 모습이 떠올라 있는 게 보였다. 그 중년인은 월터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건넸다.

「하하핫, 오랜만입니다, 월터님. 저를 급히 찾으셨다고요.」

“지원을 요청할 게 있어서 말일세.”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이곳도 여력이 거의 없어서…….」

월터의 청에 지국장은 난감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노회한 인물답게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어쨌거나 말씀해 보십쇼. 여기서 정 안 된다면 본국에 지원을 요청하면 되니까요.」

“두 명만 지원해 주게. 한 명은 마법사, 그리고 또 한 명은 토리아 지국에서 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로 말이야.”

토리아 지국에서 지위가 높은 인물을 지원해 달라는 말에, 지국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월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으니까.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 말씀이십니까? 실례지만,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미끼로 쓰려고…….”

순간 지국장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는 걸 본 월터는 급히 덧붙여 말했다.

“아, 걱정 말게. 위험한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적들과 싸우는 사이에 도망치면 돼. 그 때문에 마법사가 한 명 필요한 거고.”

그때처럼 떼거리 공격을 받는다면 월터가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미끼의 생명을 보장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월터가 추가로 원한 게 바로 마법사였다. 그가 복수전을 펼치고 있는 동안 미끼를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는 게 가능하니까. 그리고 마법사를 데리고 가면 적들의 움직임을 탐지하는데도 유용할뿐더러 통신기로도 써먹을 수 있다.

월터가 제2근위대 소속 기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월터의 앞 통신구에 비춰진 토리아 지국장은 그 몇 명 중에 속해 있었다. 월터의 지위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신분은 지고한 것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월터님. 알카사스 쪽에서 군침을 흘릴만한 인물이라면 서부지부장이 딱이겠군요. 알카사스 쪽 첩보망과 연계해서 일을 해왔던 만큼, 알카사스 쪽도 서부지부장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런 그가 나타났다는 걸 알기만 하면 모두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요.」

“그럼 서부지부장으로 부탁하겠네.”

「예, 그럼 미끼는 그로 하기로 하고…, 그런데 마법사가 문젭니다. 월터님의 눈에 찰만한 쓸 만한 마법사가 없어서 말이지요.」

유사시에 혼자도 아니고 동행까지 데리고 탈출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도 아니고, 급박한 상황에서 실행해야 하니까. 더군다나 탈출시켜야 하는 사람이 토리아 지국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만큼, 그의 안전은 아주 중요했다.

잠시 궁리하던 지국장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3일 정도만 기다려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본국에 증원을 요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데…….”

「그, 그러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지국장이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떠오르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곳 토리아 지국에 배치된 이후, 줄곧 통신실을 지켜온 파벨이라는 여자 마법사였다. 변방에 배치된 것치고는 꽤나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용되지 못하고 있던 이유는 첩자로 투입하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심문을 가해도 눈물을 질질 흘리며 어렸을 적 기억부터 시작해 모든 걸 술술 불 것 같은 그런 심약한 인물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괜찮을 듯싶었다. 무려 근위기사씩이나 되는 인물과 함께 가는 것인 만큼, 적에게 포로로 붙잡혀 심문당할 염려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 명 빼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네.”

「1시간 내로 그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