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7화 (863/930)

돼먹지 못한 집안의 자제

마법사 파벨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추스리며 지국장 앞에 부동자세로 꼿꼿이 섰다. 지금껏 이렇게 높은 지위의 간부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녀는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국장님.”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에 수십 번을 되뇌었던 말이었기에 첫인사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국장은 그녀가 건넨 필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곧바로 용건부터 꺼냈다. 상부에서 높으신 분이 오셨는데, 그분을 보좌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네. 그런데 자네…, 외근은 이번이 처음이지?”

“옛, 지국장님.”

“그분께 절대로 실례를 범해서는 안 돼. 자칫하면 자네 목은 물론이고, 내 목까지 날아가는 수가 있으니까. 알겠나?”

눈앞의 지국장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할 지경인데, 그런 지국장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니……. 파벨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지국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멍청한 인사처 새끼들! 이런 여자를 최전방 지국으로 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적당한 연구소에서 연구나 하는 그런 곳에 보낼 것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지고 파벨을 탓할 때가 아니었다. VIP를 보좌함에 있어, 자신이 지닌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잘 다독여 주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

“임무에 필요한 물품들은 뮐러가 준비해 줄 걸세. 자네는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저 VIP께서 지시하시는 대로만 하면 돼. 자네가 지닌 능력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 알겠나?”

“예…….”

“그럼 나가 보게.”

나가라는 말에 파벨은 찍소리도 못하고 곧바로 지국장의 방에서 물러 나왔다. 방금 전에 지국장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저 가슴만 벌렁거리고 있었다.

방 밖으로 나오자 뮐러라는 사내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국장의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나를 따라오게.”

뮐러는 그녀를 창고로 데리고 가서 여러 물품들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해줬다. 가죽옷 상하의와 그 위에 착용하는 가죽갑옷. 그리고 우아한 디자인의 가죽부츠. 허리에 차는 검대와 30cm 길이의 단검 1자루. 작은 배낭 속에는 휴대용 물통과 비상식량은 물론이고 야영에 필요한 소소한 물품들까지 들어 있었다. 아마도 첩자들에게 지급되는 야영물품 세트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한눈에 봐도 하나같이 값비싸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첩자에게 보급해 주는 기본 장비가 이렇게까지 고급이라는 데 파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뮐러는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경비일세. 혹, 필요한 물품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넉넉하게 넣어 놨으니 부족하지는 않을 게야. 지출내역은 제출하지 않아도 무방하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경비로 쓰도록 하게.”

“예, 뮐러님.”

지금껏 단 한 번도 외근을 뛰어본 적이 없었던 파벨이었기에, 외근을 나가게 되면 으레 이런 식으로 장비들을 지급받게 되는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외근에 필요한 물품들은 각자가 필요에 따라 외부에서 구입해서 쓴 다음, 반드시 지출 내역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곳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물품들은 예전에 한 번 이상 사용되었던 것들이었다.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는 물품들은 임무를 종료하면서 곧바로 처리해 버리지만, 나중에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큰 것들은 이렇게 따로 보관해 두게 된다. 파벨은 그런 물품을 지급받은 것이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지급받은 옷으로 갈아입던 파벨은 곧바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둑한 창고 안에서 얼핏 봤을 때는 상당히 고급한 질감의 가죽옷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직접 입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쫙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가슴부분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세상에! 이런 걸 입으라니…….”

그 순간, 파벨은 자신의 임무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VIP를 보좌하여 임무를 수행하라.』

『절대로 실례를 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너는 물론이고, 내 목도 날아간다.』

그런 지시를 내리면서 이런 야한 옷을 지급하다니. 그 의도가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일순 파벨의 안색은 치욕감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이번 임무만 끝나면 장비를 더 이상 쓸 필요가 없는 파벨이었기에 따로 장비를 사 줄 필요를 못 느꼈고, 마침 창고에 그녀의 치수에 맞는 여자 장비가 있었기에 지급해 줬던 것뿐이었다. 예전에 그 장비가 미인계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쯤은 뮐러에게 문제될 게 없었다. 어차피 자기가 입을 것도 아니고, 파벨이 입을 것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VIP라는 인물을 만났으니, 파벨의 VIP에 대한 첫인상이 좋을 수가 없었다.

‘이 인간이 그렇게 지위가 높은 인물이라는 말이지? 지국장이 설설 길 만큼 그렇게 높은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이제 겨우 30대 초반, 많이 봐줘야 후반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순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더군다나 몸 전체를 허름한 옷가지로 감싸고 있었기에 전혀 VIP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빛이 바랜 회색빛의 두터운 로브 밑으로 낡은 가죽부츠의 코가 살짝 보인다. 그리고 장식용인지, 아니면 자신이 있어서 지니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허리에는 장검을 한 자루 차고 있다. 물론, 수수한 형태의 검이었다.

첩자들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통신을 나눈 것은 몇 번 있었다. 수정구를 통해 봐 왔던 첩자들과 VIP가 비슷한 행색을 하고 있다는 데 파벨은 약간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새파랗게 젊은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높은 집안의 자제인 게 확실했다. 그런데도 제대로 된 복색을 갖춰 입고 있는 걸 보면, 그나마 상식이라는 게 있는 인간인 모양이다. 알카사스로 침투하는 첩자가 눈에 확 띄는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자신의 목숨의 안전부터 걱정해야 했을 테니까. 최소한 유서는 써놓고 가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 해도 어딘가…….

단 한 가지 옥의 티라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옷차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첩자들의 경우 저런 식으로 모험가 분장을 했다가는 상관에게 호되게 야단맞았으리라. 대개의 모험가들은 머리카락이 길어지면 자신이 직접 거울을 보며 가위로 잘라버렸기에 저렇게까지 단정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쪽은 파벨 요원입니다. 알카사스에 대해서 그리 무지한 건 아니니 제법 도움이 되실 겁니다.”

VIP에게 파벨을 소개한 것은 40대 후반쯤의 옆집 아저씨처럼 보이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사내였다. 파벨은 그가 토리아 왕국 서부지부에 구축되어 있는 첩자망의 총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그와는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몇 번인가 대화를 나눠봤을 뿐, 실제로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벨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환하게 미소 지으며 VIP에게 인사를 건넸건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사내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런 어조로 대꾸했다.

“월터라고 한다.”

월터는 함께 가야 하는 마법사가 여자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방에서 둘이서만 생활해야 하는 만큼, 껄끄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근위대 동료처럼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남자였으면 딱 좋겠지만, 지국장의 눈치를 보자니 찬밥 더운밥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닌 듯했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월터의 반응을 파벨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상대의 표정으로 봤을 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불만이 있음에 틀림없다. 파벨은 월터가 눈치채지 않도록 살짝 고개를 숙여, 자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차림을 훑어보며 재차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벨은 보급받은 야하기 짝이 없는 옷을 감추기 위해 잡화점에서 검정색 로브를 사서 뒤집어썼다. 어쩌면 이게 월터라는 VIP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로브를 벗어야 하나?’

파벨이 내심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월터가 입을 연 것은.

“야숙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준비는 단단히 해 왔나? 아무래도 로브의 두께가 좀 얇은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월터님.”

파벨이 대답하자마자 서부지부장이 끼어들었다.

“바로 출발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월터님. 지금 출발하시면 내일 점심때쯤에는 국경을 넘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알카사스 쪽에는 연락을 해 놨나?”

“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시간에 맞춰서 마중을 나올 겁니다.”

알카사스 쪽에서 정보가 샐 것을 염두에 둔 통보였지만, 파벨은 둘이서 나누는 대화의 속뜻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내일 점심때쯤에는 알카사스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 정도만이 그녀가 둘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전부였다.

파벨은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하려고 했다. 하지만 국경선까지 가면서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모든 잡무 처리는 서부지부장인 상관이 재빨리 처리해 버렸기에, 그녀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리아 왕국 서부지부의 첩자망을 총괄 지휘하는 중책에 임명된 이유가 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이었다.

국경 근처 여관에 도착한 후, 서부지부장이 방 2개를 달라고 하는 걸 옆에서 들으며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날밤을 함께하고 싶었는데……. 싫다고 반항하면 목이 날아가려나? 인상은 그렇게 안보이던데, 엄청 여자를 밝히는 놈인가 보네.’

불안에 떨며 내심 월터에 대한 욕설을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약간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파벨에게 서부지부장이 말을 걸어왔다.

“내근만 하다가 밖에 나오니 피곤하지?”

서부지부장은 열쇠 한 개를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올라가서 잠시 쉬도록 하게. 식사는 30분 후에 할 거니까, 늦지 않도록 내려오고.”

“예, 안스님.”

방으로 올라가며 파벨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명확하게 지시를 해야 그에 따를 게 아닌가. 뭐, 어쨌거나 지금은 월터가 자신을 덮칠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쉬어두는 게 좋겠다고 파벨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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