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생각이 떠오르자 울컥 속이 뒤집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그렇게 보고 싶으면 자기가 직접 갈 일이지…….”
월터의 중얼거림에 강한 짜증이 어려 있는 건 느꼈지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파벨이 당황해서 질문을 던져왔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월터님,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아, 혼잣말이었을 뿐이야. 그건 그렇고, 자네는 사막에 와본 적이 있나?”
“아뇨.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럼 이 근처 지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군.”
“와본 건 처음이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일대의 경우, 알카사스의 중요한 교역로이기에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오고 있거든요.”
“그거 다행이로군.”
월터는 어둑해지고 있는 앞쪽 먼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앞쪽에 마을 같은 건 있나? 아니면, 링카 성이 끝인가?”
“물론 있습니다. 저렇게 보여도 사막 안에서도 물이 나오는 곳이 간혹 있거든요. 거기를 중심으로 마을이 건설되어 있는 거죠.”
“하기야…, 그런 게 있으니까 사막 민족 녀석들이 번성하고 있는 거겠지.”
잠시 후, 해가 지기 시작하며 놀라운 장관이 펼쳐졌다. 황금색, 혹은 갈색에 가까운 색상을 띄고 있는 사막에 노을이 지자 붉은색이 더욱 붉게 물들며 보는 이의 마음을 경건하게까지 만들어줬다.
“저 모습 하나만 해도 여기에 온 보람이 있네요. 저런 장관은 정말 처음이에요.”
노을 탓인지 몰라도 얼굴이 새빨간 색으로 물든 파벨이 감동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월터도 그녀의 의견에 동감이었다. 저 모습 하나만으로도 여기에 온 보람이 있다고. 하지만 저 사막 안쪽에서 무슨 일을 겪게 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지금껏 저곳에 투입된 사람들 중 돌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사막 민족이 강하고, 또 경계가 삼엄하다고 해도 그건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때, 월터의 기감(氣感)에 강인한 존재감이 잡혔다. 그는 급히 파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녀는 주변 경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노을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월터는 한숨을 푹 내쉰 후, 강렬한 존재감을 은은히 뿜어내고 있는 상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 덕분인지 아직 상대는 월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상대의 시선도 파벨처럼 노을을 향하고 있었다.
‘쯧, 사내놈이 꽤나 감상적이군. 노을 따위에 정신이 팔려……?’
여기까지 생각하던 월터는 곧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사내라고 착각할 정도로 엄청난 근육질의 신체를 지닌 상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던 것이다. 낙타에 타고 있기에 정확한 신장을 가늠하긴 힘들었지만, 키도 꽤 큰 듯 보인다. 그리고 낙타 안장에는 중병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바스타드 소드(Bastard Sword)가 매여 있었다. 무게가 10킬로그램씩이나 나가는 저런 중검을 애용하는 건 사내들 중에서도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하물며 여자들 중에서 저런 걸 쓰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정말 타고난 신력을 갖춰야 가능한 일이었다.
“호오, 제법 저릿저릿한걸. 알카사스에 저만한 기사가 있을 줄이야. 4대 강국에 들어간다는 게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저 여자가 내 상대라는 건가?”
씨익 살기 어린 미소를 짓는 월터. 저 정도 수준의 기사라면 감히 자신에게 도전해 온다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저 여자 혼자만이 동원된 게 아닐 거라는 점이다.
‘저런 여자가 넷 정도만 되어도, 파벨의 안전은 보장하기 힘들겠군.’
하지만 파벨도 흉험하기 짝이 없는 정보부에서 잔뼈가 굵어온 마법사인 만큼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알아서 대처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뭐, 좀 믿음이 가지 않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잘해낼 거야. 어찌 되었든 정보부 요원이잖아.’
월터는 뜻밖에 만난 상대에게 바짝 주의를 기울였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까? 아니,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거 없이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상대를 힐끔거리며 어떻게 할까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노을을 바라보고 있던 상대가 슬쩍 시선을 돌려 월터를 본다. 그러면서 살짝 미소를 짓는 상대. 미인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나름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다. 온몸의 근육질만큼이나 여자치고는 강인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 여자가 이쪽을 보고 미소를 지으니, 꼭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잡아먹을 것인지 궁리하며 희색이 만연한 듯 보인다.
지금껏 여자의 시선을 받아보고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쳐보기는 난생 처음인 월터였다. 그는 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전을 피웠다.
“파벨, 아무리 낙타에 타고 있다고 하지만 앞을 잘 봐. 자칫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겠습니다, 월터님.”
월터는 낙타를 천천히 몰며 어둠에 가려져 있는 사막 속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온 신경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미지의 적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지금 주변을 탐색해 봐. 뭔가 걸리는 게 있나?”
그러자 곧바로 주문을 외운 후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파벨이 대답했다.
“주변에 신경 쓰실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습니다.”
“뒤쪽에도?”
“예. 뒤쪽에는 네 명으로 이뤄진 대상(隊商)이…….”
여기까지 말하던 파벨은 흠칫하더니 재빨리 월터의 안색을 살펴온다.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은 것이다. 저 뒤쪽에서 수십 마리의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따라오고 있는 대상의 인원이 모두 여섯 명이라는 것을.
네 명은 뷰 마나 포스의 효과로 인해 온몸이 특이한 색깔로 얼룩져 보이고 있다. 두 명은 일반인이었고, 두 명은 꽤나 무예를 연마한 듯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나머지 둘이었다. 시커먼 윤곽만 보이고 있을 뿐, 그들의 마나 상태가 어떤지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옆에서 낙타를 몰고 있는 월터처럼…….
파벨은 애써 두려움을 감추며 나지막이 월터에게 속삭였다. 정체불명의 무리와는 꽤나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행여 그들이 자신의 음성을 듣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적인가요?”
“아직은 모르겠어. 적인지…,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는 모험가들인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야.”
“예, 월터님.”
✻ ✻ ✻
라이는 조장들과 합류하기만 하면 곧바로 부두목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부두목을 만난 것은 조장들과 합류한 후 거의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것도 거리를 샅샅이 뒤지고 있던 조장들 중 하나가 우연히 밖으로 나온 동료를 찾아낸 덕분에 합류에 성공할 수 있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부두목, 아니 이제 두목이 된 박스터는 라이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이 질문부터 던져 왔다. 그로서는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최근 샐러맨더 파에서 수색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쪽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정말로 잭이 해낼 거라고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고 있었다. 이건 정말 기적이었다!
이렇게 되면 요새를 탈출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아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 막강했던 샐러맨더 파를 자신들이 흡수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생긴 것이다.
“정말 수고가 많았네. 이만 가서 푹 쉬도록 하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두목은 알리에게 명령했다.
“잭을 가장 좋은 숙소로 안내해라.”
“예, 두목.”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떠날 거야. 내가 전에 말했던 거 준비해 놨겠지?”
라이가 말하는 게 위조신분증이라는 건 박스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라이를 떠나게 놔둘 수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잡아둬야 하는 것이다.
“미안하네.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 자네도 잘 알거 아닌가? 그 이후로 많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
이미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고 물은 거였다. 하지만 라이는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고 박스터는 급히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이 일이 정리가 되는 대로 확실하게 처리해 줄 테니까. 완벽한 신분증을 만들려면 관의 협조를 받아야 하기에 시간이 좀 걸리는 것뿐이야.”
“관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고?”
꽤 그럴듯한 대답이다. 하기야 그렇게만 된다면 완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분증을 발행하는 기관에서 만든 신분증. 즉, 그건 더 이상 위조가 아니라 진짜 신분증이라는 말이 되는 거니까.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지. 샐러맨더 파가 붕괴된 그 자리를 우리가 파고 들어갈 거니까. 영주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더러운 일을 처리해 줄 조직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그건 꼭 샐러맨더 파일 필요는 없지. 안 그런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잭이 미소를 짓자 박스터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물론 미소의 색깔은 조금 달랐다. 라이의 것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면, 박스터의 것은 음흉함이 듬뿍 묻어 있었으니까.
“자자, 신분증이 만들어질 때까지 푹 쉬고 있으라고. 알리, 잭을 최고로 좋은…….”
“아니, 여관은 필요 없어. 인적이 없는 곳에서 수련을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은 장소 알고 있는 데 없나?”
라이의 물음에 박스터는 잘됐다는 듯 활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런 데라면 많지. 산채(山寨)를 쓰면 편리할 거야. 알리, 넓적바위 동굴로 잭을 안내해 줘. 그리고 필요한 물품도 장만해 주고.”
언제까지라도 잭을 붙잡아두고 싶었던 박스터였기에 얼마나 머물 건지는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로서는 잭이 거기에서 한도 끝도 없이 처박혀 있길 바랬으니까.
“예, 두목.”
“그리고 또 필요한 거 없나?”
“참, 이쪽으로 올 때 데리고 온 릴리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 주면 좋겠는데…….”
“릴리?”
인상을 찌푸리며 뭔가 생각하는 듯한 박스터를 보며, 라이는 급히 덧붙여 말했다. 박스터의 고민이 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하고 함께 갔었던 조장들이 어떻게 생긴 애인지 알고 있어. 찾으면 나한테 기별만 해주면 돼. 나한테 끌고 올 필요는 없고 말이야.”
“알았어. 그렇게 해 주지.”
“그럼 부탁하지.”
알리와 함께 잭이 나간 후에야 박스터는 잭이 자신에게 존칭 비슷한 것도 쓰지 않고 대화를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이제 떠날 거라고 생각할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
처음부터 그랬지만 라이는 그의 부하가 아니었다. 일종의 동업자였다. 위조신분증을 미끼로 한……. 문제는 그게 얼마나 오랫동안 먹혀들어갈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였지만.
“큰일이야. 떠날 때 떠나더라도 조직이 좀 안정된 뒤에 떠나야 할 텐데……. 녀석을 붙잡아 둘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잭이 위조신분증을 원한다는 거였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성심껏 잘 구슬리면 녀석의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껏 알게 모르게 갖은 고생을 했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