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근 #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고서야 깨달았다.
난 맨손이고 이 냄비는 방금 전까지 가스레인지 위에서 라면을 품고 펄펄 끓고 있었다는걸. 인간의 맨살이야 충분히 익게 만들 온도였지만 난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뜨겁지가 않다.
이런 사소하고도 위험한 실수는 새끼 샐러맨더를 키우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자주 발생했다. [교감] 능력의 새로운 힘, 혹은 내가 몰랐던 힘이 발현되어 새끼 샐러맨더의 유전적 특징을 내게도 부과했다. 용암지대에서 한가로이 지내는 녀석의 특징 때문에 난 뜨겁게 달아오른 냄비 따위에 화상 입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조심했던 화상에 대한 위험들이 대수롭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양해의 바다에서 돌아온 지 2주가 지났다. 그동안 내게 일어난 변화는 용에게 받은 월급과 기타 수당으로 제법 괜찮은 원룸으로 이사했다는 것과 더 이상 젖꼭지로 젖을 내뿜지 않아도 새끼 샐러맨더를 먹일 '모유'를 다른 피부로 흘러보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마물원으로 돌아온 용은 내 능력에 대하여 몇 가지 실험을 제안했고 난 흔쾌히 승낙했다.
'젖이 나오는' 수치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는 것 외에도 새로이 밝혀진 능력이 앞으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렴풋이 느끼기에 마물의 특성을 빌리는 듯한 이 힘은 단순히 동물의 감정을 읽는 예전의 교감 능력과 비교하자면 격이 달라진다. 어쩌면 타임지가 발간하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능력 top100 이라든지, 가장 영향력 있는 능력자 top100에 오를지도 몰랐다.
2주에 걸친 몇 가지 실험으로 교감 능력에 대해 모르던 걸 알 수 있었다.
예상한 대로 난 마물의 특성을 빌릴 수 있었다.
뜨거운 양은 냄비에 두 손을 갖다 댔다.
뜨거운 느낌이란 건 있지만 화상을 입진 않았다.
끼이-
어깨에 매달려있던 새끼 샐러맨더가 내려와 냄비에 몸을 부비적 댄다.
기분 좋아 보인다.
녀석은 뜨거운 걸 좋아했다.
마물원에 있을 땐 원장이 따로 마련해준 보금자리가 있었지만 내 새로운 집엔 뜨거운 용암 따윌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딴 걸 들이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녀석만을 위한 욕조를 만들어야 했다. 뜨거운 물이 계속 솟아나는 온천.
젠장! 유지비만 해도...
어쨌든 난 그러한 녀석의 특성을 빌려왔다.
마물의 특성을 '빌린다'
용의 실험으로 빌리는 조건과 빌린 후 유지되는 조건을 알아낼 수 있었다.
늪에 빠져 죽기 전 마츄들의 털이 돋아나 살 수 있었고 새끼 샐러맨더의 특성으로 용암지대에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빌려온 특성은 마물이 내 주변에 있을 때만 가능했다. 새끼 샐러맨더와 떨어진다면 난 곧바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모든 마물의 특성을 빌려올 수는 없었다. 확정된 건 아니나 [교감], 즉 나와 마물의 감정적인 연결, 마츄들이 날 좋아하고 새끼 샐러맨더가 어미로 여겼던 것처럼 특별한 커뮤니케이션이 연결될수록 쉽게 능력을 빌려오고, 더 많은 능력을 빌려올 수 있는 모양이었다. '새끼 샐러맨더' 와 교감이 깊어질수록 불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졌다. 용이 말하길, '용암' 을 꿀꺽꿀꺽 마셔도 될 수준이라나? 해보자고 했으나, 당연히 그 실험은 거절했다.
아침밥을 라면으로 때우고 출근 준비를 했다.
새끼 샐러맨더는 익숙한 듯 내 소매에 몸을 숨겼다.
샐러맨더의 특성을 가진 후, 추위에 민감해졌는데 여름 더운 날에도 긴 팔을 챙겨 입게 만들었다. 주변 시선이 따가웠으나 추운 것보단 참을만했다.
'다음 단계의 실험이라... 윽, 왠지 불길한데.'
오늘은 보다 다양한 실험을 하기로 한 날이다.
마물의 특성을 빌려올 수 있으나 '동물' 의 특성은 빌려오지 못했다.
용은 동물과 마물, 두 종류의 생물에게 교감이 가능한데 마물에게만 힘을 빌려오는 걸 의아하게 여겼다. 그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건 마물이 가진 '종' 의 아주 특징적인 형질 때문이라고 했다.
마물은 생물과 다르다.
동물의 세계는 조화로운 섭리의 세계다. 코끼리와 개미는 서로 다를 뿐, 두 종에 우열을 나눌 수는 없다. 그저 자연에서 역할이 다를 뿐이다.
초식과 육식, 그리고 잡식.
조류, 포유류, 파충류...
'인간'은 건방지게도 자연에서 제법 엇나가있는 모양이지만 모든 '동물' 은 섭리로 살아갔다. 같은 종끼리 우월과 열등종을 나눌 순 있겠지만 사냥하는 사자와 잡아먹히는 사슴 사이에 '우월과 열등' 이란 부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마물은 다르다.
겉보기에 동물과 다를 바 없는 녀석들이 마물, 혹은 몬스터라 구분되는 확실하고도 절대적인 이유는 녀석들의 몸엔 지구의 생물에겐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기운이 깃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나, 차크라, 기... 문화에 따라 부르는 용어는 다르지만 그 신비한 힘은 지구의 '인간' 들이 능력자라 불리는 원인이었으며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위협적인 이유기도 하였고 마물이 욕망의 보물, 혹은 적대의 짐승이 된 이유기도 하였다.
'마츄' 는 품은 마나가 적다.
'샐러맨더'는 그보다 많으며 양해의 바다에 사는 불의 어룡들은 격이 다르고 용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이 '마나'라는 것에 의해 사람도 등급이 나눠지는 세상이다.
20년 동안 인권운동가들이 격렬히 투쟁해온 이 주제는 이젠 사회의 일각으로 확실히 굳어진 상태였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사람에게 등급이 나눠진다.
게다가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신앙이 기반이라면 현대 사회의 카스트제도엔 '마나'라는 절대적인 지표가 있다. 물론 등급은 단순한 숫자일 뿐이며, 아직까진 평등과 자유의 가치가 존중받은 세상이었다.
'시간문제지.'
내 생각이지만 흐름은 점점, 은근히 사회를 불평등이 당연시되는 세상으로 만들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걸. 천 년 전과 지금이 다르듯이, 세상은 달라지고 있고 '전이'로 인해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는데, 흐름을 받아들여야지.
내가 카스트제도의 수드라인 점은 안타깝지만.
젠장. 마나 보유량이 최하위라니.
마물도 '마나'를 가지고 있고 개체마다, 종마다 보유량이 다르니 헌터들은 마물들의 등급을 마나로 메겼다. 동물과 다르게 마나로 인하여 확실하게 등급이 구분되는 것이다.
오늘 용과 같이 할 실험은 교감 능력의 한계에 대해서였다.
전날, 굳이 감정적 교류가 아니더라도 마츄처럼 작은 마나를 보유한 마물에게선 곁에 있는 것만으로 특성이 '옮는다는걸' 알아냈다.
하지만 샐러맨더 이상의 마물들에겐 어떠한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부우웅~!
"젠장."
어제 일을 생각하며 도로가를 걷다 보니, 내 앞에 탈 버스가 지나쳐간다.
뛰어도 잡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유유히 걸으며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봤다.
"돈도 버는데 차 사야지. 스포츠카로."
버스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생각을 이어나갔다.
원장은 교감 능력의 적용 범위를 알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세상을 멸망시킬 몇 가지 수단'이라 불리는 마물까지 교감을 해내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난 곧바로 원장에게 난 *세나리우스가 아니라고 반발했지만 그녀의 호기심(용의 호기심은 무섭다. 자유의 여신상을 골렘으로 개조할 정도로) 이 발동되어 내 반박은 동네 개짖는 소리가 되어버렸다.
"버스가 늦네."
'세상을 멸망시킬 몇 가지 수단' 의 마물?
지금 난 태연한 척하는 건 아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었다.
요 근래 위험한 일을 연달아 겪어서 그런지 그저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다.
어쩌면 오늘 할 실험은 대단히 위험할지도 모르지.
새로 장만한 때깔 나는 스마트폰, 인터넷으로 들어가 뉴스를 검색했다. 역시나 '능력자' 들이 메인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승리자인, 저들처럼 되고 싶다.
오늘 있을 위험한 실험도 앞으로 행해질 위험한 실험도 대수롭지 않아 하는 건 어쩌면, 수드라에 불과한 내가 브라만이 될 수 있는 기회라서가 아닐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소매에 숨어있던 샐러맨더가 뺴곰 고개를 내밀었다.
엄지손가락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녀석.
끼이!
"하하. 귀여운 새끼... 음."
생각해보니 녀석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네.
샐러맨더니까 간단하게 샐러드?
아니면 불의 도마뱀이니, 파이리?
무슨 포켓몬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아.
난 녀석을 '포켓몬'처럼 이름 지어주긴 싫었다.
'애삐'를 대하듯, 애완동물처럼 대하기 싫었다.
"넌 만지면 포근하니까, 앞으로 정포근이야."
파이리나 샐러드, 애삐만큼 성의 없는 이름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성' 을 딴 이름이라는 것이다.
정씨 집안의 새로운 가족.
네 녀석의 이름은 앞으로 정포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