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느낌 #
나른한 햇빛이다.
그러나 분명 평범한 인간에겐 마물의 사막에 내리쬐는 태양빛의 지독한 열기는 지중해의 해변가처럼 따사로운 일광욕 따위를 즐기기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남편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쓰러졌다.
평범한 인간에겐 사막은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같겠지만 내겐 그저 나른한 오후의 햇빛이었다. 포근이는 사막에 들어온 후부터 늘어지게 잠만 잤다. 녀석에겐 사막의 열기가 따듯한 이불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동화의 영향으로 나 또한 나른해졌다.
우린 '사막의 별'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몇 시간 동안 사막을 횡단했다.
마물의 사막은 단조로운 지구의 사막과 달랐다. 곳곳마다 진귀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색색의 모래산과 엄청난 넒이의 '개미지옥', 유우니 소금사막처럼 반짝이는 크리스털 사막도 있었다.
그중, '파파니아 꽃'이라는 사타리언의 고향에서만 자라는 꽃이 피어난 곳에서 정차했다. 파파니아 꽃은 무척이나 거대했다.
마치 작아진 '앨리스' 가 된 기분이었다. 생김새는 해바라기이나 3층 건물에 맞먹는 높이의 꽃은 사막 모래에 뿌리를 내리고 아름답게 피어나 있었다.
사타리언 부인은 파파니아 꽃을 보며 무척이나 감동스러워했다. 지구에서 볼 수 있을지 전혀 몰랐다며, 눈물마저 글썽인다.
파파니아 꽃은 그들에게 어떠한 종교적인 의미 같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파파니아 꽃에게 기도하는 사타리언 부인과, 생소한 엄마의 모습을 장난스럽게 따라 하는 아이들.
난 나른함을 참아내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어린 지금의 녀석들에겐 그저 신나는 여행에 불과하겠지만, 훗날 생각하길 이 추억이 녀석들의 삶에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타리언 부인의 바람처럼 말이다.
"읏차!"
차에서 들려오는 기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끙끙대던 남편이 결심한 듯 차에서 내려 차가운 생수를 얼굴에 뿌렸다.
"괜찮겠어요? 차에서 쉬고 계시지."
"끄응, 그래도 '가족' 여행인데 그녀만 고생시킬 순 없죠."
남편의 반짝거리는 대머리는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여행이 끝나면 피부염으로 고생 좀 하겠지만 아이들과 부인의 추억에 어울릴 수만 있다면 괜찮은 거래겠지.
나른한 날이었다.
마물의 사막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고 사타리언 부인과 인간 남편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바람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 간과하고 말았다. 아니, 변명할 것 없이 내 성격 때문이다. 다혈질이란 스위치가 켜지면 악바리로 꽉 차지만 그럴만한 자극이 없다면 나 자신은 너무 한가로운 성격이었고, 그로 인하여 몇 년 동안 백수로 살았어도 위기감은 느끼지 않았다.
의사선생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어린 나이에 '몰살' 사건을 겪었으니, 그 이상의 위기감이 아니면 태평스럽다. 나쁘게 말해 한심한 성격이다.
어쩌면 예견된 위험이었다. 신상서를 받았을 때 가장 신경 쓰였던 건 '열네 명의 아이들'
사타리언 부인은 지금까지 열네 명의 아이들을 모두 보살폈고 아이들도 얌전히 엄마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파파니아 꽃에 기도를 드리던 순간에는 부인은 미처 열네 명의 아이들을 모두 신경 쓰지 못했고, 아이들에겐 기도의 시간은 그저 지루할 뿐이었을 것이다. 열네 명의 아이 중, 유난히 활발하던 아이가 사라졌다는 걸 기도를 드리던 사타리언 부인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고 더위를 먹어 해롱거리는 남편 또한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젠장.
내 불찰인 것이다.
먼저 눈치챈 건 나였다.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뀨우-!
낮잠 자던 포근이가 깨어나 귀를 쫑긋거린다.
위험은 순식간에 찾아왔고 난 아이들의 머리 수가 한 명이 빈다는 걸 깨닫자마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갈수록 확실히 들려오는 그 소리는 굶주린 마물의 소리였다.
크라롸롸!
'만콜피온'이라는 녀석이 있다.
용의 매뉴얼에 적힌 녀석에 대한 특징은 단순했다.
잔인한 성질의 거대한 전갈.
순식간에 모래 구덩이에서 솟구친 전갈은 홀로 떨어져 있던 아이를 덮쳤다.
전갈의 꼬리는 아이의 몸통 만했다. 찔리면 엄청난 참극이 벌어질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머릿속에 스치는 건 오로지 슬퍼하는 그들의 모습, 젠장!
만콜피온은 넘어진 아이를 향해 꼬리로 위협했다.
녀석이 아이를 먹이로 인식했다. 젠장, 하필 난 아이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레미니!"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나였으나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용의 마법과 새끼 샐러맨더와의 교감으로 인간의 반응 속도를 뛰어넘은 나도, 인간 근력의 6~8배라는 사타리언 부인도 아니었다. 이 중에서 가장 힘없고, 나약한 사람, 남편이었다.
아이와 가장 가까이 있던 그는 대책 없이 뛰어갔고 만콜피온의 전갈 꼬리가 아이를 찌르기 전에 아이를 안아 들었다. 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인간인 그가 아이를 감쌌다고 하여 지켜내지는 못할 것이다.
만콜피온의 꼬리는 그 둘을 관통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만콜피온의 꼬리는 자비 없이 둘을 향해 쇄도했다.
그와의 대화가 떠올라,
'가장으로 지켜주고 싶다.'
화르르!
무언가가 타올랐지만 상관 쓸 겨를이 없었다.
남편은 아이를 지켜낼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변화를 만들었다.
만콜피온이 순간적으로 먹잇감을 혼동하여 멈칫했고, 그 잠깐의 멈춤으로 인해 다시 꼬리가 휘둘러질 때까지 녀석과 나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다정 씨!"
"형아!"
살을 파고드는 굵직한 독침.
지독한 열기가 등에 꽂힌 녀석의 독침으로부터 주입된다.
생각한 건데 마물원 일을 한 후 은근히 죽을 뻔한 적이 많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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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陽海의 어룡들은 뚜렷한 약육강식의 섭리에 있었는데 힘의 논리는 '큰 놈' 이 '작은 놈' 을 잡아먹는다는, 철저하게 '몸집'에 의해 분류되었다. 그러나 '샐러맨더' 들 만은 달랐다. 그들은 작은 덩치로 양해의 가장 손쉬운 먹이였음에도 어룡들은 샐러맨더를 건드리지 않았다.
어떻게, 왜?
샐러맨더들은 어떻게 해서 양해의 잔인한 먹이사슬에 엮이지 않았을까?
난 '지구'에 나타난 샐러맨더들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양해의 주인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고 다른 세계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은 불의 바다에서도 여유롭게 그들을 관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샐러맨더의 생태에 대해 관찰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영역을 굉장히 소중히 여겼다.
때론 무모하게 보일 지경으로 말이다.
용암 바다의 깊은 심해에 사는 거대한 어룡에 맞서기도 하였는데 일반적인 양해의 먹이사슬 구조라면, 샐러맨더의 수십 배나 되는 크기의 어룡이 샐러맨더를 몰살에 가깝게 잡아먹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승자는 샐러맨더였다.
난 처절한 투쟁의 현장에서 단순한 이치를 깨달았다.
샐러맨더들이 제 덩치의 수십 배나 되는 어룡에 맞서 양해陽海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굉장히 흥미로운 종의 특성에 있었다. 양해의 어룡들은 몸을 이루는 대부분이 '불의 기운' 이었다.
큰불에 촛불이 삼켜지듯 몸집이 클수록, 품은 불의 기운이 많아 확실한 먹이 사슬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샐러맨더들은 불의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불의 존재들은 결코 녀석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마물원 이전의, 그녀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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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확신은 없었다. 내가 죽을 수도 있었던 위험한 도박이었다.
아이를 습격한 마물이 만콜피온이며 놈이 가진 독의 특성이 일반적인 생물의 독이 아닌 사막의 열기를 담은 마물의 열독熱毒이라는 것.
주저 없이 뛰어들어가게 만들었던 어렴풋한 느낌은 만콜피온의 독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본능적인 예상.
뀨!
새끼 샐러맨더가 만콜피온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난 등에 꽂힌 독침을 '밀어내며'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새끼 샐러맨더를 진정시켰다.
독은 통하지 않았지만 등을 관통한 상처 때문에 무척이나 아팠다.
사타리언 부인은 치마를 걷어붙이며 전투에 나서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물러나있으라 경고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남편과 아이들을 지켰다.
아마 그녀가 내 말을 순순히 들었던 건 내 모습 때문일 것이다.
등에 난 상처는 제법 위독했으나, 어느새 흉터 없이 깔끔히 아문 후였다.
만콜피온은 다시 한 번 꼬리를 높게 추켜들며 위협했다.
난 용이 건넨 '가방' 을 뒤적거리며 '봉' 을 찾았다.
마물원에 입사하고 나서, 용이 처음 건넸던 '마물 제압용' 봉이었다.
삼단으로 접혀진 개봉을 펼치자 제법 기다란 무기가 되었다.
내 상처를 회복시킨 게 무언인지는 자세히 몰랐다.
용의 '마법' 의 효과인가?
아니면 내 몸을 두르고 있는 샐러맨더의 '불의 기운' 때문일까?
화르르, 귓가에 들리던 타오르는 소리는 다름 아닌 내 몸이었다.
'불꽃 모유' 라 부르던 불의 기운이 내 몸을 감싸고 활활 타올랐다.
분명 불길이었으나 전혀 뜨겁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느낌, 무척이나...
만콜피온의 꼬리가 다시 쇄도했으나 힘껏 봉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녀석의 꼬리를 박살 낼 수 있었다.
확신했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
꼬리가 작살난 만콜피온의 머리를 향해 봉을 내리찍었다.
가볍게 내려친 것만으로 만콜피온은 사기를 잃고 도망쳤다.
열은 받지만, 굳이 따라가서 죽일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