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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5화 (25/258)

25화

# 바보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 #

처음엔 날씨가 선선하다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잠에서 깼으나 꾹 감은 눈을 뜨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다시 잠에 들고 싶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내 몸을 어루만진다. 맑고 상쾌한 밤바람은 오랜만이다. 쾌적한 잠자리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방충망도 뚫는 이계 벌레들 때문에 창문을 잠가 바람 한 점 불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침대의 푹신함이 아닌 차갑고 딴딴한 느낌이다. 눈꺼풀 위에 올려놓은 잠의 무게를 힘겹게 이겨내고 슬며시 눈을 떠봤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깜빡하고 창문을 열어뒀겠지, 침대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서 잔 거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눈을 뜨자 빌딩이 보였다.

낯선 풍경만으로 당황스러운데 기이한 건 내가 빌딩의 '꼭대기' 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쩐지 맑고 상쾌했던 바람의 정체는 아주 높은 곳에서 불어왔기 때문이었구나. 옥상의 난관에 아슬하게 누워있던 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득한 높이다. 도로의 자동차가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몇 층일까? 60? 70? 확실한 건 떨어지면 내 몸이 완전히 박살 날 만큼 높다는 것이다.

사춘기 때, 야한 꿈과 '그때' 의 악몽을 제외하곤 가장 많이 꿨던 꿈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이었다. 덜컹거리는 감각과 함께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지. 악몽이라면 악몽이지만 키가 클 꿈이라기에 오히려 좋아했었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다.

덜컹거리며 떨어지는 감각만이 느낄 게 아니라 조금만 몸부림을 쳤더라면 빌딩 아래로 낙하하여 죽을 뻔했다.

"뭐야, 씨발."

욕지거리가 절로 나온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기이한 건 무섭고 당황스럽다기보다 초고층 빌딩 위에서 잠에서 깨어난 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상황이 여전히 기분 좋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잠에서 깨 멍한 정신이라도 바로 앞에 낭떠러지가 있다면 후다닥 일어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난 내 앞에 놓인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난관 바깥에 다리를 걸친 채 앉아 굳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높은 곳을 좋아했었던가?

아니, 난 바보가 아니다. 위험할 만큼 높은 곳을 좋아하진 않아.

그러나 모든 게 작아진 빌딩 아래의 풍경과 가까워진 밤하늘, 상쾌한 바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저 아래 어우러지는 사람들과 달리 이곳은 고독하고 외로운 곳이었으나 내겐 아늑할 뿐이다.

냐앙-

녀석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니, 내가 깨어날 때부터 녀석은 옆에 있었다.

밤하늘과 어울리는 검은 고양이는 서울의 야경을 도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녀석과 같이, 같은 것을 바라봤다.

"네 녀석 짓이구나."

대체 어떻게 날 이곳까지 데리고 왔는진 몰라도 녀석이 한 짓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자유로움은 녀석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는 높은 곳을 좋아했지. 이렇게 높은 곳인진 몰랐지만.

딱히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녀석과 같이 밤을 즐겼다.

서울의 야경은 전이 전과 달라진 게 없구나. 물론 가까이서 지켜보면 상당히 다를 테지만.

한참 동안 밤과 달의 사색을 즐겼다.

"자, 그럼 내려가자."

난간에서 일어나 야옹이를 안았다.

그리곤 천천히, 조심스럽게 위험한 철골 난간에서 내려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처럼 끝이 뾰족하게 지어진 빌딩은 사람 하나 누울 공간만 있었다. 평상시의 나라면 대단히 위험하고 살 떨리는 상황이었으나 정야옹, 녀석 때문인지 무섭진 않았다.

그래서 조금은 용기 내어 걸음걸이를 빠르게 했다. 철제 발판으로 만들어진 사다리를 내려오며 잠을 더 자고 싶은 욕구와 내일 지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조금 더 속력을 냈다.

분명 방금 전까진 잠잠하던 바람이었다.

얄궂게도 내가 방심하자마자 강풍이 불어왔다.

때마침 사다리를 내려오던 난 한쪽 발이 들린 상태였으나, 버틸 만했다.

문제는 그 뒤였다.

"아!"

한숨 돌리고 있던 날 갑작스레 덮친 예상치 못한 돌풍에 몸이 붕 떠오르며 순식간에 날아갔다. 단순히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키가 크는 꿈'이라며 아이들을 위로할 만큼, 사람에게 있어서 떨어지는 공포는 극심했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때 걸리는 시간은 찰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수십 년의 삶이 교차하듯 오랜 시간으로 체감된다고 했다. 정말로 그렇게 오랜 시간처럼 느껴진다면 그 시간 동안 언제 떨어져 죽을지 기다리며 공포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잔인한 죽음일까?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과 내장이 사방에 튀어 시체조차 온전하게 수습하지 못하는 죽음.

분명히...

공포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다음, 난 별다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공포스럽기보단 궁금했다. 왜 강풍이 멎었는데, 다시 돌풍이 맞은편에서 불어왔을까?

하염없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난 생각했다.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보았던 맞은편의 거대한 빌딩이 생각났다. 그래, 강풍은 건물의 기류에 부딪혀 국지풍을 만들어낸 거야.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어. '빌딩바람'이라 불리는 도시의 강풍이었지.

'젠장.'

호기심이 해결되자 그제서야 지금 상황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많은 생각이 교차됐으나 생각이란 건 빛보다 빨라, 겨우 떨어진 지 몇 초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아직 곤두박질치려면 십 초는 남았겠지.

냐앙!

날 따라 떨어지는 고양이가 보인다.

녀석은 나보다 빠르게 떨어져, 순식간에 발톱으로 내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난 '가벼워지고 돋아나고 안정적이게 되었다.'

안정적이라고 생각한 건 낙하하는 와중에도 자세를 고쳐 빌딩의 외벽을 향해 정확히 손을 뻗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잡을 수 있었다.

돋아나게 됐다는 건 콘크리트 건물 외벽을 꿰뚫고 낙하하는 몸을 멈출만한 무언가가 돋아났다는 것이다. 울버린처럼 길게 자란 손톱은 확실히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짐승, 그것도 맹수의 것처럼 두껍고 강력하고 날카롭다. 콘크리트를 뚫을 만큼.

가벼워진다는 건 인간의 몸무게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외벽을 움켜쥐자 줄어든 몸무게만큼 저항 없이 낙하를 멈출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봤다.

그리고 위를 올라다 봤다.

적어도 6층 높이는 떨어진 것 같다.

하지만 몸에 이상은 없다.(손톱이 돋아나고 몸무게가 가벼워지며 감각이 날카로워진 게 이상이 아니라면.)

'교감 발현.'

지금까지 마물의 특성을 빌려오는 능력은 마물과의 특별한 유대감이 있어야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애교가 많았던 녀석이긴 했지만 지낸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아 '특성을 빌려오는' 교감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초고층 빌딩에서 깨어난 것이나 높은 곳을 좋아하게 된 것, 그리고 아득한 높이에서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침착했던 건 이미 전부터 녀석과 동화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녀석은 내 어깨에 앉아 뺨을 비비적대며 울었다.

냐앙!

그리곤 튀어나온 빌딩의 외벽을 타고 폴짝폴짝 뛰어 순식간에 빌딩 아래까지 내려갔다. 녀석은 아래서 꼬리를 살랑거리며 날 기다렸다.

"아니면 녀석이 내게 힘을 빌려준 걸지도."

난 녀석을 흉내 내며 빌딩을 '타고' 내려왔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서성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괜히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다, 난 팔을 십자로 교차하여 가슴으로 모았다.

"비브라늄 슈트가 부럽지 않네."

냐아옹!

말을 알아듣는 듯 녀석은 힘껏 울며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

녀석과 지낸 지 일주일이 지나며, 난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야옹이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포근이는 불의 기운이라도 먹지, 녀석은 일체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 혹시 나 몰래 쥐새끼라도 잡아먹나 싶었으나 전혀 아니었다.

생물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잡식이던 육식이던 초식이든 간에, 먹음으로써 에너지를 섭취한다.

마물도 마찬가지다. 마물을 생물의 범주에 가까스로 넣을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어떤 마물이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건 매한가지, 그러나 녀석은 뭔가 다르다. 살아 움직이나 에너지를 필요하지 않다니? 동물, 아니 마물의 개념조차 벗어나지 않는가?

좋아하는 건 있었다.

고양이답게 높은 곳을 좋아했다. 문제는 그곳이 초고층 빌딩 정도의 높이라는 것이다.

때때로 산책 삼아 녀석을 빌딩의 전망대로 몰래 데리고 가야 했다. 녀석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위태롭게 빌딩 위에 있는 경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집에 설치한 CCTV로 보아하니, 잠든 난 몽유병처럼 일어나 높은 곳을 찾아 나섰다. 어깨엔 고양이를 매단 채로. 난 저 때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다.

사람을 조종하는 고양이, 언뜻 대단히 무섭게 느껴질 만도 했으나 난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어느 정도 녀석에 대해서 알게 되자 교감에 집중했다.

주로 고층 빌딩의 옥상에서 이루어진 교감은 떨어져 죽을 뻔한 위기를 동반했으나 제법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녀석과 동화되며 발현되는 특징들에 대하여 알아가며 인간이었을 땐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같았다. 뛰어난 반사 신경과 가벼운 몸놀림, 완력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으나 점프력과 지구력은 '나보다' 훨씬 늘어났다. 또한 원할 때 손톱과 발톱을 길게 뽑을 수 있었다. 손톱은 콘크리트를 부술만큼 단단했고 사람의 피부를 찢을 만큼 날카로웠다.

녀석은 갈수록 정말 알기 힘든 '존재'였다.

원장님에게 요청하여 검사 비용을 받아 다시 검사소를 찾았다.

이번엔 야옹이와 교감하며 검사를 받았는데, 포근이 때와 달리 마나의 보유량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교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나는 그대로, 평범한 나와 같다는 것이다.

기이했다. 마물과 교감하면 특징과 마나를 빌려온다는 지금까지의 결과와 전혀 다른 것이다.

원장님에게 보고했으나 그녀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냐앙!

보다 녀석에게 집중해보자면,

녀석은 태평하고 느긋하고 잠 많은 고양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둥지를 치우거나 사료를 보충할 때 졸졸 따라와서 구경하다가 관리실로 돌아오면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잠을 청한다. 한참을 잔 후 퇴근할 때면 귀신같이 알고 일어나 내 어깨에 올라탄다. 집으로 갈 때 빌딩 전망대에 들러 구경시키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출근할 때까지 쭉 잠만 잔다.

녀석이 어떤 마물인지 모른다.

그래서 뭐가 문제일까?

높은 곳을 좋아하고 가끔씩 포근이와 싸우며(언제나 야옹이가 이겼다.) 고양이 답지 않게 애교가 많은 검은 고양이, 그거면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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