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턱시도를 입은 사나이
내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망상하던) 난 원장님이 말에 정신을 차렸다.
승진이라고?
되묻자 원장님은 씩 웃으며 말했다.
“월급은 지금의 10배, 다정 씨는 스포츠카를 좋아하니까 한 달에 한 대씩 원하는 모델 지원. 유류비 지원. 원한다면 주택도 제공하죠. 그리고 앞으로 출장도 빈번해질 테니까, 외부 업무를 볼 때마다 세계 어디에서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아멕스 로열 드래곤 카드를 빌려드릴게요. 어때요? 승진할래요?”
그녀는 분명히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날 바라보며, 내가 충분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긴 시간을 줬다. 자, 생각해 보자. 월급의 10배다.
성과금이나 특별수 당을 제외하더라도 난 한 달에 2천만 원을 받는다. 한 달에 2억, 세상에나. 내가 하는 일이 헌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면, 거의 3등급 마나를 가진 뛰어난 헌터들과 맞먹는 벌이였다.
(무려 세금도 없다!) 게다가 오로지 드래곤의 재량으로만 이루어지는 사내 복지도 대단하다.
물론 드래곤 재량이 웬만한 대기업 뺨치긴 하지만 오로지 날 위한 맞춤 복지인 것이다.
한 달에 한 대, 원하는 스포츠카 지원. 게다가 기름값도 걱정 없다. 막말로 저번처럼 포근이를 데리고 다니다가 차가 터져도 한 달만 기다리면 새 차가 나온다.
무엇보다 깜짝 놀란 건 전설의 카드, 아멕스 로열 드래곤 카드.
현대인은 돈의 노예다. 전이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자본주의 만세를 외치는 경향은 더 심해졌다.
이계인들과 능력자들이 뒤섞이는 세상에서 여전히 믿을 만한 놈은 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승리자들은 남들과 다른 특권을 누린다. 아멕스라고 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그중에 블랙. 사용액 무제한이라는 신용카드, 재벌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이 이후, 아멕스는 한층 진화했다. 이미 존재만으로 ‘신용’이 보장되는 자들을 위한 특별한 카드를 출시했다.
그중에 ‘드래곤 프리미엄’ 카드는 오로지 드래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드래곤은 존재 자체만으로 지구 최고의 신용을 상징하기에, 드래곤 아멕스 카드가 가진 특권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보통 신용카드는 당연히 공동 소유가 안 되지만 그녀는 용이다. 아마도 나도 사용 가능하게 어떤 수작을 부릴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앞선 말한 놀라운 혜택의 여운이 잦아들자, 약간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왜 ‘승진했어요.’가 아니라 ‘승진할래요?’라고 물어본 거지?
“승진하면 하는 일은… 역시 달라지겠죠?”
“당연하죠.
원장님은 웃음기를 지우고, 빨간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켰다.
붉은 동공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타오르는 시선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높은 직급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거 아시죠?”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르… 아, 네. 알죠.”
그녀의 이어진 말은.
“앞으로, 마물원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드리죠.”
아주 놀라운 것이었으며.
“본격적인 마물 회수, 보호. 지구의 생태계 조율, 조화. 그건 인간들의 생태도 포함한 것.”
너무나 급작스럽고.
“지금까진 장난, 딱 그렇게 생각하세요. 인간인 다정 씨는 훨씬 고되고, 힘들고, 더럽고, 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신나고, 대단하고, 명예로운 일들을 하게 될 거예요. 다정 씨, 제 계획에 참여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또한 너무나 위험했으며.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데요?”
“헌터들과의 대립은 당연, 이계인들과의 마찰도 염려해야겠죠. 어쩌면 세계 정부와도 척지게 될지도 모르죠. 문제는 이것들은 ‘1단계’ 위험, 너무나 강대한 존재들이라 서로를 견제하여 아직까지 지구로 넘어오지 못하는 존재들, 또한 드래곤의 왕마저 우릴 방해하려 들지 모른다는 거예요.”
쉽게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었고.
“오… 그러니까 평범한 회사로 따지면 지금까진 프린트나 복사하던 인턴이 영업 사원, 아니 큰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팀장급 일을 하게 된다는 건가요?”
“하핫, 팀장급이라뇨. 하는 일은 둘째치더라도 중요도로 따지면 대기업 회장급인데.”
단언컨대 내게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택은 빨랐다.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대답은 쉬이 나왔다.
“좋아요.”
일의 중요도와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고, 무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난 ‘백화점에서 비싼 옷을 사고, 한 피스 2만 원짜리 초밥이나 사 먹으며, 여자 친구 있는 남자 따위를 부러워하는’, 그러한 인생보다 더 대단한 삶을 살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하자, 원장님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손을 휙휙 저었다.
그러자 마물 우리에 들어간 것처럼 공간이 무너지더니 이내 작은 문이 생겨났다.
저게 용들만이 사용한다던 아공간인가?
원장님은 공간의 문을 열고 무언가를 꺼냈다.
꽤 근사한 검정 턱시도였다.
“아주 오래전, 상상도 할 수 없을 옛날부터 존재해 왔던 용과 용을 지키는 존재의 계약. 용을 보좌하는 자들을 우린 ‘가디언’이라 부르죠. 지금은 쉰내 나는 풍습이라며 아무도 지키지 않지만, 다정 씨. 난 옛것이 좋더라고요.”
그녀는 지금까지 지내오며 처음 보는 표정(어쩌면 약간은 수줍어하는)이 되어 내게 턱시도를 내밀었다.
“나의 가디언이 되어 줄래요?”
덩달아 나도 감정이 이상해지며, 내 몸에 딱 맞추어 제작한 게 분명한 턱시도를 받아들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내 가디언이야.”
그녀와 보다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용의 가디언이라,
분명 내 삶은 확실히 특별해졌다.
*
“앞으로 출장 갈 땐 턱시도를 입어요.”
올 블랙, 다크 슈트다.
보타이는 빨간색으로 전형적인 턱시도다.
입어 보니 맞춤 양복인 듯 딱 맞다. 꽤 근사한 옷이라 기분은 좋았으나, 원장님의 말이 거슬렸다. 그녀는 내게 출장 갈 때, 이 복장을 갖추라고 부탁했다.
문제가 상당히 많다.
이 멋있는 옷은 대부분 결혼식장 갈 때나 입지, 평상복으론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출장이라면 대부분 마물과 연관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례들을 생각해 보면 이런 옷을 입고, 샐러맨더에게 불을 먹이거나, 똥구멍으로 거미줄을 쏟아 내거나, 고양이 흉내를 내며 먹잇감을 쫓는 건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다.
“꼭 이걸 입어야 하나요? 그냥 평범한 셔츠와 청바지를 입어도 되지 않을까요?”
“다정 씨는 용의 가디언, 그에 맞는 격식을 갖추어야 해요.”
“옷 하나 입는다고 뭐 달라질까요? 오히려 이상한… 아, 아닙니다.”
투정은 아니었으나 불만이다.
하지만 말하던 난 굳은 표정으로 날 보는 원장님 때문에 재빨리 수긍해야 했다.
내 말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원장님은 냉기를 술술 풍길 만큼 시린 표정을 지었다.
원장님은 미인이나 예쁜 꽃이라기보다 세련되고 날카로운 검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무표정일 때면 정말 무섭다.
“거울 봐요.”
냉큼 봤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남자.
‘난가?’
옷이 날개라더니.
얼굴이 훨씬 잘생겨진 건 아니나, 단순히 턱시도를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품격이 느껴졌다. 복장이 중요하긴 하구나.
“평범한 턱시도가 아니에요. 제가 말한 품격은 겉만 아니라 속도 포함하는 것, 포근이와 교감해 봐요.”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했다.
포육실에서 얌전히 자고 있던 포근이를 데리고 와 불꽃 모유를 먹였다.
“어라?”
그러자 빨간 ‘검’과 ‘권총’이 생겨났다.
검과 권총은 허리춤에 집과 함께 혁대에 매어 있었다.
너무 뜬금없이 생겨난 터라 어리둥절할 뿐이다.
“다정 씨가 포근이와 교감하면, 샐러맨더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죠. 턱시도는 그 기운을 낭비 없이 응축시켜 이차적으로 가공시켜요. 샐러맨더의 기운은 화(火)기를 가지나, 해치는 성질이 아닌 품는 성질이니 그 자체만으론 살상력이 없어요. 하지만 응축하고 가공한다면 충분히 약한 마물이나 인간 정도는 제압할 만큼 힘을 뿜어낼 수 있어요. 검과 총은 인간의 무력을 상징하는 도구니 둘 다 만들어 봤는데 편하실 대로 사용하세요.”
“오…….”
과연 용이 만든 턱시도다.
난 총을 빼 들었다. 총! 사파리 투어를 하기 전에 마취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있다.
난 총잡이에 대한 로망이 있다. 총이 가지는 범법적인 문제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단순한 이유였다. 어릴 적 고아원에서 상영했던 황야의 무법자. 대체 고아원 원장은 무슨 생각으로 자라나는 어린애한테 피가 낭자한 웨스턴 무비를 보여 줬는지 모르겠으나, 일요일마다 같은 영화를 상영하여 수십 번이나 봐 왔다.
주인공은 권총 두 자루로 자유롭게 살며, 정의를 지켰다. 멋있지 않는가?
전신이 불그스름한 권총에는 드래곤(아마 원장님을 형상화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어, 장식용 권총처럼 멋있었다.
“이 총, 총알도 장전할 수 있어요?”
괜히 쏘는 시늉을 하며 폼을 잡자, 원장님이 씩 웃으며 말했다.
“방아쇠 당겨 봐요.”
내가 놀랄 줄 알았던가?
아니,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드래곤이 방아쇠를 당기라고 했겠는가, 믿을 순 없지만, 난 이미 총알 없이도 권총이 발사되리란 걸 눈치챘다.
콰앙-!
하지만 파괴력은 예상하지 못했다.
관리실의 콘크리트 벽이 깔끔하게 뚫려 버린 것이다.
직경 30cm 정도의 구멍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원장님에게 말했다.
“대박이네요.”
“다정 씨라면 좋아할 줄 알았어. 그 총은 다정 씨의 기운을, 정확히 말하면 샐러맨더와 교감한 다정 씨의 기운을 이용하기에 기운이 바닥나기까지, 총알은 무한정 쏠 수 있어요. 그뿐만 아니라 턱시도의 기능으로 샐러맨더의 기운뿐만 아니라 다른 마물의 기운도 정제하여 담을 수 있으니, 앞으로 다정 씨가 교감할 마물에 따라서 쓸모가 많을 거예요.”
“오오.”
마물원 직원 A에서 가디언으로 진화했더니 무력치도 늘어났다.
턱시도의 기능은 그 외에도 많았으나 신경 쓰이는 건 하나였다.
원장님은 빨간 보타이를 두 번 만지면 저절로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되어 머리에 덧씌워진다고 하였다. 즉, 가면을 써야 할 상황, 정체를 숨겨야 할 상황을 대비해 두고 이런 기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뭐,
신난다 야호.
*
승진 기념, 며칠 동안 휴가를 받았다.
빈둥빈둥 놀고 있을 때 예전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 아직도 백수야?
-같이 일하자니까.
-다정아, 씹지 말아 봐. 긴히 부탁할 게 있다.
그는 애견 콘테스트를 진행하던 양반이었다.
*
마지못해 메신저를 켠다.
-석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밥 먹고 있어서 답장 늦었어요. #배시시웃는이모티콘
대기업, 혹은 그에 걸맞은 명성을 가진 ‘진짜’ 회장님은 아니다.
다만 그는 회장님이라 불리는 걸 좋아했다. 애견 콘테스트 등 애완동물과 관련한 행사를 주관하는, 상업적인 성질을 띤 모임의 협회장이다. 하지만 나름 업계 유명 인사였고, 본인도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석동팔 아저씨, 예전에 동물 사료 협회가 주관하는 애견 콘테스트에서 일하며 알게 된 사이다. 그다지 친한 사람도 아니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동물을 밥벌이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물론 그 자체만으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난 그렇게 위선적인 사람은 아니다. 애견 콘테스트나 펫 숍, 펫 카페… 용납할 만하다.
적어도 그는 강아지 공장은 운영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불편함을 넘어서 그가 상당히 꺼려지는 건 내 능력에 기인했다.
‘그래도 잘 대해 주셨는데.’
연락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저씨의 계속되는 부탁에 용건이나 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답장을 보냈다. 당연히 내 능력에 관련된 용건이겠지만, 의리로 한번 도와줄 수도 있지. 애견 콘테스트는 내게 이래저래 스트레스고, 지금은 굳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돈도 충분하나, 석동팔 아저씨는 내 능력을 유일하게 인정해 준(원장님을 만나기 전까진) 사람이었다.
예전에 경마에 잘못 이용했다가 조폭(능력을 각성한, 그래서 감히 대들지 못한)들에게 쳐 맞아 가며 노예 짓을 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그가 내 능력을 인정하고 두둑하게 월급을 챙겨 줄 때 얼마나 감동했는지.
-오! #활짝웃는이모티콘. 다정아! 잘 지내냐? 저녁에 시간 되니? 항상 회식하던 고깃집에서 만날까? 소고기는 좀 그렇고, 돼지고기 정돈 배 터지게 사 준다.
-요즘 제가 상당히 바쁩니다만, 그래도 아저씨니까 원래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만나드리죠.
-ㅋㅋ 거짓말하지 마, 너 친구 없잖아.
-#화내는이모티콘. 안 가요 ㅅㄱ.
-일단 와 봐. 이번 건은 대박이야. 잘 풀리면 나 진짜 회장님 될 수도 있다.
아저씨와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늘 먹던 돼지고기와 소주, 단순하게도 아저씨에 대한 의리는 순전히 이 두 개의 음식에 대한 것이었다. 짐승도 밥 주는 사람은 기억하는데, 내게 밥을 사 주던 사람을 어찌 무시하리오.
근황을 이야기하며, 내가 한 달에 1억을 벌게 되었다고 하자 당연히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진담이든 농담이든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상관없었기에, 50대 아저씨의 젊은 척하는, 혹은 유쾌한 척하는(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재미없다.) 농담에 맞장구를 쳐 가며 허풍선 대결을 했다.
결국 난 아랍 부자와 결혼하여 32번째 첩이 되었고, 그는 한국에서 불법 유통되는 위험한 마물들을 관리하는 비밀스러운 암흑가의 주인이 되었다.
“농담 아니다.”
“나도 농담 아닌데요. 아, 아랍 부자랑 결혼한 게 아니라 월 1억 버는 거요.”
“인마, 조용히 하고 들어 봐.”
아저씨는 농담이 아니라고 했다.
소주 한 잔을 쭉 들이켜더니, 내 능력이 꼭 필요하다며 이야기의 운을 뗐다.
“이번엔 특별한 일이야. 개새끼나 관리해 주는 일이 아니라고. 네 능력이 꼭 필요하다, 다정아.”
“뭔데 그래요?”
“마물 콘테스트가 열린다.”
“오잉? 마물요?”
“쉿! 조용히 말해.”
마물이라니?
불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