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공주
“송구하오나 시간이 부족합니다. 영주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해결하셔야 하니 얼른 앞장서도록 하지요.”
드왈로프가(家)의 집사는 레프러콘과의 전쟁을 반대하며, 용을 도와주는 협력자였다.
드워프들은 레프러콘과의 전쟁 준비로 한창 바쁘다고 했다. 이 틈을 타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마물을 찾아야 했다.
“이곳으로 오시지요.”
집사 드워프는 오두막집의 난로 사이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난로 뒤편이 뻥 뚫려 있다. 하지만 성인 남성이 지나가기엔 무척 좁아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기어가야 했다.
비밀스러운 통로를 통해 지나가야 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앞서 가는 늙은 드워프(멧돼지와 오래된 죽을 반반 섞어 놓은 것같이 생긴)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보면서 좁고 더러운 공간을 엎드려서 가는 건 꽤 불쾌한 일이었다.
고개를 추켜들 때마다 씰룩거리는 엉덩이가 보인다. 괜히 찔러 보고 싶네.
그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야옹이가 가랑이 사이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나 대신 집사 엉덩이를 발톱을 세워 쿡쿡 찔러 댔다.
그 뒤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뒤돌아보는 야옹이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고양이는 요물이라더니 내 속마음을 읽은 거니? 그래도 너무 쓸데없는 짓을 했잖아.
다행히 집사 드워프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상당히 어색할 뻔했어.
“쓰읍, 관절염 오겠네.”
십 분이 지나자 관절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난 뒤뚱뒤뚱 걸어가는 집사에게 물었다.
“저기, 집사님. 무릎이 너무 아파 와서 그런데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용의 가디언이시여, 곧 도착하오니 부디 제 엉덩이를 건들지 말아 주시옵소서.”
“제가… 아니, 죄송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엉덩이 관리를 참 잘하셨네요.”
“드워프는 대부분 오리 궁둥이이지요.”
‘날 뭐라고 생각할까?’
궁둥이를 탐하는 남자?
젠장.
민망함을 꾹 참으며 한참을 기어갔을 때, 마침내 통로의 끝이 나왔다.
드워프 집사는 익숙하게 낡은 벽면에 감춰진 도르래 장치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위장된 벽이 저절로 개폐되며, 어두운 굴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사는 바깥으로 나가 주위를 살피더니 내게 나오라며 손짓했다.
“주변은 안전합니다.”
뿌두둑!
굴에서 나오자마자 허리를 쭉 펴고 스트레칭을 했다. 관절의 마디마디마다 듣기에도 시원한 소리가 난다. 뻐근함이 어느 정도 풀리자 주변을 둘러봤다. 이곳이 드워프의 성이구나.
“화려하네요.”
긴 복도, 벽마다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그림과 장식들. 샹들리에.
옛 시대의 귀족스러운 분위기다.
하지만 드워프의 성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특별한 물건들도 있었다.
각종 마도구.
마나가 늘어나며, 난 마나의 기운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성의 복도는 단지 고풍스러운 것만이 아니었다. 장식들은 마나가 깃든 마도구고, 그림들도 비범한 기운을 풍겼다.
“드워프는 미(美)를 찬미합니다. 실(實)을 추구하는 레프러콘과 정반대이지요.”
드워프와 레프러콘들은 신비한 물건들은 만든다. 하지만 외부인은 모르는 두 세력 간의 차이가 있는 듯했다.
“드워프와 레프러콘이 마도구를 만드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익히 들었어요.”
집사는 내 물음에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드워프와 레프러콘 간의 갈등에 대한 견해를 말했다.
“우리들은 야누스의 의지를 담아 도구를 만듭니다. 야누스는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도구와 쓰임을 창조했다고 하지요. 비록 다른 이면을 섬기나 레프러콘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니, 저로선 뿌리가 같은 신도끼리 어찌 이리도 싸우는지 이해를 못 할 노릇입니다.”
모든 드워프가 레프러콘을 증오하는 건 아니구나. 그들은 같은 신을 믿는다. 단지 ‘안쪽의 야누스냐, 바깥쪽의 야누스냐’의 차이일 뿐이다.
“실례되는 질문인데,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사님 말처럼 저 또한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야누스라는 신이 결국 같은 신이면 드워프나 레프러콘이나 그냥 같은 신도가 아닐까요? 이렇게 갈등하며 싸우는 이유가 꼭 종교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 민감하게 받아들인 질문, 하지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예상과 달리 내 질문에 전혀 난감해하지 않았다.
집사는 대답 대신 질문을 했으나 난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종교에도 비슷한, 아니 우리들보다 훨씬 갈등이 깊은 종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있다.
아주 유명한 종교.
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했고 집사는 싱긋 웃으며 날 공주의 방까지 안내했다.
“이곳입니다.”
그는 한 가지만을 당부했다.
“실패하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공주님에게 헛된 희망만은 심지 말아 주십시오.”
고급스러운 원목의 문이 열리자 전형적인 핑크색 ‘공주풍’ 방이 나왔다.
“립스 집사! 난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침대의 캐노피에 가려진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
솔직히 말해 상당히 궁금했다.
물론 공주라서 ‘기대되는’ 궁금함은 아니다. 드워프 공주기 때문이다. 대체 드워프의 공주는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자 충격적인 비주얼만 아른거릴 뿐이다.
“용의 가디언이십니다. 루링을 찾게 도와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난!”
캐노피를 거칠게 재낀 드워프 공주는 날 보곤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인간… 이잖아요?”
“특별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분명 루링을 찾…….”
“정말, 필요 없다니까요.”
공주는 답답한지 버럭 화내며 다시 캐노피를 펼쳤다.
난 지금 두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하나는 공주의 생김새가 상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드워프들이 아무렇게나 구워 만든 진저 쿠키 같다면, 저 조그마한 여자애는 달콤한 설탕 장식이 한가득 올려져 있는 고급스러운 케이크 같은 느낌이었다. 상상과 완전히 달랐다. 한마디로 사랑스러운 느낌이다.
두 번째는 공주의 태도였다.
분명 루링이라는 애칭은 집사가 붙인 게 아닐 것이다.
‘미묘한걸.’
드워프 공주는 자신이 아끼던 마물에게 ‘루링’이라는 애칭까지 붙여 줬다. 그런데 마물을 찾아 주려는 내 도움이 필요 없다고?
의심스럽다.
소녀의 태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마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경우, 애칭까지 붙인 건 그저 곰 인형에게도 ‘푸우’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라서.
아니면 굳이 찾을 필요가 없는 경우. 즉 이미 소녀는 마물의 위치를 알고 있어서.
전자면 골치 아프지만, 후자면 얘기는 쉬워진다. 알아보기 위해선 일단 이 아이의 환심을 사는 게 우선이겠지.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드워프 집사가 떠나고 방엔 공주와 나만이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돈다. 딸은 없지만 왠지 사춘기 소녀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간다면 이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어린아이랑 친하게 지내는 방법은…….’
솔직히 말해 어린아이는 싫다. 남자아이라면 그나마 괜찮은데, 여자아이라면 더더욱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거리를 좁히자.’
난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캐노피 뒤의 그림자가 움찔거리며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공주는 날 심히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일단 어린애랑 친하게 지내려면 어린애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어린애가 좋아하는 관심사로 경계심을 푸는 게 좋겠지.
난 어린이의 친구, 30년 째 장수하는 초거물 캐릭터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안녕? 아저씨랑 이야기 할래? 뽀로롱 좋아하니?”
묵묵부답이다.
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 있다. 요즘 대세는 펭귄이 아니라 자동차로 넘어갔다고.
“혹시 타여라고 아니? 아저씨도 차 좋아하는데.”
캐노피 너머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소녀가 내 말에 반응하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역시 대세는 타여다. 이제 경계를 허물었으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다가가…….
“저기요. 아저씨, 나 17살이거든요?”
캐노피를 젖힌 공주는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한심하다는 듯이 날 쳐다보는 게, 자신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헛된 수작 부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생긴 것만큼 어리진 않구나.”
이종족은 나이 구분이 어렵다.
특히 그녀는 키가 1m 남짓에다가, 얼굴이 풋사과처럼 작고, 이목구비가 올망졸망해서, 내 눈엔 귀여운 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첫 단추는 잘못 꿰었지만 일단 꿰긴 했다. 드워프 공주는 다시 캐노피를 펼쳐서 침대로 숨지 않았던 것이다.
17살, 17살이면 무엇을 좋아하더라?
“혹시 아이돌 좋아하니? 투러브스?
“그게 뭔가요?”
그녀는 전혀 관심 없어 했다.
17살 소녀라는 것만으로도 대하기 벅찬데 드워프라는 이종족이며, 이종족 중에서도 공주라는 계급이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소녀의 작은 손이 다시 캐노피를 향할 때, 난 다급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기초부터 다지자.
“아저씨 이름은 정다정이야. 넌 이름이 뭐니? 아니, 공주님이니까 반말로 하면 안 됐었나? 공주마마께선…….”
“됐어요. 진짜 공주도 아닌데요. 그냥 주변에서 공주라고 부르기만 하면 뭐 다 공주인가? 내 이름은 드왈로프 라도부 제시 플라워 페나티어 칸 어쩌고저쩌고 뭐시기 뭐시기, 중간 이름만 40글자는 되니까 그냥 제시라고 불러요.”
그녀는 날 두 번 놀라게 했다. 하나는 예상되지 못했던 외모, 그리고 외모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격.
말투로 보면 꽤 세속적인 성격 같다.
“아저씨가 드래곤님의 가디언이시라면서요? 듣기론 가디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마녀조차 두려워하는 기묘한 힘들을 지니고 있다던데, 아저씨는…….”
제시가 대화를 받아들인 건 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인간 정다정이 아니라 드워프 집사가 날 드래곤의 가디언이라고 소개한 까닭이다.
“왜……?”
“하하. 짧은 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구나.”
겉보기엔 난 평범한 남자다.
사실, 진짜 평범하기도 했다. 마물과 교감하기 전엔 그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나가 5등급으로 높아졌긴 하지만, 결국 발현되는 능력은 교감이었으니까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겠지.
“내겐 특별한 능력이 있지. 지금까지 드래곤도 수차례 놀라며, 내 도움을 간곡하게 요청할 만큼 특별한 능력이.”
“어떤 능력인데요?”
“마물의 말을 들을 수 있어. 물론 동물하고도.”
“와아…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소녀는 전혀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시큰둥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게 물었다.
“그렇다면 말을 걸 수도 있어요? 대화도 가능해요?”
“당연히. 왜, 마물에게 관심이 많아?”
넌지시 떠본다.
소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의심은 점점 후자로 기울여졌다. 역시 그녀는 알고 있는 것 같네.
“특이한 아이네. 좋아. 뭔가 대화해 보고 싶은 마물이라도 있어? 아저씨가 대신 속마음을 알려 줄게.”
순간 고민하던 제시는 방금 전까지 기대하던 표정을 싹 숨기고 정색까지 했다. 이내 캐노피를 펼치고 침대 이불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대화 즐거웠어요. 자고 싶으니 나가 주세요.”
축객령에 잠자코 팔짱을 끼고 바라봤다. 녀석이 마물을 좋아하는 건 짧은 대화로도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 증거는 없으나 난 확신했다. 분명 제시는 오리하르콘 찾는 돼지 마물을 숨기고 있는 거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찾는 게 우선이겠지.
“기다려 봐.”
제시의 방을 나온 난 드워프 집사를 불러 다시 통로로 향했다. 다시 한 번 무릎이 아작 나는 경험을 해야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통로를 지나 성 바깥으로 나온 난 해안가로 달려가 원장님을 호출했다. 그녀는 공간 이동 마법으로 순식간에 도착했다.
(순간, 공간 마법으로 그냥 성에 데려다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으나 말하진 않았다.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게 날 골탕 먹이려는 장난일지라도.)난 원장님에게 할 일이 있다며 잠시 마물원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마물원으로 돌아오자마자 난 마츄 몇 마리와 나름 귀엽게 생긴 마물들을 데리고 나왔다.
“어머! 뭐하시게요?”
“인터넷 뉴스에서 봤는데 동물을 좋아하고 아끼는 남자는 여자들이 좋아한대요. 공원에서 개랑 산책하다가 여자랑 눈 맞는 경우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래요.”
“공주의 환심을 살려고요?”
“네.”
“그렇다면 푹신하고 맛있는 과자를 준비해 드릴 테니까, 그 아이에게 선물해 주세요. 드워프니까 분명 좋아할 거야.”
원장님은 날 저택으로 순간 이동시켜 줬다. 아니, 진짜 이럴 거면 처음부터 암구호 따윈 필요 없었잖아?
손에 과자를 잔뜩 들고 마물들을 이끈 채 공주의 침실 문을 열었다.
“제시! 널 위한 선물이야.”
선물이라는 말을 싫어할 사람, 아니 종족은 없다.
캐노피가 걷히고, 시큰둥한 표정의 제시가 나온다.
“으에엥? 이게 뭐예요!”
시큰둥하던 제시는 호들갑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손에 들린 과자와 케이크를 발견하고 괴상한 추임새를 하며 벅차하더니 내 바짓가랑이에 매달린 마츄를 보며 까르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마음껏 먹어!”
역시 달콤한 것과 귀여운 것의 조합은 파괴력이 상당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