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달려라 (4)
대체 왜? 혹시 그들은 라이더가 아니라 경비들인가? 팬티만 입고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는 수상한 남자를 ㅤㅉㅗㅈ아내려고?
“야, 같이 가!”
[먼저 가 있을게.]
졸린 듯 반쯤 눈을 감고 걷던 스위프트덕은 날 기다려 주지 않고, 자기 먼저 우리를 향해 뛰어갔다.
단순히 나를 쳐다보는 거라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대면해서 대화라도 나눈다면 나라도 부끄러움이 극대화되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가랑이를 벌리고 걷는 이상한 걸음걸이, 피와 땀으로 젖은 팬티, 수척한 얼굴. 게다가 저들 중엔 아름다운 금발의 외국인 여성도 있잖아.
나는 나를 ㅤㅉㅗㅈ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최대한 빨리 걸었다. 하지만 팔자걸음으로는 그들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마침내 따라잡혔다.
하필이면 금발의 외국인 여성이 처음으로 다가와 내게 말했다.
난 최대한 태연한 척 뒤돌아봤다.
“무슨 일이라도……?”
내 꼴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이겠지만, 그래도 담담한 척했다.
“전 이탈리아에서 온 렐리아 리나입니다. 동료들도 모두 이탈리아의 대표 선수지요.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영어를 쓰긴 하지만 알아듣기 힘든 발음이라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히 경비가 아니었다.
한국에 경기를 치르러 온 외국 대표들이었다. 아마 내 꼴을 보고 당황하지 않는 것도 같은 경험이 있어서가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모른 척 좀 해 주지. 피땀으로 젖은 팬티를 손바닥으로 살포시 가리고 대답했다.
“뭔데요?”
“알아 두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내가 누구라뇨? 정다정인데요. 아, 소속은 한국입니다.”
누구냐고 묻는 말에 멍청하게 이름만 말했다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를 깨닫고 한국 소속의 라이더라고 대답했다.
아직 한국은 대표 선수를 뽑기 위해 예선전을 치르고 있었으니 괜찮겠지. 나도 ‘참가할’ 생각이니까.
그녀는 내 대답에 곰곰이 생각하는 듯 금발의 긴 머리를 매만지다가 말했다.
“한국의 라이더… 다른 선수들은 알지만, 당신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굉장합니다.”
그녀가 말하자 뒤의 다른 외국인 선수도 동조하며 이상한 발음으로 ‘엑설런트’ 나 ‘판타스틱’ 따위의 칭찬을 했다.
난 어리둥절했다.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그때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내려 내 사타구니를 쳐다봤다. 땀에 젖어 해녀복처럼 딱 달라붙은 팬티 때문에 하체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으음, 이거요?”
설마 팬티 너머의 ‘그 존재’를 눈치라도 챈 건가? 전이 이후로 세상이 미쳤다지만 요즘 외국인들은 첫 만남에 거시기 칭찬하는 게 유행인가? 아니, 이탈리아라면 가능성이 있겠어.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였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경험해 본 적 있습니다. 바람에 삼켜져 주변이 보이지 않는 경험, 그래서 알아차리지 못하셨군요.”
그러곤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전광판이었다. 기록 재는 게 꽤나 재밌어서 트랙을 돌 때마다 입력했었지.
[2분 10초]
시간 기록.
그리고
[74t]
총 74바퀴.
외국인 선수들이 칭찬한 건 팬티 너머 거시기 따위가 아니었다.
내 기록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와우!”
덩치가 큰 빡빡머리 서양인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기분 나쁘게 건드리는 게 아니라 마치 격려하는 듯했다.
대머리가 말한다.
“당신, 70바퀴 이상을 돌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돌아도 50바퀴를 채우기 힘든데 말이야. 게다가 2분 10초라니, 이 임시 트랙의 최고 기록이야! 그것도 차등과 1분이나 차이가 나다니.”
다른 외국인들도 말을 보탰다.
“트랙을 도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거야. 난 귀신인 줄 알고 친구들을 불렀지 뭐야.”
“미안해. 당신, 한국 팀의 비밀 병기인가 보군. 아마 들키지 않기 위해 새벽에 연습한 모양인데, 염탐할 생각은 없었어.”
난 오늘 처음 탔는데.
칭찬에 무안해져 고개만 끄덕일 때였다.
“그러니 말해 줄게. 우리 최고 기록은 ‘1분 후반대’ 야.”
“단! 자기 기록을 왜 말해?”
“괜찮아. 이건 공공연한 비밀인걸. 안 그래, 리더? 한국 팀도 이미 그걸 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러니 저런 기록이 나오지.”
리더는 금발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날 칭찬했지만, 난 그녀의 말투에서 단지 칭찬을 하기 위해 날 부른 게 아닌 ‘경고’ 때문임을 눈치챘다.
“제가 놀란 건 기록보다 70바퀴 이상을 돈 근성이었습니다. 좋은 대결이 될 것 같네요.”
번역하자면 ‘네가 좀 대단한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내 상대는 안 돼.’쯤 되려나.
그녀는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하고 동료들과 트랙의 대기실로 향했다. 물어볼 게 있었으나 팬티 차림으로 계속 대화를 나누기도 뭐해서 ‘아리베데르치!’라고 작별 인사를 해 줬다.
“다음에 봐요. uomo sospetto(괴상한 남자).”
난 영어는 어느 정도 해도 이탈리어는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모… 뭐라고?
아직까지 아픈 가랑이 때문에 어기적어기적 숙소로 향하며 생각했다.
“1분대 후반이라…….”
전광판에는 74바퀴, 2분 10초가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74바퀴가 아니라 100바퀴 이상이다. 74바퀴 이후로는 귀찮아서 기록하지 않았으니까. 그 두 배쯤은 돈 것 같은데?
그리고 2분 10초의 기록도 74바퀴를 돌았을 때 기록한 것이다.
확실하건대, 그 뒤의 기록은 2분 10초보다도 빨랐다. 1분 후반대쯤은 나왔겠지.
‘우승, 시켜 줄까?’
원장님이 왜 내게 3주간의 출장을 명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길어도 일주일이면 조사가 끝날 텐데.
“마물 경기는 3주 동안 진행되지.”
욕심이 난다.
나라면 가능할거야.
녀석도 가능하겠지.
우리 둘이면 우승 정도야 쉽다는 얘기다.
*
숙소로 돌아온 난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웠다. 마치 치질 수술이라도 한 듯 어정쩡한 자세로 말이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가랑이가 너무 쓰려서 그럴까?
‘또 달리고 싶다.’
아니, 붉게 피멍이 든 내 가랑이 따윈 아무 상관 없다.
나는 멍청하다고 생각하던 녀석들과 같아졌다. 망할 놈의 교감, 이래선 스위프트덕들과 다를 바 없잖아. 달리고 싶다. 텅 빈 내 마음을 바람으로 채워 넣고 싶어.
*
다행인 건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나절 자고 나니 가랑이는 금방 나았다.
곧바로 스위프트덕 우리를 찾았다. 아침엔 지쳐 있던 녀석이 지금은 활력이 넘쳐 여전히 뛰어다니길 원하고 있었다. 어제, 밤새 100바퀴 이상을 뛰어다녀 놓고 말이다.
[왔어!]
확실히 태도가 달라졌구나.
첫날처럼 시큰둥하게 굴지 않았다. 녀석을 날 보자마자 후다닥 뛰어와 노란 주둥이를 얼굴에 비비적거리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친구.]
“인간은 시종이라며?”
[넌 달라. 내 등에 태운 녀석들 중에서 날 이해해 주는 건 너밖에 없었어.]
녀석은 날 마음에 들어 했다.
달리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이 교감으로 인해 달리는 걸 좋아하게 된 나를 신뢰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야.”
그래, 난 스위프트덕을 이해했다.
그러니 녀석의 욕망도 이해한다.
“우승하고 싶어?”
끼엑!
[당연하지!]
물어볼 것도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승시켜 줄게.”
내 말에 녀석은 푸르륵 콧바람을 뀌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은 똑바로 해. 내가 우승시켜 주는 거지.]
나도 픽 웃으며 녀석의 날갯죽지를 머리카락 헝클이듯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좋아. 우리 같이 우승하는 걸로 하자.”
[뭐, 그 정도면 괜찮지.]
오늘 아침에 만났던 이탈리아 선수들처럼 외국에서 참가한 선수들은 이미 자국에서 뽑힌 대표 선수이다. 한국은 아직 예선전을 치러야 한다.
내일부터 열리는 한국 대표를 뽑는 전국 대회, 그 뒤로 세계 선수권 본선이 열린다.
“그전에 몇 가지 해결하고 올게. 어제처럼 저녁부터 달리자고.”
[빨리 와! 빨리! 빨리!]
우리에서 나와 원장님에게 전화를 걸며 사무실로 향했다.
“원장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 걱정 말아요. 이미 다 준비해 놨으니까.
“네? 제가 뭘 부탁할 줄 알고…….”
전화를 받은 원장님이 내가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준비해 놨다고 말한다.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전화기 너머,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간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재밌어하는지, 뿌듯해하는지 헷갈리는 눈빛을 하고 있겠지.
조사를 위해 임시 출전서는 제출한 상태였으나 다른 부과적인 서류들이 필요했다.
그런데 원장님은 내가 경기에 출전할 걸 미리 예상하고 정확히 오늘 날짜, 그것도 내가 사무실로 가기 바로 전에 필요한 모든 서류들을 보충해서 보내 놓은 것이다.
“소름 돋아.”
드래곤, 역시 무섭구나.
나는 일단 경기를 주관하는 회사로부터 ‘조련사’의 자격으로 초빙을 받았지만, 선수 자격으로 경기에 참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백(드래곤)을 이용하여 예선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예선전은 며칠 뒤에 열렸다.
한국 대표를 뽑는 경기라서 본경기장이 아닌 연습 경기장에서 열렸다. 몇 주 동안 진행되는 본선과 달리 단 세 번만 열리는 경주.
‘우습지.’
경기가 열리고,
난 세 번 연속 1등을 차지하며 네 명의 대표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처음부터 당연하다고 예상했다. 트랙에서 연습한 첫날부터 신기록을 냈는데 어떻게 지겠는가?
‘혼자 달리는 것과 경쟁은 많이 달랐어.’
하지만 우승까지 쉬울 것이란 생각은 경기 후에 고쳐야 했다. 차등하고 많은 격차를 내며 우승하긴 했지만, 경쟁하며 서로 투닥거리니 홀로 트랙을 도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다. 특히 스위프트덕들은 달리는 것밖에 몰라 경주마와는 달리 서로 몸싸움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탈리아 대표 선수가 1분 후반대라고 했던가?’
나와 비슷한 기록.
하지만 그들은 베테랑. 몸싸움까지 염려한다면…….
그래도 자신이 있다.
예상보단 힘들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베테랑이라고 하더라도 난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다른 기수들이 스위프트덕에 도움을 보탠다고 한다면, 난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도움을 준다고도 볼 수 있다.
어차피 우승은 나야.
다른 애들은 다 껌이지.
내가 최고, 세계 최강이다.
챔피언으로 군림할 존재다.
빨리 우승을 하고 챔피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
“뭐?”
문득 깨닫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젠장, 녀석과 교감했더니 자만하는 것도 닮아 가는 건가?”
교감을 나누는 건 좋지만 너무 깊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중2병이 될 뻔했어.
*
예선을 치르고 여러 절차 때문에 사무소에 들렀다. 난 한국 대표 선수로 등록되었고, ID카드와 유니폼을 지급 받았다.
“스폰서 회의가 오후에 있을 예정입니다. 쉬고 계세요. 나중에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팀장의 말에 알았다고 답하고 사무소를 나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난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사무소로 돌아가야 했다.
본경기인 세계 선수권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사무소는 북적거렸다. 대회에 기업뿐만 아니라 길드와 관광청까지, 많은 이권이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새끼들까지 관련되어 있다니.
‘카르마 길드.’
그 새끼들을 본 건 우연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검은 정장을 입은 동양인들. 평범한 샐러리맨과 풍기는 기운과 어딘가 달라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의 옷깃에 그려진 카르마 길드의 문양인 ‘업’ 표식을 발견했다.
온갖 더러운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카르마 길드. 선상 마물 경매장도 마물 콘테스트장도 놈들이 주관했었지.
내가 경험한 바로는 아직 이 경마에 불법적인 일들은 없었다.
‘주의해야겠어.’
하지만 카르마 길드가 관련되어 있다면 꺼림칙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