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달려라 (5)
그날 오후,
한국 기업들과 스폰서 상담을 나누고, 이래저래 원장님의 도움으로 귀찮은 서류 업무들을 해결한 뒤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 다시 녀석들을 보았다.
빡빡머리 동양인 남자 세 명이 손에 검은 서류 가방을 든 채로 다른 회의실에서 나온다.
“오늘 저녁에 만찬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정다정 기수님은 참가해서 그냥 회장님과 의원님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난 팀장의 말을 끊었다.
“나중에 얘기해요.”
“네? 아, 피곤하시죠? 그럼 만찬회 시작 두 시간 전쯤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느새 내 매니저가 돼 버린 김명준 팀장을 떨쳐 내고, 야외 주차장으로 향하는 카르마 길드의 남자들을 미행했다.
카르마 길드원들이 풍기는 마나가 심상치 않다. 꽤 강한 능력자로 보이나 놈들은 미행하는 날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안을 볼 수 없도록 진하게 선팅된 밴에 서류 가방을 실었다. 그러고는 다시 사무소로 들어갔다.
밴에는 운전수와 차를 지키는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난 망설임 없이 걸어가 트렁크 안에 실린 서류 가방을 꺼냈다.
그 일련의 과정 동안 남자와 운전수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서류 가방을 강제로 열고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확인하는 동안에도 말이다.
야옹이가 내게 남긴 ‘흔적’ 덕분이었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이다. 아라크네와 황소 마물처럼 굵직한 ‘흔적’이 아니더라도 포근이와 야옹이는 오래 교감한 만큼 내게 어떠한 흔적을 남겼다.
예를 들어 더위를 타지 않는다든가, 지금처럼 원한다면 기척을 지울 수 있다든가.
녀석들이 나보다 마나가 많으면 모를까, 이래 봬도 난 5등급 능력자다.
시선을 피해 능숙하게 서류 가방을 확인했다.
‘돈이로군.’
가방 안에는 빳빳한 새 지폐가 가득했다.
트렁크에는 서류 가방 외에도 가방이 많이 있었다.
세 개의 가방을 더 확인했으나 모두 돈이 들어 있는 가방. 아마 열 개가 넘는 가방에도 모두 돈이 들어 있겠지.
‘몇십억은 될 거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난 인기척을 느껴 재빨리 기척을 감추며 모습을 숨겼다.
주차된 트럭 뒤에 숨어 놈들을 관찰했다. 인기척은 사무실로 들어간 세 명의 남자 것이었다. 그들의 손엔 새로운 가방이 들려 있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돈 가방이다.
‘왜지? 협회에서 카르마 길드에게 돈을 준다고?’
이유를 유추해도 알 수 없다.
카르마 길드에게 돈을 줄 만한 이유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는 녀석들이니.
쓸데없는 짓임을 알고 있으나 차량 번호는 외워 놨다. 녀석들은 다시 몇 번이나 서류 가방을 옮겼고, 일이 끝나자 곧바로 출발했다.
‘발칙하게도.’
딱히 미행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녀석들이 멈춘 곳은 내 시야가 닿는 곳이었다. 손님용 호텔이다.
“한몫 단단히 챙기러 왔구먼.”
잠시나마 저 돈을 빼앗을까 생각한 날 탓했다. 주위 시선을 신경도 안 쓰는지 검은 정장을 입은 카르마 길드원 수십 명이 호텔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을 잠자코 노려보던 난 한숨을 쉬며 숙소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아니, 확실히 빡센 일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에휴.
슬픈 예감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지.
녀석들의 행실을 직접 겪었다.
일단 내 판단만으로 저들을 가만히 놔두기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원장님에게 연락하여 카르마 길드에 대해 알려 줬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처음 부탁한 것처럼 상황을 조사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수상한 점이 있으면 정확히 알아내서 보고하라는 것이다.
내 팔을 잘랐던 카르마 길드의 창잡이가 생각났다. 지금, 내가 놈과 싸운다면 수월하게 제압할 수 있을까?
“귀찮은 일만 벌이지 마라.”
그들이 단지 ‘정직한’ 도박만을 하러 온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는 경기를 치르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될 테지.
*
세계 대회는 기본적으로 ‘국가전’ 같은 느낌이나, 개인 참가자나 다른 외부 세력으로 참가한 라이더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가 대표’가 개인 참가자들보다 혜택이 더 많았다. 나라별로 총 네 명까지 대표 선수들로 참가할 수 있고, 세 명이 떨어지더라도 한 명이 우승하면 영광은 나눠 가지니까 말이다.
그래서 국가 대표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한국 소속인 나와 다른 세 명, 일본 대표 두 명만이 나왔다.
국가 대표는 총 합해서 70명을 넘겼다. 개인 참가자는 열몇 명쯤 된다고 들었다. 게다가 나라 없이 종족을 대표해서 나온 ‘이종족’들도 있었다.
엄청나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월드컵과 올림픽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경마 따위의 수준이 아니네.’
스위프덕 경주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있기에 관람객들도 엄청 많았다.
일단 한국에서 열리니 한국인이 가장 많았지만 그 외엔 대부분 유럽 관람객들이었다.
스위프트덕 경주는 유럽 쪽에서 시작되어 쭉 열풍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승 후보는 모두 유럽 쪽이었다. 전에 만났던 이탈리아 대표도 우승 후보 중에 하나였지?
첫날, 개막식을 치르며 경기 무대가 될 ‘이계 비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계 비경.
비경은 신비롭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계’라는 말이 붙으면, 그 앞에 위험하고 무섭고 두려운 곳이라는 수식어가 더 붙는다.
‘이거 생각보다 더 하잖아?’
이번 경기에 참가하며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느낌이었다.
모든 게 예상을 뛰어넘는다.
이계 비경, 섬 전체가 이계에서 전이한 환경이었다.
마치 원장님의 마물원 우리들이 연상될 만큼 놀랍고 판타스틱한 곳이었다.
마물 경주가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있었다.
나야 이런 환경이 익숙해서 괜찮다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경주든 뭐든 단지 이계 비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감을 만족할 만한 스포츠겠지.
섬에는 ‘트랙’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이정표에 지나지 않았다. 이계 비경의 경이롭고 위험한 환경을 일주해야 했다.
개막식에선 스위프트덕 대신에 개조된 차량을 타고 이동했는데, 천천히 이동함에도 이곳의 무서움을 알 수 있었다.
‘뜨거운 바위’ 따위와 비교되지 않는, 떨어지면 몸이 살살 녹을 게 분명한 용암 지대.
칼날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선인장 지대. 당연히 지구의 선인장보다 백배는 더 크다.
그 외에 소닉을 연상시키던 한 바퀴 트랙은 사실 정말로 있는 지형이었고, 연습 경기장엔 구현되지 않은 장애물도 있었다.
‘마법 트랩.’
이계 비경에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치한 장애물이었다.
절벽에 설치된 일직선 다리 코스, 그 트랙의 양옆에 줄지어 설치된 마도구들.
단지 마나를 바람으로 쏟아 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휩쓸리면 절벽 아래로 밀려 나간다. 바람 마법이라 버틸 수도 없다고 한다.
마도구가 발동되지 않는 때를 노려 한순간에 지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트랙 전체 길이도 연습 트랙보다 열 배는 긴 것 같았다.
전이 전이라면 결코 용납되지 못할 잔인한 경기였으나, 요즘 세상에 이만큼은 폭력적이어야 많은 인기를 누리는 거겠지.
개막식을 마치고 우리를 찾은 난 녀석에게 트랙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렇더라고. 어때? 할 수 있겠어?”
내 질문에 녀석은 곧바로 우리의 천장에 머리를 박을 만큼 점프하더니 버럭 소리쳤다.
끼익!
[당연하지!]
말해 뭐 하겠어.
“내일, 잘 부탁한다.”
[나도! 친구!]
*
본선이 열렸다.
경기는 승점 리그전이었다.
경기마다 1~3등에게 순차적으로 승점을 부여하며, 그 밑의 등수는 승점을 얻지 못한다. 한 경기에 스무 명의 선수가 참여하며, 탈락을 하더라도 ‘볼거리’가 목적인 스포츠라 계속 경기에 참여해야 한다.
관람객의 관점에선 그냥 경마에 지나지 않는다. 승점이 높은 기수들은 배당률이 올라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위프트덕들은 달랐다.
녀석들은 1등의 영예를 가지고 싶어 했다. 나와 같이할 녀석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모두 1등을 차지하기 위해서 모든 걸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첫 번째 경기를 앞두고 출발선에 선 난 확실하게 느꼈다.
‘온도 차이.’
대부분의 라이더들은 스위프트덕들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승점이 높을수록 기수도 많은 돈을 따지만 일단 목숨이 중요한 거겠지.
‘이탈리아 선수들은 제법 교감을 나눈 모양이야.’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위프트덕과 꽤 끈끈히 이어진 라이더도 있었다.
저번에 만났던 이탈리아 대표 팀의 금발 미녀. 그리고 유럽 쪽의 이름난 라이더들. 그들의 스위프트덕들은 라이더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출발선에서 경기를 앞둔 라이더들은 목숨 줄과 다름없는 장비들을 점검하거나, 미디어 매체들과 인터뷰 따위를 나눴다.
미리 스위프트덕에 올라탄 라이더는 나밖에 없었다.
[이긴다. 우리가 이겨!]
[흥, 파리에서 나와 베사체가 1등을 했다고. 기억 안나, 이탈리아 터프가이들?]
‘하, 가지가지 하네.’
난 서로 욕설과 도발을 하며 싸워 대는 스위프트덕들을 보며 픽 웃었다. 다른 이들에겐 끽끽거리는 울음소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난 다 들린다.
[어머, 저 애 좀 봐. 아직 깃털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참가하네?]
[푸흡. 인간도 어리바리를 까잖아. 첫 경험에 저런 인간을 등에 태우다니, 불쌍하지.]
[애송아, 무섭지? 긴장되지? 조심해. 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에 빠트려서 통닭으로 만들어 버릴…….]
나와 이 녀석도 도발의 대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던 난 슬금슬금 다가가서 녀석들에게 조용히 읊조렸다.
“꺼져, 새끼들아. 경기 전에 뒤지고 싶지 않으면.”
[으억! 왜 인간이 우리말을 해?]
난 발길질까지 해 대며 대신 놈들을 ㅤㅉㅗㅈ아냈다. 놈들의 도발에도 녀석은 긴장감 때문에 잔뜩 움츠려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번이 첫 출전인 녀석이다.
긴장할 만도 하지.
“야, 괜찮아? 스위프트덕에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우황청심환이라도…….”
격려하려던 난 녀석의 표정을 확인하곤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도발에 움츠러든 게 아니다.
긴장감에 짓눌린 게 아니다.
녀석은 에너지를 어디다가 쏟아부어야 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만을 기다리는 거야.’
녀석의 가라앉은 기운은 출발 신호와 함께 맹렬히 불타오르겠지.
난 녀석의 등에 올라타 출발을 기다렸다. 날 제외한 열아홉 명의 선수와 스위프트덕도 제자리에 섰고, 사회자의 간단한 소개와 연설이 끝나자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러 퍼졌다.
탕-!
첫 경기.
처음 경험하는 지형.
처음 경험하는 장애물.
하지만.
“좀 더 힘내! 우리가 1등이다!”
[가즈아!]
결승선을 처음으로 넘었다.
전광판에 기록되는 내 이름. 그리고 아무도 내가 1등을 할 줄 몰랐던지,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들. 나는 두 팔을 들고 기뻐하며 야유들을 맞이했다. 천천히 중지를 치켜세우며 말이다.
‘좆 까라 그래.’
뒤에서 달려오는 다른 라이더들, 당황한 표정이 가득하다.
베테랑 라이더라는 건 위조된 신분이다. 사무직에 불과한 김명준 팀장은 속아 넘어갔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 날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첫 출전한 스위프트덕과 처음 보는 라이더에 지나지 않겠지.
하지만 녀석과 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
2주 동안 열리는 대회. 이틀에 한 번 경기를 치르는 빡빡한 일정.
첫 경기에서 1등을 하고, 그 뒤 치른 경기에서도 3위권을 유지했다. 교감의 힘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우리를 제친 선수들도 있었다.
이탈리아, 벨기에, 독일.
모두 유럽 쪽 강자들.
기이함을 느낀 건 네 번째 경기가 끝난 뒤였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이상한 기류가 느껴졌다.
‘날 감시하고 있군.’
숙소로 돌아왔을 때다.
나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난 컴퓨터 모니터의 각도가 살짝 기운 걸 알아차렸다.
‘날 감시하는 거구나.’
누가 내 방을 뒤진 거야.
대회의 다크호스로 부상한 날 경계하는 것.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라도 있는 건가?
불현듯 돈 가방을 옮기던 카르마 길드가 생각나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단순히 경기에만 집중할 때가 아닌 것 같네.”
*
예상과는 달리 마지막 경기를 앞둔 지금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틀 뒤, 드디어 마지막 경기인 결승전이다.
다른 한국 선수들은 모두 탈락하여 나만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승점순으로 스무 명의 선수가 참가하나, 사실상 이탈리아, 벨기에와 독일 그리고 한국 대표 간의 메달 경쟁전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대표 선수로 올라온 금발 미녀하곤 1등을 경합해야 했다.
승점 차이는 단 2점.
1등을 놓치면 우승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