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달려라 (8)
마법의 바람이 우리가 지나갈 동안에는 멎어 들었다. 무엇도 달리는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태풍 같은 바람은 우리에게 닿을 때쯤 산들바람이 되어 천천히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간 곳엔 또다시 맹렬한 바람이 불어와 뒤의 주자들을 따라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다리를 통과했다.
이제 결승선까지 향하는 직선 코스가 남았다. 장애물도, 경쟁자도 없는 평탄한 길만이 남은 것이다.
[미안.]
하지만 녀석은 더 이상 달리지 못했다.
철썩-!
쓰러지는 녀석.
당황하며 일으켜 세워 보려고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몰골이 심각했다.
용암지대를 통과하며 날갯죽지의 깃털이 반쯤 타 버렸고, 도핑 스위프트덕을 따라잡느라 한계를 넘어 달렸기에 피로 하얀 털이 붉게 젖어 있었다.
“다 왔잖아. 힘내.”
눈을 감은 녀석을 격려했다.
녀석은 힘겹게 눈을 추켜 떴으나 다시 스르르 감고 말았다.
[새하얗게… 불태웠어.]
내 힘으로만 장애물들을 통과한 게 아니다. 애초에 녀석이 본래의 힘을 뛰어넘지 않았다면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약물 따위가 아니었다면,
녀석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챔피언이 되었을 거야.
뒤를 돌아봤다.
점점 다른 스위프트덕들도 장애물을 통과하여 우리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한다고?
이대로 실패한다고?
안타깝다.
모든 걸 불태우고 쓰러진 녀석을 바라보던 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곤 냅다 소리 질렀다.
“끼에에엑!”
[아니, 저 선수 진짜 뭡니까? 드디어 실성이라도 한 걸까요?]
[흐음, 유례없는 짓거리입니다. 정말 짓거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스위프트덕과 꼭 닮은 비명을 내지르던 난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에라, 모르겠다.”
녀석은 날 태우고 여기까지 왔어.
그러니 내가 녀석을 태우고 가는 거야.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녀석을 둘러업었다. 황소 마물의 괴력으로 업을 만했다.
힘겹게 결승선까지 걸어갔다.
그러다 뒤에서 독이 오른 채 바짝 ㅤㅉㅗㅈ아오는 렐리아를 발견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차이일 것이다.
내 등 뒤에 선 그녀의 비명을 들으며, 난 결승선을 통과했다.
전광판에 기록된다.
우승, 정다정.
하지만 곧바로 내 이름은 내려가고 렐리아의 이름이 올라갔다.
뭐라 뭐라 씨불이는 해설진들의 말을 들어 보니 난 반칙패를 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웃으며 날 비난하는 관중석과 해설자들에게 중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명예의 시상식에 오른 것처럼 한 바퀴 돌며 세리머니를 했다.
엿을 처먹은 사람들이 더 격하게 비난했지만 난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 다 좆 까.”
내가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에 모든 스위프트덕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때였다.
쓰러졌던 녀석이 일어났다.
그 순간 모든 스위프트덕들이 약에 취해 몽롱한 정신에서도, 기수들의 성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일제히 우리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난 알았다.
이게 챔피언을 향한 녀석들의 예우구나. 존경을 보내는 스위프트덕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녀석들에게 인정을 받았기에, 그럼으로써 녀석은 진정한 챔피언이 되었기에 엿 같은 메달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갈 때 카르마 길드가 날 찾아왔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난 씩 웃으며 턱시도로 갈아입고 무전기를 통해 말했다.
“원장님, 여기 치워야 할 쓰레기들이 있는데요.”
*
그 뒤로 내가 한 일은 없었다.
순식간에 도착한 원장님은 수고했다며 나와 녀석, 둘 다 마물원으로 보냈다.
하지만 카르마 길드가 어떤 최후를 맞이할지는 알았다.
전과 같이, 비참한 최후일 거야.
나와 같이 달린 스위프트덕은 상처가 꽤 깊어 마물원에서 요양하기로 했다.
원장님은 하루 뒤에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상쾌한 모습으로 마물원에 출근했다. 저게 그 말 많던 카르마 길드의 능력자들을 소탕한 모습이라니.
원장님과 회의를 나눴다.
경마 자체의 의도는 좋으나 도핑이나 불법적인 커넥션 등 안 좋은 부분도 많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경기 자체를 폐쇄하는 것보다 규제를 하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이제부터 내가 모든 시설을 관리하게 될 거예요.”
사실 소탕은 ‘10분’ 만에 끝났는데, 그 뒷정리를 하느라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원장님이 관리를 한다는 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인프라를 날름 훔쳐 먹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뭐 어쩌겠는가? 적어도 원장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줬다.
“그나저나 이기셨다고요? 약물로 강화된 스위프트덕들을 상대로 말이죠?”
난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다소 편법을 사용했지만 우승한 건 맞죠.”
원장님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보여 줬다. 작은 통에 담긴 보라색 액체, 카르마 길드가 사용한 약물 같았다.
“확인해 봤어요. 개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이 약물은 생명력을 깎아 힘을 증진시키는 흑마술의 일종이더군요.”
“흑마술요?”
“그러니 평범한 스위프트덕은 아무리 뛰어난 개체라도 결코 약물을 맞은 개체를 이길 수 없어요. 아니, 그 비슷하게 따라가지도 못하죠. 하지만 녹화된 경기를 보니 그 개체는 얼추 비슷하게 달리더군요.”
원장님은 내 힘, 교감을 언급하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꽤 신나 하면서 말이다.
“다정 씨, 어쩌면 다정 씨 능력은 ‘쌍방향’일지도 몰라요. 이건 정말… 굉장하네요!”
“쌍방향이라뇨?”
원장님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포근이의 성장이 다른 개체보다 현저하게 느리다는 거 알아요? 사실 지금쯤이면 성체가 되어야 할 텐데.”
그녀는 보육실에 잠들어 있는 포근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는 포근이는 아직 대형견만 한 크기였다.
“하지만 포근이는 이제 막 유아기에서 벗어난 모습, 역으로 말해서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분명 포근이는 성체가 되면 다른 샐러맨더보다 훨씬 커질 거예요.”
“그게 제 영향 때문이라고요?”
생각난다. 경기장의 용암지대에서 경험했었지. 완전하지는 않으나 스위프트덕이 일시적으로 샐러맨더처럼 용암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
“다정 씨가 마물에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힘을 얻듯이, 반대로 마물도 다정 씨에게 영향을 받아 어떤 힘을 얻는 듯해요.”
“오…….”
원장님의 말에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던 난 이어진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분명 그 힘은 어느 정도 초월적인, 과장하자면 종의 한계를 건드리는 신적인 영역. 당신, 진짜 인간 맞죠?”
분명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람 맞아요. 요즘 들어 사람인지 아닌지 좀 헷갈리긴 하는데 태어날 땐 분명 사람이었어요.”
원장님은 어쩐지 답답한 듯했다.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알았다며 원장실로 향한다.
아무래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이번 일에 대한 보너스 문제는 내일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녀석하곤 그 후로도 자주 만났다.
만날 때마다 녀석의 등에 올라타 마물원의 수많은 우리를 뛰어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어 너나 녀석이라고 불렀구나.”
[응? 이름?]
같이 천공섬의 꼭대기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난 스위프트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정덕후야.”
[덕후? 그게 뭐야? 뭔가 이상해.]
“괜찮아. 좋은 뜻이야. 정씨 가문의 가족이 되어서 정, 덕[duck]은 오리 같이 생긴 널 뜻하고, 후帿는 화살처럼 쏘아져 재빠르게 과녁인 결승까지 도달한다는 의미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가족이라는 뜻이야.”
세 번째 가족이 생겼다.
*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뭔 놈의 비가 이리도 온답니까?”
쏴아아-!
세차게 퍼붓는 비로 인해 시끄럽다.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나는 비가 오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젠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한국의 장마는 보통 일주일에서 길어 봐야 이 주일 동안 지속된다.
하지만 이 비, 한 달이 넘게 퍼붓고 있다.
뉴스와 신문에는 연일 터지는 침수 피해 기사들이 가득했다.
장마 때문에 오랜만에 한국 전체가 왁자지껄했다. 기이한 장마전선에 이종족의 기술력마저 투입되었다고 들었지만, 비가 계속해서 퍼붓는데 무슨 소용이야?
마물원은 안전했다.
비가 오자마자 어디론가 물들이 빠져나가 침수 피해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먹구름과 꿀꿀한 날씨가 계속되자 기분이 확 처지는 느낌이다.
분명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다.
전이로 인해 지구의 환경들이 많이 바뀌었지. 그 영향 때문일 거야.
“비가 계속 오네요.”
내 말에 원장님이 대답했다.
그녀 또한 창문으로 다가와 비가 오는 걸 구경했다.
그러다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했다.
“앗, 우산.”
우산 없이 나가는 그녀에게 헐레벌떡 우산을 주려던 난 새삼 그녀가 드래곤임을 깨닫고 말았다.
퍼붓는 소나기에도 그녀는 전혀 젖지 않았다.
“흐음.”
눈썹을 찌푸리며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던 원장님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기회라면 기회려나”
그러고는 관리실로 돌아오더니,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막으러 가죠.”
“네?”
원장님은 막으러 가자고 말했다.
문맥상 비가 내리는 걸 막으러 가자는 뜻 같았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말이기에 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뭘 막으러 가요?”
“비를 막으러 가자고요.”
막아?
비가 막는다고 해도 막아지는 거였던가? 비가 많이 오면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하지만 진짜 뚫린 건 아니다. 수챗구멍 막듯이 막지 못하는 것이다.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원장님이 말했다.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엄숙한 표정이 되어서 말이다.
“조심하세요. 지금 다정 씨가 만나러 가는 건 ‘신’이니까.”
오늘 따라 그녀의 페이스에 맞춰 주기가 힘들었다. 비를 막으러 가자는 데 이어 신이라고?
“대체 무슨 말씀을…….”
“정확히 말하면 신은 아니나, 신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여 ‘신수’라 불리는 존재죠. 하필이면 내 영역의 위에서 비의 신이 강림하다니, 귀찮지만 막으러 갈 수밖에 없겠네요.”
그러며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이제는 익숙한 마법진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이 상황의 위험성을 깨닫고 소리쳤다.
“전 빠질게요!”
“어딜 빠져요. 가디언이니까 날 지켜 줘야죠.”
아니, 내가 용을 어떻게 지켜?
하지만 반항은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공간이 이동되었고.
눈 깜짝할 사이 난 하늘에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비행기에서나 내려다봤던 서울 풍경이 보인다.
주변엔 먹구름이 가득하다.
구름을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서 보는 건 정말 기이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발생한 더 무섭고 기이한 경험에 비하면 천공을 걸어 다니는 경험은 새 발의 피였다.
“봐요. 저게, 신이라 불리는 마물.”
먹구름을 ‘헤엄치는’ 물고기.
물고기라 표현한 건 그것의 생김새가 잉어와 똑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청동 비늘을 가진 잉어다.
하지만 ‘그것’이라고 칭한 건 도저히 그 물고기를 생물이라고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잉어처럼 생겼으나 크기가 얼추 봐도 비행기보다 훨씬 크다.
콰르릉-!
그것은 먹구름 사이를 헤엄쳤다. 그리고 먹구름에 몸이 닿을 때마다 천둥, 번개를 흩뿌렸다. 기괴한 동화의 한 장면 같았다. 잉어는 새하얀 구름을 한 입에 집어삼켰고, 그러자 아가미에서 먹구름이 흘러나왔다.
하얀 구름들은 모두 잉어에 의해 먹구름이 되어 갔고, 새로 만들어진 구름도 그렇게 먹구름이 되어 간다.
‘장마의 원인이…….’
먹구름에선 세차게 비가 뿜어져 나왔다. 난 깨닫고 말았다.
한 달 동안 지속된 장마의 원인이 단지 마물 때문이라는 걸.
천공을 헤엄치는 잉어에 의해서라는 걸!
난 드래곤과 지내며 잊고 있던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고 말았다.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