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인어와 사이렌 (7)
황금 날개를 가진 용이 역정에 찬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
‘어찌 날 미워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
“어찌 그리 오만하십니까?”
그러자 황금 날개를 가진 용이 고함을 질렀다.
“입을 다물라! 주술사, 곧 우리가 태고의 동면에 들 때 너를 찾으러 갈 것이다. 그때는 네 알량한 재주로도 내 눈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야.”
*
눈을 떴다.
하지만 곧 감았다.
그러다 내 잘못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가슴들이다. 아주 큰 가슴들, 비몽사몽이라 하마터면 손을 뻗어 마구 주무를 뻔했다.
‘가슴들’이라고 말한 건 한 개, 아니 한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양옆으로 두 명씩, 네 명이나 있다. 이상한 건 왜 속옷만 입고 있냐는 것이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저 복장은 ‘인어들의 수장’이 입은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많이 다르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미안하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인어와 달리 아름다운 인어들이 입자 파괴력이 달랐다.
‘인어들이 왜?’
저 속옷 같은 차림은 ‘예우를 갖추어야 할 때’ 입는다고 하지 않았나?
팬티차림의 나는, 속옷(같은 복장)만 입은 인어들에게 둘러 싸여진 상태다. 그 상황이 매우 뻘쭘하여 가만히 누워만 있자 인어들이 곧 내 허벅지에 미지근한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아, 잠깐만.’
인어들은 수건으로 내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건장한 남자인 나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들키기 전에 벌떡 일어나(하체가 아니라 상체를) 수줍게 말했다.
“이제 그만…….”
갑자기 일어난 나 때문에 살짝 놀란 인어들은 곧 화색하며 말했다.
“일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언제부터 날 걱정해 줬다고.’
인어들의 달라진 태도가 어색했다. 나는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여긴?”
주위를 둘러보니 내 집도 아니고 마물원도 아니었다. 오두막집이었는데 벽에는 조개와 산호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인어들의 수장 집과 비슷했다.
‘마물원인가 보구나.’
원장님의 기억을 삼키고 기절한 뒤로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히 원장님이 인어와 나를 데리고 마물원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기억을 삼킨 건 안 들켰을 거야. 왠지 몰라도 그럴 것 같다. 아니면 그냥 북극해에 버려졌을 테니.
“위대하신 분께서 우릴 위해 마련해 주신 쉼터예요.”
“우리들의, 인어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죠.”
역시 인어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렇다면 마물원이라는 거네.
“원장님은요? 세이렌들은… 으아, 머리야.”
말을 하다 말고 뒤통수와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입술을 깨물었다. 두통에 괴로워하자 인어들이 차가운 물수건을 건네며 몸 상태를 물었다.
“머리가 아프세요? 어떡하지? 수장님 불러올까요? 아참, 산호약이 있는데 이거라도 드실래요?”
나는 호들갑 떠는 인어들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뭔 개 같은 꿈을 꿔서 머리가 조금 지끈거릴 뿐이니까.”
아니, 꿈이 아닌가? 그녀의 기억들이니. 흐음.
그래, 꿈이 아니었다.
왜냐면 방금까지 내가 겪은 건 기억의 재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밀려드는 기억들에 의해 정신을 잃지도 않았고, 환상 같은 분위기에 압도당하지도 않았다.
꿈이 아니란 건 안다.
멍청한 내 불찰이었다. 세이렌들의 속삭임에 이성을 잃고 원장님의 머리에 열린 기억의 열매를 삼켰으니까.
나는 그녀의 기억을 훔쳐봤다. 그것도 두 개나! 첫 번째 기억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기억은 내가 뭘 봤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흠, 무슨 황금처럼 뻔쩍한 뭔가가 있었는데.
어쨌든 기억을 훔친 게 들키지는 않았으니까 된 거지. 게다가 첫 번째 기억, 설마 ‘그런 거’였다니. 훔치길 잘했다 싶었다.
“으아악!”
몸이 뻐근해서 고함을 지르며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인어들을 뒤로하고 스트레칭을 했다. 몸을 움직이자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 같네.
이제 당당히 인어들을 마주하고 말했다.
“제가 쓰러지고 나서 며칠이 지났어요?”
“가디언님께서 쓰러지신 지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세이렌들은 위대하신 분께서 무언가를 알아보신다고 데리고 가셔서… 참,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말이요?”
붉은 머리의 인어가 말했다.
“다정 씨를 그렇게 만든 녀석들은 모두 털어 버리고 올 테니, 푹 쉬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마 원장님은 내가 말해 준 불법 헌터들의 본진을 쳐부수러 간 것 같았다.
‘다행이다.’
내가 쓰러진 걸 다른 이유로 오해한 건가? 사실 무리하게 ‘드래곤’의 기억을 훔쳐 먹어서 기절한 거지만, 같은 의미로 세이렌의 힘을 과용해서 쓰러진 거니까. 내가 헌터들 때문에 기절한 걸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무척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휴우, 눈치채지 못했구나.
인어들을 보내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피곤이 몰려온다. 한 열 시간동안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싶었다.
사흘 동안 기절해 있었지만 계속 깨어 있던 것같이 피곤했다. 사실 잠을 잤다기보다 강제로 사흘 동안 눈을 뜰 수 없었다고 봐야겠지.
과연 드래곤, 세이렌의 힘으로 그녀의 기억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후유증이라니.
“원장님…….”
홀로 침대에 누워 ‘그 기억’들을 상기했다. 두 번째 기억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첫 번째 기억은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내가 삼킨 그녀의 기억, 하지만 그건 분명 나의 기억이기도 했다.
즉,
그녀와 나는 공유하는 기억이 있었다. 그녀가 잊어버린 걸까? 아니면 손등에 파리가 앉았던 걸 기억하지 않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굳이 기억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내가 삼킨 원장님의 기억. 기억의 혼동은 찰나였다. 원장님의 기억이 내가 어린 시절 경험한 상황이란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은 어렸을 적 나의 기억과 똑같았다. 거참, 인연이 뭔지. 망할 고블린들로부터 날 구해 준 ‘붉은 용’ 이 바로 원장님이었다.
그날과 똑같은 기억.
아무리 내가 어렸어도 그 일을 어찌 잊을까. 다만 내 기억 상으로 흐릿하던 그날의 기억을 보다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훔친 기억 속의 나는 원장님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린 나를 구해 준 원장님은 ‘인간 아이’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고블린들을 데리고 마물원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다. 이때부터 원장님은 마물원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기억은 그곳에서 끊겼다.
떠올리기도 역겨운 기억이었으나 붉은 용의 정체가 원장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 그날의 기억은 더 이상 역겹지 않게 되었다.
나를 구해 준 드래곤,
어린 내가 겪기에 참혹하고, 참담하고, 비참한 비극을 트라우마와 같이 잊지 않게 노력하던 단 하나의 이유, 내 은인인 붉은 드래곤.
세상에!
마물원 면접 때 느꼈던 어렴풋한 익숙함은 착각이 아니었던 거야.
반가움과 더불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 처음 겪는 기분이다.
뭐지? 이 기분을 ‘시원섭섭하다’고 하던가? 붉은 용이 원장님인 사실은 놀랍고 대단했지만, 원장님이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조금은 섭섭한 일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갑자기 원장님한테 ‘나 어릴 때 원장님이 구해 주셨어요.’라고 말해 봤자,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훔친 기억 속의 나, 그러니까 원장님은 정말 어린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내게는 은인일지라도,
그녀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침대에 누웠으나 계속 그 기억이 떠올라 피곤해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친구와 선생님의 낭자한 유혈과 살을 뜯어먹는 고블린들보다, 날 감싸던 포근한 붉은 손이 더 기억에 남게 되었다. 원장님이었구나, 원장님이었어.
*
하루를 꼬박 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집에서 나와 보니 인어들의 섬과 완벽하게 똑같은 섬이 나왔다.
다른 건 시설이 더 좋아졌다는 정도. 인어들은 예전 섬에서 투박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했지만, 이곳은 급수대나 발전소부터 광장에는 대형 스크린 TV까지도 보였다.
한창 바쁘게 일을 하던 인어들은 나를 발견하자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첫 만남과 다르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래, 나는 이런 걸 원했어.
“이곳은 어때요? 살 만해요?”
내 질문에 인어들의 수장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마에 주름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웃음기가 가득했다.
“모든 게 완벽한 곳입니다. 아니, 오히려 전의 보금자리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던 우리 선조들의 바다가 이런 곳일까요.”
인어들은 상당히 만족했다.
무려 원장님이 설계한 곳이니까 당연하다. 젠장, 저럴 거면 진작 옮기던가. 괜히 고집을 부려선.
살짝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좋게 끝난 일인 만큼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도와드릴게요.”
원장님도 안 오고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인어들의 터전을 가꾸는 걸 도와줬다. 나무를 베어다가 집의 기둥을 세우고, 앞바다에 내려가 거대 산호초들을 뽑아 왔다.
바다에는 마물들이 가득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지구는 아닐 테니 헌터들의 습격은 걱정할 필요 없겠지. 이제 남은 건 인어들의 변화인데.
일을 끝내고 광장에 모여 식사를 같이했다. 광장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 TV는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었다. @@@인어들은 모두 눈을 반짝이며 TV를 바라봤고, 수장은 경건하게 느껴질 만큼 엄숙한 태도로 TV의 전원을 켰다.
‘뉴스?’
TV에서는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인어들이 물고기 꼬치구이를 손에 들고서 뉴스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건 나밖에 없었다.
“의외네요. 인어들이 이제 TV도 봐요?”
내 말에 수장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처음엔 세상을 알라는 위대하신 분의 조언 때문이었으나, 이젠 보다시피… 아무래도 우리들에겐 외부의 세계는 옛 적부터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요. 옛 버릇은 어디가질 않더군요.”
그러고 보면 인어공주는 바깥을 동경했었지. 난 어깨를 으쓱하고 같이 뉴스를 구경했다. 인어들은 사소한 뉴스에도 탄성을 내질렀다. 특히 뉴스에 빠질 수 없는 코너인 ‘능력자 사건 사고’ 방송에서 인간들의 변화를 가장 놀라워했다.
뉴스가 끝나고 ‘음악 방송’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인어들이 마치 위문 공연을 관람하는 군인들처럼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서 열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이렌과 친한 만큼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흠, 만약 인어들이 이 잡탕찌개 같은 사회에 진출한다면 가수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가디언이시여.”
노래로 흥취가 달아오를 때,
인어들의 수장이 술을 가지고 왔다. 내게 따라 주며 ‘존경의 술’ 이라고 했다. 인어들이 술을 권하는 건 그 자를 정말 존경하는 의미라나.
머리가 아직 띵하긴 했지만 거절할 수 없기에 잔을 받았다.
음악 방송이 끝나자 인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순간 나는 울컥해서 울 뻔했다. 정말 첫 만남과는 다르잖아.
“가디언님, 궁금한 게 있어요.”
그녀들이 내게서 가장 궁금한 건 하나였다. 바로 세이렌과 정말 대화할 수 있는가.
그 외에는 내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슬픈 일이다.
“뭐가 궁금한데요?”
“세이렌들이 무슨 말을 했나요?”
“뭐 그냥 다양한 얘기를…….”
그 일이 짜고 친 연극이라고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고 보면 세이렌이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이 있었지.’
세이렌에게 물어봤자 ‘바다님은 바다님’이라고 말했기에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어들은 알지도 몰라.
세이렌들이 왜 나를 바다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저보고 고맙다고 하더군요. ‘바다님, 바다님’이라면서. 혹시 바다님이라는 뜻이 뭔지 아나요?”
깔깔-!
내 말에 갑자기 인어들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해서 인어들의 개그 코드를 건드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바다님이라고요? 정말 세이렌들이 바다님이라고 했나요?”
인어들의 수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해줬다.
“세이렌들이 어지간히 고마웠나 보군요. 바다님, 바다님은 우리들이 ‘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존엄한 호칭입니다. 정말, 세이렌들에겐 가디언님이 신이라고 생각될 만큼 고맙게 느껴졌나 봅니다.”
나는 의아함에 코를 씰룩거렸다.
말을 하려다가 그냥 속으로 삼켰다. 이상해. 세이렌들은 분명 처음부터 나를 바다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