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수의사(5)
이틀 후 올리비아는 릭스틴 연구소로 돌아갔다. 정말 바빴는지 작별 인사도 없이 휑하니 떠났다.
이틀 동안 나는 그녀에게 마물 생리학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올리비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귀중한 지식들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지식이 필요한 건,
이번 타래딱새 사건으로 많은 걸 깨우쳤기 때문이다. 손짓 한 번에 모든 게 다 해결되는 도깨비방망이 원장님과 지내다 보니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
이세계의 존재들이 지구에 적응하기 위해 이만큼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이번 타래딱새 폐사를 생각하며,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까 하고 고민했다. 폐사의 원인은 무지함과 미숙함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수백 마리의 타래딱새들을 구할 수 있었다. 비단 타래딱새만이 아니다.
가축화된 마물들이 급사하는 사례는 번번했다. 그리고 전이가 가속화되며 점점 지구와 이계와 뒤섞여질수록 더 늘어날 것이다.
‘마물은 종마다 완전히 별개의 생물은 아니야. 동물처럼 생물학적 분류로 나눌 수 있다면…….’
내 힘이라면.
지금까지 마물원에서 일하며 겪은 경험과 지식이라면.
미리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타래딱새 사건 이후로 나는 바스테 병원으로 돌아와 마물을 분류하는 기준을 연구했다. 스파이를 솎아 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내 관심은 확실히 다른 곳에 있었다.
‘원장님, 미안해요.’
원장님은 절대 자신이 직접 쓴 ‘마물 매뉴얼’의 내용을 세간에 공개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마물을 분류하는 데 이만큼 값진 정보는 없었다. 그래도 마물마다 상세히 기록한 건 아니니, 원장님의 매뉴얼을 마물 분류작업에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물을 생물학적 분류로 나누듯 마물도 계와 문을 나누고 강, 목, 과를 분류했다. 하지만 마물은 동물과는 다른 분류의 기준이 더 필요했다. 바로 마나의 성질이다.
이 점은 마물을 진료하고 치료하며 만든 나름의 기준으로 나뉘었다. 이 과정에서 올리비아에게 배운 지식이 큰 도움이 되었다.
백 마리를 진료하며 기록했을 때 마물 분류법에 윤곽이 드러났고, 천 마리의 마물을 진료했을 때 마침내 완성했다.
[마나 형질에 따른 마물 분류법]
기초적이며 정립되지 않은 정리법.
나는 자그마한 기둥을 세운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분류법은 전에 없던 새로운 기준이었다.
나는 이 36가지의 구분법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마물을 생물학적 분류만으로 진료하여 병을 발견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면, 추가로 마나 형질에 따른 구분이 더해져 보다 세밀하고 집중적인 진료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분류법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다면 점점 보완되고 확립되어가겠지.’
내가 원하는 그림은 분류법으로 나뉜 마물마다 자주 발생하는 병과 진료, 치료법이 데이터로 쌓여 가는 것이다. 동물로 치자면 고양이에게 나타나는 허피스, 개과 동물에게 나타나는 광견병 등, 마물에게도 분명 마나 형질마다 뚜렷하게 발생하는 병이 다 다를 것이다.
갈수록 의학이 진보한 것은 정보의 축적 때문이다. 마물 의학도 데이터가 쌓이면 쌓일수록 큰 도움이 될 거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 내가 만든 기준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 사타리언 부인은 현 의학계의 거두였고, 그 시발점이 되는 장소가 바스테 병원이었다.
분류법이 완성되자 나는 사타리언 부인에게 보고했다. 현명한 그녀는 내 발견을 대단한 업적이라 칭찬하며 곧바로 교육에 나섰다. 순식간에 내가 고안한 분류법이 세계의 기준이 되었다.
사타리언 부인에게 ‘스파이를 잡으라고 보냈더니 역사를 쓰셨다.’라는 칭찬을 들으며, 나는 애꿎은 뺨을 계속 긁적였다.
사실 분류법의 90%, 아니 99%는 원장님의 매뉴얼 덕이었고, 나는 그것을 분류한 것밖에 없었다.
괜히 일을 크게 벌인 게 아닌가 싶었지만 뭐,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까.
*
한바탕 소동을 벌리고 난 뒤, 그날 밤에 나는 뿌듯함과 성취감으로 만족스럽게 잠을 잤다.
그런데 꿈속에서 원장님이 나타났다. 나는 꿈속에서도 이게 꿈이라는 걸 인지했다. 왜냐면 원장님이 직접 꿈이라는 걸 일깨워 줬으니까.
“이건 대체…….”
어리둥절하던 찰나에 원장님이 갑자기 내 뺨을 후려갈겼다. 나는 멀리 날아갔다. 농담이 아니라,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제자리로 도착했다.
“꿈이니까 아프진 않을 겁니다.”
정말이었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맞자마자 내 머리만 지구 한 바퀴를 돌았을 테니까.
어안이 벙벙한 채 원장님을 쳐다봤다. 그녀는 눈썹을 구기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차원 통신도 안될 만큼 먼 곳이라 주술을 사용해야 했어요. 이봐요, 다정 씨.”
사태가 심상치 않다.
분위기를 읽은 나는 곧바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꿈이지만 등골이 서늘했다.
‘들켰나?’
찔리는 게 있으니 더 무섭다. 꿈이 점점 악몽처럼 변해 가는 것 같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원장님은 정말 오랜만에 화를 내며 날 꾸짖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내 몸은 점점 작아졌다. 정말 작아졌다. 발톱의 때만큼. 꿈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나 몰래 재밌는 일을 하셨더군요. 마물 분류법, 흠. 놀라운 업적이에요. 지구의 인간들, 아니 지구의 모든 존재들도 결코 하지 못했겠죠. 제 지식이 없다면!”
역시 들켰다.
“죄송합니다아아아.”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 머리는 땅을 파고들어 갔다. 지하 30m쯤 파고 들어갔을 때쯤 멈췄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을 만큼 죄송하니 내 죄책감을 알아봐 달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역시 꿈이니까 가능한 행동이다.
“고개 들어요.”
원장님이 말하자마자 내 머리는 고무줄을 튕기듯 튀어 올랐다. 스프링 인형처럼 흔들리는 머리로 원장님을 쳐다봤다. 하지만 원장님의 입꼬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점차 작아져 빨간 사과가 되었다. 꿈이라서 모든 게 가능했다. 나는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서 사과가 되어봤다.
그런 나를 원장님이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뭐 때문에 화난 것 같아요?”
“원장님 몰래 마물 분류법을 만들어서 배포했어요.”
“그리고요?”
“그 토대가 된 게 원장님의 매뉴얼… 제멋대로 원장님의 지식을 유출했어요.”
“그래요. 내가 화난 건 그거야. 드래곤의 지식을 함부로 베푼 것. 정말! 내가 매뉴얼을 집대성해서 세간에 발표하는 날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음?
뭔가 화난 포인트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용기 내어 질문했다.
“원장님… 매뉴얼을 발표하실 생각이었어요?”
원장님의 몸이 갑자기 엄청나게 커졌다. 까마득한 높이의 원장님이 소리치자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 줄 알아요? 이제 내 연구결과를 발표하더라도 마물 분류법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거야. 다정 씨 때문에! 이 논문 표절범아!]
쾅!
그녀가 거대한 발로 날 지르밟았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녀의 분노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빨간 사과가 되어 연신 미안하다고 소리쳤다. 원장님은 한참동안이나 나를 발로 짓밟았다.
“됐어요. 내가 참아야지.”
그러다가 다시 원래의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나도 빨간 사과로 변한 것을 그만두고 그녀의 앞에 섰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원장님이 잔뜩 화가 나 있을 때 지구에 있었다면,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짓밟혔을 수도 있었다.
원장님은 다신 자신이 준 기술, 힘, 지식 등을 함부로 유출하지 말고, 가르쳐 주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지내며 친해졌다고 간땡이가 부어올랐던 거야. 내 입장을 다시 떠올리자. 그녀는 고용주, 나는 피고용인. 그녀는 용, 나는 인간.
“그리고.”
몇 차례 설교가 끝난 후, 원장님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다시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줄 알고 눈을 질금 감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은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다정 씨가 의도했든 안했든, 한 가지 잘한 게 있어요. 마물 분류법을 배포해서 필요한 자들이 쓰게 만든 점. 집단 지성을 이용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빚어낼 수도 있을 거예요. 태생이 오만한 나 같은 드래곤은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겠죠.”
원장님에게 칭찬을 받자 마물 분류법을 발표하며 받았던 모든 찬사와 칭찬들보다도 기분이 더 짜릿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 뺨을 토닥거렸다.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 한참 동안이나 선 자세로 있었다. 손으로 원장님이 토닥거려 줬던 뺨을 매만지며.
그러다 문득 깨닫고 눈썹을 찌푸렸다.
“통신도 안될 만큼 멀리 있다는 양반이 내가 한 짓을 어떻게 아셨대?”
드래곤이 신이라도 되나?아, 그 근처까진 되겠지.
*
바스테 병원에서 지내며 나는 사타리언 부인이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의사들이 열정과 신념이 있었고 흑심을 품은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곳의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타래딱새 사건 이후로 사적으로도 내가 먼저 다가갔다. 그렇게 교류를 하다가 어떤 의사와 특히 친해졌다.
중국인 의사, 왕정(王晶).
염소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동양인인 그는 뛰어난 의사였다.
침술과 중의학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이용해 마물을 진료하고 치료했다. 양의학에서 그의 방법을 미신으로 여겼지만, ‘능력’이 생긴 이후로 인류는 한계를 규정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분명 그의 침술과 의학 지식은 하나의 능력으로 볼만큼 독특하고 굉장했으니.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중의원에 날 초대했다. 왕정의 중의원은 별관에서도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속에 홀로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중의원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한국 사람에겐 익숙한 약재들 냄새였다.
약재로 가득한 방의 벽면에는 온통 마물의 생김새가 그려져 있었다.
“혈자리, 침을 놓는 자리군요.”
나도 나름 곽운에게 무공을 배우며 혈에 대해 공부했기에 자신 있게 말했다. 왕정은 내 말에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에게도 혈이 있으니, 침으로 기운을 조절하여 병을 치료할 수도 있지요.”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가 가끔 보여 주던 침술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었지.
“굉장하군요. 놀라운 기술이에요.”
왕정은 쑥스러움이 많은 자였다.
하지만 내 칭찬에 그는 자부심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 시대가 다가올수록 옛 시대의 기술과 현인들의 지식이 빛을 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약재가 가득한 방에 앉아 있자 왕정이 차를 내려왔다. 차 또한 약재로 다린 탕약 같았다.
맛은 쓰지만 마시자마자 몸에서 활력이 돈다. 해백초만큼은 아니지만 귀한 약임은 틀림없었다.
다시 대단하다고 추켜세우자 왕정은 말을 이어서 했다.
“중의학도 그렇습니다. 전이 전엔 큰 효능을 입증하지 못했지만 전이 이후 ‘기’ 혹은 ‘마나’라 불리는 신비로운 힘이 인간에게도 나타나면서, 예부터 기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던 선조들의 지혜가 인정 받기 시작했지요.”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마음에 드는 사람이기도 했다.
“다정 님은 옛것을 좋아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좋아하는 ‘옛것’들을 말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옛것은 조금 더 오래전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제가 좋아하는 건 다 옛날 것들입니다. 인어공주, 7080록, 디스코, 옛 영화!”
왕정은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이런, 취향이 같으시군요.”
“7080록을 좋아하시나요?”
“제 취향은 아닙니다.”
“디스코?”
왕정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히 옛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정은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인어공주 말입니다.”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중의학 박사와 인어공주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설마 그와 디즈니 영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인어공주를 시작으로 그와 대화를 나눴다.
취향이 맞는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와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다정 님은 얼마나 열려 있는 분이시지요?”
뜬금없이 그가 물었다.
나는 질문의 의도를 몰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찻잔에 약을 따라 주며 말했다.
“마물을 대하는 자세에서 놀랐습니다. 다정 님은 평범하지 않아요. 또한 목적을 왜곡시키지도 않습니다. 뚜렷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시는 분, 이번 마물 분류법에 대한 성취도 목적에 대한 결과물이겠지요.”
왕정은 날 조금 오해한 모양이었다. 마물을 치료하기 위해 아가리 속에 들어가는 행동이 이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하긴, 지금까지 내 행동들은 약간 미친 행동이긴 했지.
“다정 님. 다정 님은 목적을 위해 ‘얼마만큼’ 열린 분이시지요?”
나는 그의 눈을 마주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눈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미묘하게 느껴졌다.
‘왔다.’
등골과 머리에 짜릿한 느낌이 꽂혀 온다. 잊고 있었던 본래의 목적이 상기되어 간다. 냄새가 나. 거짓말쟁이는 당신이었나, 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