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엘프 (6)
다크 엘프 도시의 입구는 큰 동굴이었다. 처음엔 원시인도 아니고 동굴에 사는 것 같아 무시했었다. 역시 테러나 저지르는 놈들이라고. 그러니까 빈약하고 허접한 동굴에 옹기종기 모여 빌빌거리며 살지.
하지만 동굴 깊숙한 곳, 지하로 점점 내려갈수록 도시의 윤곽이 드러났고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들, 언제 지구에 이런 걸 만들었지?
“지하 도시라니…….”
동굴 깊숙한 곳에 도달하자 지하로 향하는 거대한 승강기가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전기로 작동하는 게 아닌 듯했다.
한쪽 벽면이 유리로 이루어진 승강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 놈들이 만든 지하 도시의 풍경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대단히 신비한 느낌이었다. 지하를 인공적으로, 대규모로 파내어 독특한 구조의 건물을 지어 놨다. 건물과 시설들의 생김새는 언뜻 로마 시대 양식같이 고풍스럽다. 고대 도시 같은 느낌이지만 지하에 인위적으로 건설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대단한 기술력이 느껴진다.
지하 도시엔 마력이 충만했다. 승강기도 그렇고, 전기로 작동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바위 외벽마다 설치된 조명들도 LED 따위가 아니었다. 마나로 빛을 내는 발광석인가? 화려하고 고풍스럽고 믿기지 않는 지하의 도시였다.
이종족의 도시는 드워프들의 마을인 야누스 섬을 가 본 적은 있지만 다크 엘프들의 본거지는 규모가 차원이 달랐다.
놀라서 감탄사를 내뱉고 있자 카르네가 말했다.
“다크 엘프란 명칭의 본뜻은 그린 파라다이스 때 지상을 포기하고 지하로 숨은 엘프들을 뜻해요. 오랫동안 별개의 집단으로 독립되어 살았기에 지상의 엘프들하곤 많은 게 달라졌죠. 뿌리는 같은데…….”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삼키는 카르네였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슬픈 이야기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같은 인간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는 판국이니까.
승강기에서 내려 발을 디디며 도시를 걷자 더욱 실감이 났다. 지구가 아니야. 여긴 완전히 이계잖아.
지하 도시, 다크 엘프들이 좋아하는 환경이라 그런지 피부가 끈적거릴 만큼 습하고 더운 곳이었다.
우리는 지하 도시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 안으로 안내받았다. 아치형 입구에 줄지어 경계를 서고 있는 다크 엘프들을 지나자 엄청 긴 복도가 등장했다.
복도를 걸으려고 할 때였다. 나만 뚜벅뚜벅 앞으로 걸을 뿐 카르네와 다크 엘프 안내인들은 복도 끝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여.”
카르네를 쳐다보자 그녀는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잠시 후 복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 전체가 저절로 움직이며 우릴 복도 끝까지 데려가 준다. 그래, 기계 문명이라고 했었지. 대단하네.
복도를 지나고 열두 개의 응접실과 다시 두 개의 복도를 지났을 때야 비로소 다크 엘프들의 수장을 만날 수 있었다. 놈은 화려한 보석들로 치장된 왕좌에 앉아 우릴 거만하게 내려다봤다.
‘저놈이 테러를 일으킨 주동자로군.’
생각보다 젊다. 엘프의 나이를 인간의 관점으로 계산할 순 없지만 겉으로는 30대로 보인다.
검은 동공에 흰 머리를 가진 남자. 얼굴선은 굵직하고 반듯하여 잘생겼지만 작은 입과 턱이 어딘가 비열해 보였다. 그는 화려하고 나풀거리는 천 옷을 입고 나뭇잎으로 장식된 왕관을 쓴 채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싸움을 걸고 싶었으나 그래도 한 종족의 수장이니 예의를 갖추고자 했다.
난 미리 배웠던 엘프들의 예법으로 양손을 이마에 얹고 고개를 숙였다. 우스꽝스러운 자세였으나 엘프들 사이에선 예의 바른 인사란다.
다크 엘프의 수장은 내 모습에 소리 나게 웃으며 왕좌에서 일어났다.
“드래곤의 가디언과 하이 엘프가 짐의 왕국에 왔느니라. 뭣들 하느냐? 연회를 시작하라!
놈은 갑자기, 뜬금없이 연회를 개최한다고 소리 질렀다.
싸우러 왔지 밥 먹으로 왔냐? 황당해서 쳐다만 보고 있자 미리 준비한 듯 순식간에 식탁이 차려지고 악단이 도착했으며 화려한 옷을 입은, 아마 높은 신분으로 유추되는 다크 엘프 몇 명과 검을 찬 경계병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카르네, 이건 뭐죠?”
손님에게 식사를 내놓는 건 인간과 별다를 바 없다. 하지만 명백히 적으로 온 대상에게, 그것도 별다른 대화도 하지 않고 바로 거한 상차림을 내놓는 건 내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카르네는 들키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엘프들의 기이한 문화예요. 최후의 만찬, 적에게 음식을 베풀어 죽어도 자신을 원망 마라는. 정말 오만한 자군요.”
오호라, 그러니까.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아니면 죽는다… 뭐 그런 의미라는 건가?
나는 뺨을 긁적이다가 성큼성큼 걸어가 식탁에 앉았다. 그러곤 놈이 뭐라고 하기 전에 빵을 들어 수프에 찍어 먹었다. 뭐, 맛은 있네.
내 모습에 심기가 거슬렸는지 다크 엘프 수장은 싸늘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주워 먹었다. 이미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짐은 라쿤테의 핏줄이자 유구한 체인트리스 엘프들의 왕가…….”
무어라 주절거려도 다 무시하고 밥만 먹었다. 결국 다크 엘프 수장은 격한 목소리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폴론가의 첫 번째 바위, 구탄이다.”
구탄, 그게 니 이름이니?
난 빵을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마물원 직원인데요.”
일부러 멍청하게 굴었다. 약 좀 오르겠지.
“지금은 드래곤의 가디언으로 왔어요. 이름은 정다정인데 뭐, 이름으로 부르진 마요.”
내 태도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다크 엘프들이다. 놈들이 더 화를 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난 건드리진 못해. 원장님이 조건을 제시했고, 그걸 받아들여 자신들의 도시에 초대한 거니까.
잠시 자기 페이스를 잃었던 다크 엘프 수장, 구탄은 갑자기 껄껄 웃으며 태연한 척했다.
“드래곤의 가디언이라 품격을 기대했건만 결국 사람은 다 같은 모양이로군.”
쩝쩝쩝.
놈이 뭐라고 말하든 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입으로 크게 쩝쩝 소리를 내고 스프 같은 건 후루룩 마셨다. 이 집, 요리 잘하네.
쩝쩝 소리가 듣기 싫은 건 만국 공통, 아니 우주 공통인지 다크 엘프들은 헛기침을 하며 심기 불편함을 표시했다.
사실 내가 이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어도 놈들은 날 모욕했을 것이다. 지금도 구탄의 구겨진 눈썹이 날 어떻게 욕할까 고민 중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드래곤의 가디언이니 선을 조절하지 내 입장이 보잘것없었더라면 당장 목을 치라고 명령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하이 엘프의 반려자라. 크큭, 카르네. 지금까지 우릴 거부하더니 설마 인간과 사랑에 빠졌을 줄이야.”
놈은 이제 카르네를 타깃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녀도 만만치 않았다. 위장 결혼을 탐탁지 않아 하던 그녀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놈에게 보란 듯 흔든 것이다.
“좋은 반려자를 선택하는 방법은 자신의 현명함에 달렸다고 하지요. 다행히 저에겐 현명함이란 게 있더군요.”
구탄은 하이 엘프인 카르네에게 구애를 했었다. 그게 정치적인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남자로서 패배한 건 구탄이었다. 난 보란 듯 웃어 보이며 카르네의 손을 꽉 쥐었다.
쿵!
구탄이 술을 들이마시고 잔을 거칠게 내려놓는다. 놈은 이래저래 소득이 없자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위대하신 분께선 너와 대화를 해 보라고 하셨지. 가디언의 뜻이 본인의 뜻이라며.”
놈이 말했다.
“또한 그분은 가디언의 선택과 그로 인한 생략 책임을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 방자한 태도로 짐을 대하여 생긴 불상사에도 그분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날 협박하려는 건가.
“거참.”
굳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 구탄에게 나도 정중하게 대할 필요는 없겠지.
“이보소, 난 이곳에 화친을 목표로 온 게 아니요.”
난 먹던 빵 조각을 구탄에게 던졌다. 설마 던질 줄은 몰랐는지 구탄은 피하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맞았다.
“싸우러 왔지.”
그 순간 다크 엘프 경비병들이 검을 뽑고 달려왔다. 난 태연히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예상대로 구탄이 먼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시켰다.
“드래곤의 가디언, 가디언, 가디언. 다행으로 여겨라. 내가 당장 너의 목을 치지 않는 유일한 이유일지니.”
난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더 도발해 볼까.
“듣기론 네놈들이 세계수인지 뭐시기를 심어서 지구를 조율하려고 한다더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민감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구탄은 담담히 대답했다.
“우린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언젠가 세계수가 지구에 피어날 것이다. 씨앗을 퍼트려 우리의 세상을 유지했던 것처럼, 다른 세계수도 자라나겠지. 우린 그때까지 길을 닦아 놓는 것이다. 멍청하고 우매한 자여, 대의를 이해할 수 없으면 말을 삼가라.”
오히려 발끈한 건 카르네였다. 구탄의 말에 카르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세계수를 시들게 한 주제에 감히!”
다크 엘프들이 대전이를 막기 위해 세계수를 죽게 했다고 했던가. 그런데 지금 와선 세계수를 지구에 심겠다고 한다. 카르네가 화를 내는 이유가 이해가 간다. 아주 못된 놈들이네.
난 이쯤 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입씨름을 해 봤자 주둥이만 아프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리며 소리쳤다. 당연히 이 몸짓은 엘프들의 예법이 아니다.
“수령투를 신청한다.”
그 순간 나에 대한 모욕으로 재잘거리던 연회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잠시 후 사태를 파악한 구탄이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고,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연회장은 다크 엘프들의 웅성거림으로 시끄러워졌다.
“좋다! 인간치곤 베짱이 제법이로구나! 아하하하!”
상석에 앉아 있던 놈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구탄이 일어나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치워졌다. 다크 엘프들은 벽 쪽에 붙어 날 구경했다. 모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놈과 대면했다.
키가 제법 커 올려다봐야 했다.
“수령투에 대해선 아는가?”
“카르네에게 들었다.”
“좋다. 내가 먼저 조건을 걸겠다.”
‘역시.’
놈은 당황하지 않고 너무 자연스레 수령투를 받아들였다. 아마 놈도 이 상황을 원했을 것이다. 사실 정말 내가 드래곤의 가디언으로서 무언가를 제안하고자 왔다면 이처럼 무례하게 구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잖아.
아마 원장님이 제시한 어떤 제안과 약속은 이 상황을 유도하기 위한 작업이었겠지. 그리고 구탄은 스스로 함정에 빠진 줄을 몰랐을 것이다. 역시 원장님은 무서워.
“내가 승리하면 하이 엘프는 내 반려자가 된다. 그리고 네가 정말 용의 대변자라면 그분에게 말하라. 다크 엘프의 광명의 길에 그분께서 힘을 빌려줘야 할 것이다.”
수령투란 명예와 격을 갖춘 엘프끼리 무언가를 위해 약속을 하고 맞붙는 행위다. 중세 시대 기사들의 명예 싸움 같다.
하지만 단지 장갑을 던진다고 시작되는 싸움이 아니다.
수령투를 신청하는 자와 그 대상은 서로 동등한 조건을 내걸어야 했다. 만약 내가 드래곤의 가디언이 아니었다면, 카르네와 위장 결혼하지 않았다면 놈을 이기더라도 일방적인 폭행에 지나지 않았겠지.
그런다고 다크 엘프의 과격파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좋아. 대신 네가 패배하면 내게 굴복해라.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그게 다크 엘프의 신념을 거스르는 행위라도.”
하지만 정당한 수령투를 통해 놈을 굴복시킨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카르네가 말해 줬다. 수령투란 단지 내기가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내건 사투라고.
놈은 피식 웃으며 조건을 쉬이 승낙했다. 그만큼 ‘용의 도움’은 다크 엘프의 수장직을 내걸 만큼 대단하다는 거겠지.
“또한.”
‘뭐야, 또?’
수령투.
힘껏 놈을 쥐어팰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조건을 승낙한 놈이 말을 덧붙였다.
“수령투는 엘프의 ‘전통’대로 이루어진다.”
“그런! 이자는 인간입니다. 어찌 엘프의 전통대로 싸운단 말입니까!”
“흥, 그럼 인간처럼 싸우란 말이더냐? 변절자는 닥치고 있어라.”
카르네가 발끈하여 소리쳤다.
카르네에겐 상황이 불합리하게 흘러가는 걸로 보이나 보다.
고민해야 했다.
이 사태를 원장님은 과연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원장님은 이 상황도 다 예상하고 내가 이길 거라며 호언장담했었을 것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원장님에게 몰래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부재중 응답만이 들려왔다. 더 시간을 끌면 의심받을 거야. 그러니 혹시라도 내가 진다면 원장님 탓이야. 아무튼 연락을 안 받은 원장님 탓이라고.
“알았어. 뭔 말이 길어. 당장 싸워 보자고.”
구탄이 말했다.
“세 번의 결투, 두 번의 승리.”
놈의 몸이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난 놈의 몸속에 깃든 붉은 거북이 위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싸움인가? 그렇다면 좋겠지만.
“첫 번째 대결은 드루이드를 이용한 환경 설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