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기사단(2)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와 블랙 교수를 따라갔다. 불안한 기색의 그와 달리 나는 태평하게 주변을 구경하며 걸었다.
런던의 거리는 여전히 똑같았다. 예스러운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물들과 고즈넉한 거리들. 전이 이후 급변한 세계에서도 런던은 여전했다. 하지만 도시는 불변하더라도 자세히 둘러보면 크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
‘과연, 대단하네.’
영국은 이종족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나라이다. 미국이 이민자의 나라라면 영국은 다종족의 나라였다. 그로 인해 20년 동안 많은 불상사를 겪었다곤 들었으나 어쨌든 영국은 다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거리에서 많은 이종족이 보였다. 풍선과 껌을 파는 우딸리깔딸리 난쟁이들부터 호객 행위를 하는 수인, 공연장을 두고 격투하는 오크들도 보였다.
“빨리 오시오. 발을 바삐 하지 않으면 들킬 거란 말이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많은 이종족이 있었으나 이 도시에서 가장 불안해하는 건 블랙 교수였다. 그는 공항에서 구입한 짙은 색깔의 싸구려 선글라스와 빵모자를 쓰고 따라오라며 나를 보챘다.
‘그걸 변장이라고.’
내게도 모자와 선글라스를 씌우려고 했다. 놈들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장단을 맞추어 준다고 모자는 썼으나 선글라스는 쓰지 않았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였나, 어디에 숨겨 놨습니까?”
“쉿! 조용히 따라오시오!”
블랙 교수는 가끔씩 가로등 뒤에 숨어 있다가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할아버지, 첩보 영화를 많이 본 게 분명하다. 그것도 80년대 구닥다리 영화들. 내가 보기엔 전혀 쓸모없는 짓거리다.
뒷골목을 지나 어떤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에서 나와 또다시 허름한 건물에 들어가더니 뒷문을 통해 큰 거리로 나왔다.
여기까지면 이해를 한다. 그는 또다시 뒷골목을 지나 건물을 지나 복도를 지나 나선 계단을 지나 지하역을 지났고, 마침내 큰 거리에 나왔을 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저 뒤에 보이는 성당, 아까 전에 봤던 건물이잖아. 젠장! 걸어서 기껏해야 5분 정도 되는 짧은 거리를 복잡하게 움직였어?
“아니, 저기요. 보아하니 허접들도 아닌 것 같은데 이딴 짓거리가 통할 거라 봅니까?”
“걱정 마시오. 우린 마법사들의 통로를 지나고 있었으니.”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아주 뜻밖이었으므로 솟구치는 짜증을 대신하여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그게 뭔 소립니까?”
그는 말이 많은 사람답게 곧바로 답을 알려 주지 않고 입을 놀렸다. 이 와중에도 말이다.
“다정, 문화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소? 문화가 가진 영향력 말이오.”
“문화요?”
“첫 번째 대전이가 나타났을 때 이야깁니다. 당시 많은 마물과 이종족이 지구에 등장했지만 당황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종족이 폭풍우에 휩쓸린 범선처럼 어쩔 줄 몰라 했으며 그중엔 지금에 이르러 마법사라 불리는 자들도 있었지요. 지구로 전이당한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불가사의한 힘이 큰 혼란을 야기할 것임을 알았소. 그래서 약속이라도 한 듯 어느 한곳으로 모여들었고, 모습을 숨기기 위한 장치들을 만들기 시작했지요.”
블랙 교수의 말은 몹시 흥미로웠다. 마법사들, 그 희귀하고 놀라운 생명체들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나조차도 마법사 유저는 만난 적이 있어도 진짜배기 마법사는 본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해 원장님은 드래곤이지 마법사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더 희귀한 쪽은 당연히 원장님이겠지만.
“마법사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다는 얘깁니까?”
“그렇지요. 지금이야 전부 흩어졌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영국에 마법사들의 사회가 있었소.”
블랙 교수가 말했다.
“뭣 때문인 것 같소? 마법사들이 당최 왜 많은 곳 중에 영국을 택한 것 같소이까?”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이유를 알 리가 없다. 블랙 교수는 대답을 못하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떤 특별한 책, 소설 때문이오.”
마법사, 영국, 소설.
이 세 단어만으로 난 떠올릴 수 있었다.
“설마? 진짜요?”
“맞소. 그 소설이오. 세계를 강타한 전무후무한 환상 소설!”
블랙 교수는 황당한 말을 들려줬다. 지구에 대해 알기 위해 지식을 쌓던 마법사들이 소설의 영향을 받아 영국을 본거지로 삼기 시작한 이야기였다.
“진짭니까? 소설 때문에 영국에 마법사들이 모였다는 게?”
블랙 교수는 이제 와 맥 빠지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지식인들은 내 말을 허무맹랑하게 여기지.”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도 난 그렇게 생각하오. 이처럼 지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이종족들은 문화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말이오. 뱀파이어들이 십 대 사춘기들의 장난 같은 복장과 화장으로 다니는 것도 문화의 영향이고, 무림인들이 동아시아에, 수인들이 일본과 아프리카에 몰려드는 것도 같은 이유이오. 신기하지 않소? 결국 이종족과 인간이 같은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면, 장담하는데 이종족과 지구인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질 것이오.”
그가 역설한 문화의 힘.
나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사타리언 부인의 자식들도 인터넷 크리에이터의 말투를 따라 하지 않았던가?
영국에 정말 마법사들이 있다면 그의 행동은 신뢰가 갔다. 나는 군말 없이 그의 복잡한 동선을 따라다녔다.
*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샌드위치를 사선 그와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난 이종의 적응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소. 아까 말했듯이 문화의 힘은 제법 대단하거든. 문제는 마물들이오. 녀석들이 뭘 알겠소? 다른 사람들은 녀석들에 대해서 뭘 알고? 녀석들을 지키고 알리려는 목소리가 없소. 아니, 없었소. 마물원에 대해서 알기 전까진…….”
블랙 교수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부탁해서 미안하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무례했던 것 같소. 그저 동질감에 행동이 앞섰던 것이니 너그럽게 봐주시오.”
나는 오글거림을 참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은 너무 지나치게 진지했지만 착했다.
의외로 똑똑한 사람이기도 하고.
[이상한 ‘것’들이 쫓아 와!]
“그래, 나도 알고 있어.”
확실히 보통이 아니다,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놈들은.
블랙 교수는 놈들의 힘을 파악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도망쳤지만 두 번은 통하지 않았다.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가게에서 나와도 시선은 이어졌다. 미행이 붙었다. 하지만 굳이 블랙 교수에게 말하진 않았다. 나는 단비를 달래며 태연하게 움직였다.
블랙 교수는 킹스크로스 역을 지나 점점 어둡고 외진 곳으로 향했다. 런던 북부의 할렘가, 외설적인 그라피티가 잔뜩 그려진 어두운 길목을 지나자 사람은 물론, 이종족도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런 덴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하지 마시오. 곧 마법사들이 남긴 은밀한 은신처가 나오니 거위를 찾기만 하면…….”
“이미 들켰어요.”
나는 당황하는 그를 내 등 뒤로 오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인적이 드물어지자 놈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진 것이다.
‘선빵 필승.’
나는 드루이드를 발동시켰다.
블랙 교수 주변의 땅이 진동한다. 위수의 힘은 순식간에 돌바닥을 먼지로 바꾸어 싱크홀을 만들었고, 블랙 교수는 그 안에 빠지게 되었다.
“으아악-!”
블랙 교수의 비명을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시 싱크홀을 돌로 덮은 다음, 팔찌를 발동시켜 턱시도로 갈아입고 검을 뽑았다.
[단비야, 바람.]
드루이드의 힘은 형의검의 부족함을 채워 줬다. 단지 보완의 형태가 아니라 곱절의 상승을 기대하게 만든다.
휘이익!
단비가 만들어 낸 돌풍이 거리를 휩쓸었다. 할렘가의 쓰레기더미가 딸려 와 주변이 난장판이 된다. 하지만 내가 풍종도보의 경공을 밟으며 달려갈 때 그 어떤 작은 휴지 조각도 내 몸에 달라붙지 않았다. 스위프트 덕의 마력은 바람을 걷는 것. 바람이 불수록, 나는 보다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쿵!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세 놈.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황급히 도망갔으나 내게서 달아나진 못했다.
놈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대전이 전에야 갑옷은 총알도 못 막았으나 지금은 다르다. 중세 유럽의 풀 플레이트 갑옷, 별다른 장식 없이 실용성을 중시한 갑옷은 단단하고, 무거워 보였다. 즉, 봐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힘을 잔뜩 실어 검을 내려쳤다.
그러자 투구와 함께 갑옷이 반으로 갈라졌다.
“얼레?”
만약 도중에 살갗을 베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면 기겁하며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갑옷을 베는 감촉은 단단하고 억세기만 했다.
나머지 두 놈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내게 덤벼들었으나 덜그럭대며 움직임이 형편없었다. 사람이 갑옷을 입은 게 아니다. 갑옷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뭔 놈들이래?”
[말했잖아! ‘것’들이라고!]
갑옷 안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자 나는 곧바로 드루이드를 발동시켜 용암 구덩이에 갑옷을 던져 버렸다. 갑옷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었다. 이러한 이계 마법은(혹은 과학기술)은 제법 흔한 것이다.
[넌 누구지?]
하지만 갑옷이 스스로 말을 하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첫 번째로 벴던 갑옷의 쪼개진 투구를 용암 구덩이에 던지려던 나는 행동을 멈췄다.
나는 찌그러진 투구를 보며 말했다.
“넌 누군데?”
투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바람, 용암. 마법사 유저인가? 게다가 리빙 아머를 일순간 베어 넘기다니, 검술의 수준도 높군.]
‘거참, 목소리 한번 끝내주네.’
명백한 적이었으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든 참 끝내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국 귀족 계층이 지닌 특유의 영어 악센트는 매력적이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상대하는 녀석은 만만한 상대가 아닐 것이다. 한국 항공사의 비행기를 결항시킬 정도의 영향력, 내게 미행을 들켰음에도 당황하지 않는 목소리. 아마 국제 헌터이거나 교섭인이거나 그 이상의 세력이겠지.
[고용된 헌터라면 지금 당장 의뢰를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라. 보수를 원한다면 그가 제안한 몫의 두 배로 주겠다. 또한 위명을 생각하는 자라면 이번 일로 결코 명성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이 일을 계속 진행한다고 하여 명성이 높아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목소리는 우선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처음엔 회유하며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마지막엔 강직하게 권고했다.
[지금 당장 꺼져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까지 별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면 곧 이 목소리의 주인을 포함하여 무서운 아저씨들이 몰려들 것이다.
일단 녀석들이 누구인지 상당히 궁금하다.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리 만무했지만 혹시 모르지.
“난 정의의 편이다.”
헛소리를 하고 침묵하자 목소리가 되묻는다.
[무슨 의미지?]
내가 대답했다.
“만약 너네들이 스스로 떳떳하게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면 못된 놈으로 간주할 거야. 덤비는 대로 아작 내 주면서 끝까지 저항해 주지. 대신 내 나름 기준으로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깔끔히 포기할 수도 있어.”
대답은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의외로 목소리의 주인은 너무나 쉽게 제 정체들을 밝혔다.
[우린 버밀리언 기사단이다.]
“버밀리언?”
[영국 왕실과 하나뿐인 여왕님을 수호하는 태양 기사단이며 영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계와 관련된 범죄들을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소탕하는 징벌의 기사단이다.]
때론 소름 끼치는 오글거리는 말이라도 목소리에 따라 멋있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는 태양 기사단이니, 여왕님을 수호하니 하면서 듣기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었으나 어색하지 않았다.
“어… 쉽게 말해 영국 정부 소속이라고?”
[우린 영국, 그 자체를 대변한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놈들인 것 같다. 나는 잠시 고민해야 했다. 영국 정부라, 으음.
“괜찮네. 일단 보류해 두마. 거위부터 찾고 녀석에게 물어보지 뭐.”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으니 투구를 용암에 던지려고 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하도 작아서 못 들을 뻔했다.
[우리에 대해서 알려 주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이유야 뻔하지.
그들은 정체를 굳이 숨길 필요가 없어.
“죽여서 내 입이라도 막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