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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35화 (135/258)

# 135화 기사단(4)

“말도 안 돼! 태양이 한낱 도둑 따위를 선택하다니!”

갤러해드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내겐 잘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느꼈다. 비의 신수와 교감했을 때, 찰나지만 기린의 기운을 느꼈을 때, 혹은 케르베로스의 눈을 들여다봤을 때 느꼈던 황홀하고 아득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하고 찬란하고 빛나는 느낌.

빛이 사그라지고 몸을 채우던 기묘한 느낌이 가시자, 내 손엔 하나의 검이 들려 있었다.

[마음에 드니?]

붉게 타오르는 검신. 샐러맨더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운 손잡이를 비롯하여 검의 생김새는 투박하였으나, 느껴지는 예리함은 불마저 베어 버릴 듯 날카로웠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응, 마음에 들어.”

대검을 휘두르는 적기사에 맞서 나는 다시 한번 홍식을 펼쳤다. 똑같은 힘, 똑같은 무공, ‘내’가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크악!

하지만 홍식은 전과 달리 붉은 섬광처럼 뻗어 나가 적기사의 갑옷을 산산조각 냈다. 나를 압도하던 갤러해드는 단 한 방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템발.”

송곳니 같은 붉은 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는 순간 기가 막혀 실소를 지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내가 본격적으로 싸우려고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괜히 헌터들이 이계의 무기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계의 무기 때문에 전쟁마저 일어나는 게 아닌데. 무기의 위력을 지금까지 너무 간과하고 있었던 걸지도…….

“두 배, 아니… 다섯 배는 강해졌나?”

무기만 달라졌는데 형의검 위력의 격이 달라졌다. 나는 이 무기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 하얀 빛의 마물을 바라봤다.

녀석 자체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으나, 녀석의 힘은 다른 의미로 너무 위험했다.

나는 하얀 빛을 안고, 지금쯤 공기가 부족해 쓰러졌을 블랙 교수를 지하에서 꺼냈다.

둘을 데리고 돌아가려는데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던 갤러해드가 뚜렷한 목소리로 외쳤다.

“니콜라스 라셀레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질문했다.

“왜?”

왜 본명을 말해 주는 걸까?

갤러해드는 스스로도 모르는지 고개를 돌린 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

“졌어요?”

란슬롯은 쓰러진 갤러해드를 보며 비웃었다.

“진짜? 첫 번째 기사 주제에? 방심했죠? 방심했네. 마법도 안 쓰고.”

갤러해더는 그의 조롱에도 침착했다.

“도둑이 말하길, 거위가 자신을 택했다더군. 믿기지 않았으나 새로운 검이 만들어졌다. 중세 이후 새로운 검이 나타난 거야.”

란슬롯은 갤러해드의 부서진 적갑옷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나뭇가지로 드러난 살갗을 쿡쿡 찔러 댔다.

“그걸 이제 알았어요? 그 거위 녀석, 우리 무지 싫어하잖아요.”

“도둑을 영웅으로 택할 만큼 말이냐?”

“뭐가 영웅이야. 그냥 자기 마음에 드니까 선물한 거겠지.”

란슬롯은 나뭇가지를 갤러해드의 콧구멍을 쑤셔 넣으려다가, 정신을 차린 그의 주먹을 맞았다. 갤러해드는 지친 몸을 이끌고 란슬롯을 두들겨 패면서도 하나의 의문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드래곤이 내 뒤에 있다고 그랬지. 왠지 거짓이 아닌 것 같군.’

갤러해드는 다정이라는 자에 대한 궁금한 점을 며칠 뒤에 확실히 풀게 되었다.

*

원장님에게 연락을 취하지도 못했다. 갤러해드와의 싸움으로 연락 수단인 마도구가 부서진 탓이다.

나와 블랙 교수는 그야말로 악당에게 쫓기는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느긋하게 밥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어딜 가나 놈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휴대폰은 물론이고, 공중전화, 심지어 빌린 전화까지도 신호가 차단되었다.

빅브라더, 정보화 시대는 무섭다.

수차례 습격을 받으며 가까스로 오우거 돛단배를 타고 영국을 벗어났지만 뱃길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오우거 돛단배는 말 그대로 오우거가 노를 젓는 작은 배이다. 나와 블랙 교수는 1평도 안 되는 곳에 쪼그려 앉아 냄새나는 오우거가 노질하는 것만 한참 바라봐야 했다.

간신히 배를 타고 유럽 본토에 도착했다. 영국을 벗어나면 괜찮겠지 싶었으나 유럽에선 놈들의 손아귀가 안 닿는 곳은 없었다.

버밀리언 기사단이란 놈들은 끈질긴 사냥개였다. 내 동선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파악했지만 함부로 덤벼들진 않았다. 내가 적기사를 이겼기에 위험한 맹수로 보는 것이다. 대신 끈질기고 집요한 사냥을 시작했다. 싸울 땐 언제나 기습했고, 전황이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곧바로 퇴각했다.

프랑스에서 마침내 적기사를 포함하여 그와 동등한 무력을 가진 기사 여러 명과 대치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였다. 혹 하나, 아니 두 개를 달고 처절하게 도망쳤다.

놈들을 피해 무려 2주가 넘게 하수도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우연히 마주친, 바스테 병원에서 알고 지내던 의사들의 도움으로 사타리언 부인에게 연락이 닿았다.

아무리 영국 정부라도 사타리언 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곧바로 원장님의 ‘공적인’ 번호로 연락했다. 마도구로 연결하는 직통 번호는 아니라 그런지 수차례 걸어도 원장님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한국으로 한 달 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도피 생활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지켜 주겠다는 사타리언 부인에게 블랙 교수를 맡기고, 하얀 빛의 마물만 데리고 서둘러 마물원으로 향했다. 한국도 놈들의 영향력 안에 있을 게 뻔했다. 마물이 유일하게 안전하게 있을 곳은 마물원뿐이야.

심신이 지친 상태다.

쪽잠만 자며 도망을 다녔다. 내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요원이라면 이런 주먹구구식 도피가 아니라 보다 현명한 방법을 택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쭉정이에 불과했다.

마물원 일엔 도가 텄지만 헌터 일엔 문외한인 탓이다. 원장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비상 모드로 돌린 마물원의 관리실이라면 안전하다. 이 녀석은 마츄들과 지내게 할까. 아무리 놈들이라도 공간이 분리된 마물원 우리 안까지 침범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다행이야. 푹신한 침대는 없더라도 누워서 잘 수는 있잖아. 나는 우선 마츄 우리에 녀석을 놔두고 관리실로 향했다.

원장님이 돌아오면 한풀이할 게 많아졌다. 따뜻한 물로 샤워라도 하며 천천히 내가 겪은 일을 얼마만큼 불행하게 말할지 정리해야지 관리실의 문을 열었다.

“왔어요?”

원장님이 있었다.

나를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대한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뻐근해지는 뒷목을 붙잡았다. 원장님의 얼굴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해야 했다. 화내면 안 돼, 화내면. 이유가 있었을 거야.

나는 차분하게 질문했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한 달 전쯤에 돌아왔어요.”

내가 도피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원장님은 마물원에 있었다는 것이다.

“왜 연락을 안 받았어요?”

“핫라인이 아니면 잘 안 받아요.”

“제가 일하러 갔다가 한 달 동안 안 돌아왔는데 걱정이 안 돼……. 씁, 보통이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알아보지 않나요?”

“믿었어요.”

불만으로 잔뜩 얼굴을 찌푸린 나는, 이어진 원장님의 말에 실없이 표정을 풀고 말았다.

“내 가디언이니까.”

역시 원장님은 불리하다 싶음 가디언을 운운하며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심보가 못되었다. 그러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정말 나를 잘 안다는 증거겠지. 아씨, 어릴 때부터 애정 결핍이라 그런가. 별것도 아닌데 이런 사소한 칭찬에 너무 약하잖아.

*

마츄 우리에 들어서자 뜻밖의 진귀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얼레?”

털북숭이 마츄들이 강강술래를 하듯 옹기종기 뭉쳐서 중앙의 하얀 빛 마물을 향해 긴 꼬리를 추켜들고 있었다. 나는 마츄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지배? 아니야, 저건 경배야. 사람으로 따지면 하얀 빛 마물에게 넙죽 절하며 경배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니들 뭐 해!”

츄우츄-

항상 츄츄 거리며 귀엽게 애교를 떨던 녀석들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쪼그마한 게 뭘 안다고 경건한 자세로 마치 기도를 방해하지 말라는 듯 나를 째려본다. 원장님은 하얀 빛 마물을 보자마자 발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몇 년간 원장님과 지내 온 결과, 저 제스처는 몹시 설렌다는 뜻이다.

“이 느낌, 설마요!”

하얀 빛 마물은 마츄들의 절을 받으며 서 있었다. 콧대가 높은 녀석은 드래곤인 원장님을 보고도 겁에 질리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뭘 만들어 줄까?’라고 물어보진 않았다.

“하얀 빛의 신수. 틀림없어. 세상에나! 천 년 넘게 행방을 몰랐는데, 지구에 있었던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원장님에게 말했다.

“원장님도 저 녀석이 하얀 빛 뭉치로 보여요?”

블랙 교수도, 적기사 갤러해드도 거위로 보았다. 하지만 원장님은 나처럼 하얀 빛의 마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저 신수는 특별한 근본의… 에이, 설명은 나중에 하고! 지구는 위험해, 그녀를 본 세계로 돌려보내고 올게요. 드래곤조차 확실히 모르는 곳이라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원장님의 공간 마법이 시전되기 전에 나는 다급히 외쳤다.

“잠시만요!”

나는 원장님을 불러 세우고 재빠르게 다가갔다.

하얀 빛 신수, 녀석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더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나는 녀석이 만들어 준, 송곳니 손잡이의 장검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런 거, 더 만들어 줄 수 있니?”

위력은 충분히 경험했다.

그러니 욕심이 났다. 한 자루보단 두 자루, 두 자루보단 열 자루. 이왕이면 많이!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신수의 반응은 냉담했다. 빛나던 녀석이 시무룩해하며 촛불처럼 작은 빛이 되었다.

[네가 가장 강한 무기를 만들어 달래서, 난 열심히 노력했어. 난 그 이상은 너에게 만들어 주지 못해. 너의 발톱을 흉내 냈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구나. 난 슬퍼.]

“아냐!”

난 이처럼 멋진 무기를 만들어 준 녀석이 자신에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빛이 환해지며, 녀석이 활기차게 말했다.

[그래! 난 이제 잘 거야. 지쳐. 한 천 년 동안 자야지! 하암~]

역시 두 자루는 못 만드나 보구나.

근데 내 발톱을 흉내 냈다니, 뭔 소리지? 내 원래 발톱은 큐티클이 잔뜩 벗겨지고 못생겼는데?

“가요!”

원장님이 다시 공간 이동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다.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가장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참! 원장님, 나 이상한 놈들에게 쫓기고 있어요! 어떻게 좀 해 주고 가세요!”

원장님은 싱긋 웃었다.

“그건 걱정 말아요.”

그리고 곧바로 하얀 빛 신수를 데리고 사라졌다.

*

원장님은 걱정 말라고 했으나, 나는 한 달간의 도피 생활이 트라우마가 되어 관리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원장님이 돌아왔다.

“이제 지구는 안전해요.”

원장님이 말하길, 녀석은 아주 특별한 신수로서 녀석이 머무는 차원에선 항상 전란이 일어났다고 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영국이 신수를 보호한 게(원장님은 다 알고 있었다) 무척 다행이라 했다.

만약 신수의 힘을 제어할 능력이 없는 자가 힘을 얻었더라면 지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워졌을 거라고 하였다.

녀석의 능력은 원장님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영웅을 만들며 신화를 현실로’ 옮기는 힘을 가진 근본의 신수라고는 하는데 이마저도 확실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위험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행이에요. 영국의 여왕과 기사단은 제법 괜찮은 집단이더군요. 만약 지구에 신수가 있다는 걸 로드께서 아셨다면… 동면을 포기하고 오셨을지도 몰라요.”

“로드, 신수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항상 그 사람이 언급되네요.”

원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로드라고 높여 부르니 대단한 존재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만나고 싶진 않았다. 원장님도 무서워하는 자를 내가 왜 만나.

녀석은 원장님의 주술과 마법으로 보호되는 곳에서 동면하는 중이었다. 일단 신수는 해결되었다. 이제 나만 남았나.

“난 어떻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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