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원탁의 기사들 (1)
다 이해했다. 캐멀롯에 나타난 솔로몬의 탑을 닫기 위해선 기사 다섯이 필요하고, 마지막 남은 원탁의 기사가 바로 나라는 거지? 놈들 입장에서도 참 난감했을 것이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기사는 아마 후계자가 없었을 것이며, 거위 마물에게 새로운 검을 받은 건 나밖에 없으니까.
“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외부인이 원탁에 앉기 위해선 다른 기사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상황은 요상하게 흘러갔다. 도와주겠다고 말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인정을 받으란다.
다섯 번째 기사가 되기 위해선 거룩한 맹세와 의식이 필요한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다른 기사들에게 인정받는 걸로 대신한다는 것이다.
‘급한 일인 것처럼 보이는데, 쯧쯧.’
먼저 부탁해 놓고 참 싸가지 없는 태도다. 들어 보니 자기들 발등에 불똥이 튄 모양인데 당장 불이 번지지 않도록 노력은 안 하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네.
“내가 뭘 어떻게 해 줄까요? 대충 예상은 가다만은…….”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자기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녀석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진 뻔했다.
“유다의 탑은 악몽의 재림이다. 상식으론 재단할 수 없는 괴물과 시련이 재현되는 곳, 우린 등을 맡기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하다.”
말의 마무리는 가웨인이라 불리는 유쾌한 노인이 대신했다.
“으하하, 이 녀석의 혀가 쓸데없이 길어 귀 아프겠군. 간단하게 말해서, 싸워 보자는 거다. 어린애들처럼 치고 박고 싸워 네 힘을 보여 주는 거지!”
발끝부터 전기가 오른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붙어 봐서 안다. 그들은 강하다. 엄청나게 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물함에 넣어 놨던 메타소드를 꺼냈다.
메타소드는 아무런 힘을 담고 있지 않을 땐 평범한 철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쥐자 붉은 송곳니가 되었다.
“한번 붙어 봅시다.”
마물원에서 일하며 달라진 건 재력이나 힘만이 아니다. 성격 또한 달라졌다. 확실히 정상인과 다르게 폭력과 가까워졌다. 싸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졌으며, 무도가처럼 힘의 증진을 순수하게 기뻐하게 되었다.
가웨인은 껄껄 웃고, 갤러해드는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란슬롯이라 불리는 소년은 히죽 웃으며 갈색 머리의 여자, 펠리노어의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그제야 펠리노어가 내게 보내던 눈빛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나와 싸워 보고 싶은 호승심을 담은 눈빛이었어.
‘괜찮은 기회야.’
갤러해드와 맞붙고 도피 생활을 하면서 몸은 피곤했지만 감각이 날카로워지고 형의검의 기술이 보다 완성되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얌전히 수련으로 실력을 키우는 유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사이어인처럼 실전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우린 곧바로 원장님이 마련한 특별한 대련장에 모였다. 룰은 간단했다.
나는 번갈아 가며 그들과 대련한다. 대련 한 번에 제한 시간은 30분이며, 휴식은 마음대로이나 하루에 네 사람과 한 번의 대결은 꼭 치러야 했다.
대련이었으나 실전과 가까웠다. 급소를 공격하는 것을 가능함, 어떤 무기를 사용하든 어떤 방법으로 이기든 상관하지 않음, 상대가 항복하거나 전투 불능이 되면 승리, 전투 불능엔 죽음도 포함함.
제한 시간만 존재하는 일기토와 다름없었다.
첫 상대는 가웨인이었다.
그는 무식하게 큰 근육질 덩치만 한 무기를 사용했다. 솔직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 남자의 로망이잖아.
“무기 한번 끝내주네요.”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하자 가웨인이 껄껄 웃더니 무기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말했다.
“햇살의 망치. 바이킹의 왕을 내려쳐 바다 너머로 던져 버렸다는 무기지.”
그의 무기는 거대한 해머였다. 길이가 2m, 아니 3m는 넘어 보인다. 망치엔 사자가 양각되어 있었고 손잡이를 포함하여 해머 전체가 황금색으로 빛을 내뿜었다.
왕을 내려쳐 바다 너머로 날려 버렸다는 가웨인의 말이 허세로 들리지 않았다. 저 육중한 무게감, 저 무기에 내려쳐지면 다진 고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엄청난 무게일 것이라 짐작했지만 가웨인은 여유롭게 들고 있었다. 단지 폼이 아니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우는 거야.’
손에 쥔 메타소드가 받아들인 마물의 힘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잘 다루는 샐러맨더의 힘을 사용하는 게 가웨인에게 인정받기에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메타소드는 점점 더 크고 거대해졌다. 이내 마치 통나무처럼 무식하게 크고 볼품없는 몽둥이처럼 변했다. 특이한 점은 눈으로 봐도 확연히 느껴지는 질감이다. 마치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각지고 단단하다.
잠자코 보던 가웨인이 해머를 어깨에 걸치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갤러해드에게 듣기론 자넨 붉은 검과 불을 다룬다더군. 그런데 그 무기는 뭔가?”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몽둥이를 어깨에 걸쳤다. 묵직한 무게감에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크기도 엄청나 단지 어깨에 올려놨을 뿐인데 중심을 잡기 힘들었다.
“대륙봉이라 합니다.”
가웨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륙봉이라, 흠. 자네를 무시하는 건 아니네만 무기가 크다고 다 좋은 건 아니야.”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그럼 가웨인 경의 무기는 왜 그렇답니까?”
가웨인은 씩 웃더니 그 거대한 해머를 한 손으로 들고 내려쳤다.
쿵!
땅의 떨림이 전해질 만큼 엄청난 충격. 드래곤이 만든 대련장이 아니라 평범한 흙바닥이었다면 움푹 파였을 위력이었다.
“난 잘 다루니 상관없네. 그럼 어디 한번 신고식을 치러 볼까?”
그에게 맞서 싸우려고 할 때, 문득 가웨인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신고식은 기사가 된 후로 하는 거잖아요?”
가웨인은 껄껄 웃었다.
“으하하, 사실 난 이런 장단에 어울릴 만큼 협조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어쨌든 다섯 번째 기사가 필요한데, 인정하든 안 하든 뭔 상관인가? 어차피 문만 열린다면 자넨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도 되네.”
“그렇단 말이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히려 가웨인의 말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내가 필요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습득해, 움직임들을.’
그가 땅을 내려칠 때, 그냥 휘두른 게 아니었다는 건 바로 눈치챘다. 대충 하는 것 같아도 내 눈엔 보였다.
힘이 들어가던 근육, 격하게 움직이는 마나. 마나의 격한 기세는 따라 할 수 없더라도 움직임은 따라 할 수 있어.
쿵!
똑같은 방법으로 땅을 내려쳤다.
나는 발에 전해 오는 진동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재주를 부려 봐. 얌체같이 뺏어 먹어 주마.
“참고로 이 무기, 1,000분의 1로 크기를 줄인 것입니다.”
“으하하, 농담도!”
가웨인이 망치를 들고 달려왔다.
그에 맞서 나는 몽둥이를 들고, 똑같이 달려 나갔다. 두 거대한 힘의 격돌은 야생 곰의 싸움처럼 무식하고 격렬했다. 공격 하나하나마다 전력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첫 번째 대결을 끝마쳤다.
*
“아, 아파라.”
대련이 끝나고 휴식 시간.
결국 30분 동안 난 처맞기만 했다. 분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움직임을 따라하며 싸우는데 이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욱신거리는 상처는 빌어먹게도 아팠다.
대련장의 대기실엔 필요한 물품들은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알약 한 알로 외상은 모두 치료되었으나, 소모된 마나를 채우기 위해선 시간만이 약이었다.
“역시 강했어.”
가웨인은 내가 싸워 본 헌터들 중엔 손꼽을 강자였다. 아직 랭커들은 만나 본 적 없지만, 단언하건대 이들은 랭커일 것이다.
랭커란 타이틀을 얻기 위해선 다양한 활약이 요구된다. 단지 영국 비밀 기사단이란 특이한 위치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며칠 전 원장님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처한 상황들은 모두 원장님이 날 키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아마 이 또한 원장님이 깔아 놓은 판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강자들과 마음껏 싸울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다. 상사가 드래곤쯤 돼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수분을 충분히 보충하고, 몸의 긴장이 가시기 전에 다음 대련을 요청했다.
대련장에 나선 건 펠리노어였다. 갈색 머리의 포근한 분위기를 가진 영국인 여자는 싸울 준비가 되자 매섭고 날카로운 기를 뿜었다.
‘레이피어를 다루는구나.’
내가 배울 움직임은 길고 가느다란 양날검을 다루는 법. 고민했다. 원장님 앞에서 펼친 메타소드의 변화 중에서 레이피어와 비슷한 무기도 있었다.
‘그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사용할 순 없었다. 왜냐면 그건 무기술에 의존하는 형태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씩-!
고민하던 나는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려 펠리노어를 쳐다봤다. 그녀는 레이피어를 공중에 몇 번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눈으로 따라가기 벅찬 속도였다.
힘으로 찍어 누르던 가웨인과는 정반대, 피하기도 어려운 쾌속의 검이야. 펠리노어는 상기된 표정으로 레이피어를 내게 겨눴다. 보기와 달리 싸우는 걸 즐겁게 여기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자 고민은 끝났다.
메타소드의 검신이 점점 짧아졌고, 먹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내 두 자루로 갈라졌고, 단검이 되었다.
“당신, 눈이…….”
펠리노어가 당황하며 묻는다.
나는 혓바닥으로 손을 핥다가 간신히 본성을 억누르고 대답했다.
“고양이 같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사냥, 빨리 놀고 싶어. 문득 펠리노어가 들고 있는 레이피어가 야옹이가 가지고 놀던 고양이 낚싯대처럼 느껴졌다. 검신이 가늘어 휘두를 때마다 파르르 떨린다. 눈앞에서 흔들리며 유혹하는 탓에 나는 그만 뛰쳐나갈 뻔했다.
젠장!
가웨인과 싸우며 옅은 교감으론 이기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조금 깊이 들어갔더니 그새 정신을 못 차리겠네.
“조금 실례를 할지도 몰라요.”
두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단검은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본능은 알았다. 깨달았다. 야옹이의 힘은 받아들이면 굳이 펠리노어의 행동을 흉내 낼 필요가 없다. 본성만이 점철된 고양이의 사냥법은 그 자체로도 완벽하다.
“민망한 꼴을 보일지도 모른다고요.”
허리를 숙여 몸을 낮췄다.
엉덩이는 추켜들었다.
그러다 결국 실룩거리고 말았다, 장난감에 정신이 팔린 고양이처럼.
당황하던 펠리노어는 내가 뛰쳐나가자 이내 장난이 아님을 깨닫고 제대로 응수했다. 레이피어는 채찍처럼 빠르고 날카로웠고, 타점이 작은 만큼 급소만 노리고 찔러 왔다. 하지만 피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좀 더, 좀 더 검을 격하게 흔들어 줘.
*
“거참.”
그녀는 정말 잡을 가치가 있는 사냥감이었다.
물론 사냥감이란 표현은 어폐가 있었다. 펠리노어 입장에선 맞서 싸웠을 뿐이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펠리노어는 민첩하며 쉽게 잡히지 않았다.
사각지대에서 공격이 훅훅 들어오고, 재밌었다. 야옹이의 힘을 극도로 발휘할 수 있는 상대였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에 이르러 실수하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펠리노어는 나와 싸워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정조차 안 해 줄지도.
퉁퉁 부어올랐던 뺨은 약을 먹자 금세 가라앉았다. 과연 능력자라서 그런지, 손바닥으로 뺨을 맞았을 때 머리가 돌아갈 뻔했다.
“뭔 짓인지.”
30분의 ‘놀이’가 끝날 때쯤이었다.
펠리노어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분에 찬 표정을 보니 미안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놀아 준 펠리노어에게 고마웠다. 적어도 그때 내 마음은 순수하게 그랬다.
만약 내가 인간이었다면 손수건을 건네거나 하다못해 손으로 닦아 줬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생생하지만, 나도 야옹이의 힘과 깊게 교감되지 않았더라면 그런 행동은 추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루밍을 했다.
고양이들이 한바탕 놀고 나서 서로 그루밍하는 것처럼 고마운 마음에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그리고 여태까지 봐주면서 싸웠는지 펠리노어는 모든 공격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와 힘으로 내 뺨을 후려갈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이피어로 찔렀다면 난 즉사했을 것이다. 무어라 변명도 못하고 화난 펠리노어를 피해 대기실로 도망쳤다. 망할, ‘우리 고양이가 그랬어요.’라는 변명은 안 통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