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41화 (141/258)

# 141화 원탁의 기사들 (4)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네.’

그들이 사라진다.

마치 풀죽처럼 변해 바닥에 눌어붙었다. 슬라임? 아니야. 이 녀석들, 분명 도플갱어라는 새끼들이겠지. 마물이라기보다 하나의 현상에 가까운, 악의만이 가득한 생명 아닌 생명.

솔로몬의 탑에서만 볼 수 있는 변형 마물이다. 나는 나이트메어 사건 이후로 솔로몬의 탑의 괴물들에 대해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숙지했다. 알려진 것보다 숨겨진 게 많지만 이번엔 내가 아는 놈들이었다.

도플갱어는 상대의 모습과 기억, 목소리와 성격까지 모두 카피한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카피한 대상을 죽이고 대상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것.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겠지.’

놈들을 죽이자 갑자기 내 뒤편으로 문이 생겨났다. 시련을 통과했다는 의미겠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었다.

*

빛, 어둠이 지나자 캐멀롯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솔로몬의 탑은 여전히 굳게 세워져 있었다.

“젠장.”

그들은 모른다.

내가 도플갱어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마물임을 눈치챈 것과 다르게 기사들은 아무리 날카로운 기감을 가지고 있어도 모를 것이다.

만약 녀석들을 동료라 믿고 따라갔다면, 주변에 온통 자기를 죽이려 하는 악의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탑의 문을 열려고 했으나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물리적인 힘과는 상관없이 열리지 않겠지.

나는 긴장한 채 솔로몬의 탑을 지켜봤다. 누가 나올까, 도플갱어 아니면 진짜?

나는 상관없다.

내 역할을 맡은 도플갱어는 나오자마자 죽이면 된다. 하지만 나온 자들이 모두 진짜가 아니라 도플갱어라면…….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진짜들은 탑 안에서 죽은 걸까?

다른 자들이 나오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탑이 번쩍이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갤러해드였다.

그는 날 보자마자 대검을 겨누며 물었다.

“넌 진짜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구별하는 방법을 알잖아요.”

잠시 동안 나를 지켜보던 갤러해드가 검을 내려놓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좋지 않아. 너나 마안을 가진 나는 괜찮지만 다른 기사들은 다르다. 그들은 위장자들을 구별하지 못해.”

갤러해드는 도플갱어를 위장자라 불렀다. 그와 나는 굳은 표정으로 다음에 나올 기사를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오랜 시간 끝에 탑의 문이 열렸다. 그것도 연달아 세 번.

“가웨인, 펠리노어, 그리고… 란슬롯.”

갤러해드의 표정이 마치 악마처럼 변했다. 그는 동료들의 죽음에 격렬한 분노에 휩쓸린 듯 보였다.

“진정해요.”

그러나 나는 침착히 그를 달랬다.

처음엔 나도 도플갱어인 줄 알았으나 이내 다름을 느꼈다. 도플갱어, 대상을 죽인다고 들었으나 이번엔 달랐다.

“살아 있어.”

죽이기엔 너무 강자들이었을까?

도플갱어들이 그들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세 기사의 안에 깃든 도플갱어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수십 마리의 목소리가 몸 하나에서 들려왔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수로 밀어붙이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의식을 뺏긴 채, 도플갱어들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었다. 내가 나오라고 소리를 지른다 한들, 녀석들은 말을 들어 주지 않겠지.

갤러해드도 곧 사태를 눈치챘다.

하지만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

그렇지만 난…….

생각하던 그때, 기사 셋이 달려들었다.

쿵!

가웨인의 일격에 땅이 진동하고 펠리노어의 검이 벌 떼의 습격처럼 매섭게 찔러 온다. 란슬롯은 순식간에 나와 갤러해드에게 깊은 자상을 남겼다.

도플갱어에게 조종당하고 있어도, 실력은 그대로였다. 나와 갤러해드는 동시에 행동에 나섰다. 일단 싸워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

갤러해드는 위장자에 대한 일화를 들은 적 있었다. 심신을 갉아먹고 정신을 조종하는 위장자들은 잡아먹은 사람의 모든 걸 파괴한다. 육체와 마음뿐만 아니라 기억에 얽힌 모든 관계를 잘라 낸다.

가웨인은 유일한 혈육인 딸을 제 손으로 죽일 것이며 펠리노어는 오래된 자신의 가문을 몰살시킬 것이다. 또한 란슬롯은 그를 믿고 따르는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찾아가겠지.

결국 그들의 검은 영국 전체를 향해 겨누어질 테고, 원탁의 기사인 그들을 막을 존재는 영국엔 없을 것이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위장자에 쓰인 자를 본래대로 돌리는 방법은 없었다. 갤러해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금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바깥은 혼란에 빠진다.

결단은 쉬웠다. 최초의 기사로서 맹세하길, 자신은 본국을 지키는 검이다. 동료와의 정보다 중히 여길 게 무엇인지 갤러해드는 알았다.

하지만 몸은 굳은 채 쉽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차가운 손발에 점점 감각이 없어졌다. 내가 정말 저들을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의 목이 잘려 나가는 상상을 하자 바위처럼 단단하다 믿었던 마음이 양초의 밀랍처럼 녹아든다.

그가 망설일 때, 위장자들이 행동했다. 갤러해드는 순식간에 란슬롯의 검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불타는 고통이 그제야 그를 행동하게 만들었다.

“퍼시벌, 두 명을 맡아 줘.”

다섯 번째 기사 퍼시벌은 모든 게 의문인 사내였으나 등을 맡길 만큼 믿음직한 힘을 가진 남자였다.

갤러해드는 그가 가웨인의 해머와 펠리노어의 레이피어에 능히 맞서는 걸 확인하고, 란슬롯에게 달려들었다.

‘큭, 녀석.’

갤러해드는 검을 휘두른 것을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력으로 휘두른 검이 한 팔에 막혔다. 호수 여신의 검, 신성한 엑스칼리버. 란슬롯이 찬란한 빛을 내뿜는 검을 휘두르자 갤러해드는 맞서지 못하고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그 후로 갤러해드는 수차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란슬롯이 감추고 있던 힘은 갤러해드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갤러해드의 대검은 소년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으나 엑스칼리버는 갤러해드의 갑옷을 부수고 살점을 도려냈다.

갤러해드는 목에 고인 검은 피를 토해 내며 소년을 지켜봤다. 이글거리는 분노와 동시에 슬픔을 느꼈다.

‘망할 녀석, 위장자 따위에게 어찌 당한단 말이냐.’

란슬롯.

어릴 때 자신이 거둔 빈민가의 꼬마. 그리고 어린 나이에 최고위 기사가 되고, 최고의 검에 선택을 받은 소년.

자랑이었다.

형제가 없던 갤러해드는 란슬롯을 동생으로 여겼다. 자신을 뛰어넘는 천재적인 재능, 익살맞은 성격이지만 진중할 땐 여왕님도 놀랄 만큼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소년.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선 안 되었다. 그는 태양처럼 빛나고 높게 뜰 자였다.

‘적어도 내 손으로.’

갤러해드의 동공에 오망성이 생겨났다. 갤러해드는 영국의 마법사들이 행한 ‘인체 실험’의 피해자였다.

너무나 위험해 지금은 폐기되었고, 마법사들이 영국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마안’의 실험체.

그의 눈이 푸르게 변할수록 갤러해드의 피부가 회색으로 변질되었다. 마안은 새겨진 마법을 별다른 술식이나 지식 없이도 시전할 수 있으나 생명력을 매개체로 하여 목숨을 갉아먹는 양날의 검이었다.

위장자 란슬롯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달려든다. 하지만 이미 마안은 갤러해드의 생명력을 충분히 빨아들인 후였다.

“solar eclipse(일식).”

쿵!

중력을 조절하는 최상위 마법이 란슬롯의 몸을 강타한다. 일순간 빛이 일렁거리며 빨려 들어갈 만큼 강력한 마력장이 만들어졌다.

란슬롯은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버텼으나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갤러해드는 마법이 끝나기 전에 그를 마무리 짓기 위해 대검을 손에 쥐었다.

‘생각을 해선 안 돼, 안 돼.’

떠오른다, 기억들이.

잘라 내야 한다, 모든 걸.

갤러해드는 스스로 기계처럼 움직이길 강요했다. 연민과 동정을 느끼기 전에 그의 목을 베기 위해. 비탄과 절규는 그 후에 해도 충분해.

끽끽끽-!

란슬롯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위협했으나 오히려 갤러해드의 결단을 부추길 뿐이었다. 갤러해드의 검이 휘둘러진다. 란슬롯을 즉사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품고서.

“그만.”

그러나 갤러해드의 검은 막히고 말았다. 퍼시벌, 위장자에게 당하지 않은 다섯 번째 기사 때문이었다. 갤러해드는 분노했다. 그에게 화풀이할 마음은 없었으나 자신의 결단이 막힌 탓에 고통이 몰려왔다.

“무슨 짓이냐.”

갤러해드는 뒤를 돌아봤다.

가웨인과 펠리노어가 거미줄에 묶여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둘의 실력은 원탁의 기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으나 퍼시벌은 둘을 가벼이 제압했다.

갤러해드는 침착히 숨을 고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위장자는 삼킨 자의 모든 걸 부순다. 혈연, 친구, 동료, 조국까지. 세상에 나가게 해선 안 돼.”

퍼시벌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게 맡겨 줘요.”

그의 미소는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다. 갤러해드는 그의 행동이 자조적으로 느껴졌다. 무얼 하려는 거지?

그때였다.

점점 퍼시벌의 몸이 변화되어 갔다.

그럴수록 갤러해드는 심장을 옥죄는 공포를 느꼈다. 동료들이 위장자로 변했음에도 분노만 느끼던 갤러해드는 지금 이 순간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공포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저 모습은 무엇인가.

방금까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저 남자는 어찌 저런 사악하고 꺼림칙한 몰골이 되었단 말인가.

갤러해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위장자’보다 더 음험한 기운을 내뿜는 해골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

할 수 있을까?

기사 셋의 몸에 기생하는 도플갱어.

죽이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 독한 놈들.

그냥 죽이는 게 수월할지도 모른다. 명분은 충분하다. 조금 슬프겠지만 감당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기사 셋이 놈들에게 당했을 때부터 운명이 결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나는 정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대범해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도박이더라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도박이다. 해 보지 않았다. 처음이다. 이 힘은 그때 이후로 처음 사용해 본다.

단지 품었을 뿐인데 정신이 오염되어 날 살인마처럼 만들었던 그 힘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형의검으로 펼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지만 방법은 이것뿐이다.

가웨인과 펠리노어를 우선 묶어 두고, 란슬롯을 죽이려는 갤러해드에게 걸어갔다. 나는 그의 검을 막아 세우며 말했다.

“내게 맡겨 줘요.”

당당히 미소를 지으며 믿어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쓸쓸한 웃음만이 나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힘이나, 그 힘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날 가득 채웠다.

이것은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힘, 표현하자면 ‘질병’의 힘이다. 분열하고 재생하는 게르반 형제를 감염시켜 죽였듯이, 기사들의 몸 안에 깃든 도플갱어들만을 죽일 수 있다면.

‘질병의 마물.’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난다.

메말라 가는 혈관, 허덕이는 굶주림과 사그라지는 살점,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시간.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백골의 손아귀가 보였다. 왼손에 메타소드는 볼품없는 꼬챙이가 되어 있었다. 날도 없고 찌르기엔 끝도 뭉툭하고 어떠한 특징도 없는 쇠꼬챙이.

힘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메타소드가 왜 이런 모습을 변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굳이 무기의 기능과 형태를 갖출 필요가 없는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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