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원탁의 기사들 (5)
위수 단비는 조용히 내 안에서 잠에 빠졌다. 녀석은 이런 힘이라도 내 ‘그릇’이 되어 줬다. 전과 달리 이성을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도 녀석의 도움이 컸다.
백골로 변한 내 몰골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갤러해드는 내 한마디에 뒤로 물러났다. 드래곤이 준 힘이라 정말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끽!
갤러해드의 마법이 사라졌다. 동시에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뜯고 가웨인과 펠리노어가 뛰어왔다. 기사 셋은 전력을 다해 날 죽이려 들었다.
그들이 대련을 할 때도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게 아니었다.
가웨인의 망치가 태산을 부수는 위압적인 힘으로 나를 찍어 누르고, 펠리노어의 검이 삭풍처럼 나를 베어 넘긴다. 특히 란슬롯의 검은 아주 놀라웠다. 어쩌면 그는 인간 중 최강이 아닐까?
“그만해.”
그러나 내겐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했다. 망치에 뭉개졌던 백골은 다시 일어났고, 펠리노어의 검에 조각났던 뼈는 조립되었으며, 란슬롯의 검에 뼛가루가 되어도 다시 뭉쳐졌다.
이 정도로 난 죽지 않는다.
고통도 희미했다.
그저 나는 죽일 뿐이다.
내가 이 강력하고 두려운 힘을 왜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건지 이유가 떠올랐다. 위험했다. 실로 이어진 조각난 다리 위를 걷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위태롭게 떨어질 것 같다.
저 나락엔 내가 서 있을 자리는 없겠지.
어쩜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전에 할 일은 해야겠다.
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도플갱어만을 죽일 수 있을까? 애타는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기사들까지 죽여 버리진 않을까?
그뿐만 아니라 바깥의, 영국의, 세계의 모든 생명을 말려 죽이기 위한 질병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모르겠다.
몰라. 그래도 뭐.
이젠 상관없어.
기사 셋의 검에 부서지고, 부서지고, 부서지던 나는 조용히 꼬챙이를 들어 그들의 심장을 찔렀다.
살점을 뚫는 게 아니다. 곁으론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질병은 곧바로 퍼져 나갔다.
도플갱어 수십 마리가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놈들은 몸 안에 기생하며 숙주의 고통과 죽음에도 달아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숙주의 생명과는 상관없이 제 생명만이 타올랐다. 질병의 힘은 도플갱어만을 감염시켜 녹게 했다.
[그랬나이까. 그랬나이까.]
녀석들이 말을 건다.
[그랬나이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시큰둥했다.
마물이 목숨도 구걸하는구나.
다시 한 번 꼬챙이를 찔렀다.
놈들의 비명이 더 거세졌다.
[용서는 무슨 용서.]
문득 말하고 나서 의아했다.
내가 지금 무슨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지? 도플갱어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갔다. 한 마리, 두 마리……. 사라질 때마다 아까웠다. 좀 더 비명을 느끼고 싶다.
재밌다. 작든 크든, 생명이 저물고 사라지는 건 재밌다. 좀 더 보고 싶었다, 더 죽이고 싶다.
마침내 도플갱어가 모두 사라졌으나 아직 내겐 남아 있었다.
재밌는 게 네 개나 더 있잖아!
다시 꼬챙이를 찌르려고 할 때였다. 내 뒤에서 아주 귀찮고, 싫고, 짜증 나는 게 느껴졌다.
“이럴 땐 빨리 등장하시네요.”
“이제 그만.”
저 못된 녀석.
원망스러운 조율자.
“그만해요. 그만하고 이제 벗어나요. 드래곤의 가디언이 어둠이 속삭이는 소리에 넘어가면 창피하잖아요.”
“죽여요.”
[죽여요.]
우리가 말했다.
“이자를 죽여.”
[이자를 죽여.]
사라져.
“너무 위험해.”
[너무 위험해.]
붉은 날개가 펼쳐진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될 뻔했어. 소멸하는 게 낫다.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 싫어.
*
정신을 차리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창밖의 해가 저물고 밤이 될 때까지 멍하니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미라 마물의 힘을 받아들이고 도플갱어들을 죽이는 것까진 기억했다. 그 뒤로 음, 빨간 날개가 생각나긴 하는데. 원장님이 왔었던가?
“몸도 정상이고.”
백골이던 몸은 원래의 말랑말랑한 살갗으로 돌아왔다. 원기가 빠져 독감에 걸린 듯 몸은 축 늘어졌으나 걱정했던 것보단 괜찮은 것 같았다. 밤이 되자 누군가가 병실에 찾아왔다.
기사 넷이었다.
그들은 내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으스댔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이후로 시간은 일주일이나 흐른 뒤였다.
솔로몬의 탑은 무사히 닫혔으며 캐멀롯은 폐쇄됐고, 그 안에 깃든 비밀들은 다른 곳으로 이양했다고 한다. 또한 나에게 이번 임무에 대한 보답으로 ‘기사단의 징표’를 줬다.
원래 갑옷이나 방패 따위에 붙이는 휘장이었으나 나한테 줄 땐 휴대폰 고리(펠리노어의 의견이었다)가 되어 있었다.
단지 장식뿐만 아니라 명예 기사단원으로 인정하는 증표이며,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영국에 공식, 비공식적인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고 했다.
12시가 넘어가자 원장님이 찾아왔다. 원장님은 내가 기억을 잃은 부분부터 말해 줬다. 빨간 날개를 봤다 했더니 정말 원장님이 찾아온 것이다. 내가 정신을 잃고 난 후 원장님의 조치로 사람의 모습은 찾았으나 마나가 심각하게 오염되었다고 했다.
주화입마와는 다른 상태인 오염을 정화하기 위해선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일곱 개의 신비한 약재가 필요하다며 당분간 약을 찾기 위해 떠난다고 했다.
나를 위해 드래곤 볼을 찾으러 가 주는 원장님께 살짝 감동했다. 직원을 다소 심하게 굴리긴 해도 역시 복지 하나만큼은 최고다.
*
다시 일주일이 흐르고 몸이 괜찮아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웨인의 단골 펍에 들렸다.
나는 기사 넷과 펍에 앉아 축구를 보며 생맥주를 마셨다. 평상복을 입은 기사들이 한 골에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니 저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느껴졌다.
“과연 유럽 제일이네요.”
맥주를 칭찬하자 가웨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축구 경기는 우리가 응원하는 홈 팀이 3 : 1로 리드했다. 펍의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항상 진지하던 갤러해드마저 상기된 뺨으로 응원가를 열창했다.
“미안해요, 무서웠죠?”
나는 갤러해드에게 넌지시 농담처럼 질문했다. 백골처럼 변한 내 모습을 갤러해드는 봤다. 그는 이따위 일로 트라우마가 남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물어본다면 답해 줄 수도 있겠지.
“지금 와서 말하자면, 그래. 살짝 지렸어.”
갤러해드가 말했다. 내 모습이 그렇게 무서웠나?
“캐멀롯에 붉은 날개가 펼쳐지자마자 위장자들이 모두 불타 없어지다니 말이야. 과연 드래곤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더군.”
그의 말을 듣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곱씹어 봤다. 갤러해드는 도플갱어를 죽인 게 원장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억을 삭제했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원장님이 세이렌의 힘을 이용해 갤러해드의 기억을 삭제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솔직히 백골의 내 모습은 문제될 게 많았다.
편한 게 편한 거지.
그날 축구는 홈 팀이 이겼다. 나는 가웨인의 집에서 하룻밤 잔 후에, 여왕님이 준비한 전용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각했다.
‘속도 멀쩡한데.’
원장님은 오염된 마나를 정화시킬 약제를 찾기 위해 어디론가 떠났다. 문제는 생각보다 난 괜찮았다는 것이다. 혹시 몰라 병실에서 몰래 힘을 발휘해 봤으나 전과 다른 건 없었다.
나는 컴퓨터로 영화를 검색했다. 으, 후유증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런 영화가 끌리네.
[악마를 보았다.]
그동안 잠만 자던 단비 녀석이 일어나 내게 말했다. 때마침 보고 있던 영화의 제목을 말하며 나를 멀뚱히 지켜본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잠을 청했다.
*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에 잠에서 깼다.
나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방금 꾼 악몽의 장면들을 되새겼다.
[악마를 보았다.]
단비가 계속 내게 영화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다 내 품으로 들어와 누웠다. 곧바로 단비는 잠에 빠졌다.
‘뭘까.’
분명 악몽을 꿨으나 이상하게 잊어버리기보다는 계속 기억하고 싶었다.
악몽엔 미라 마물이 나왔다. 첫 만남엔 그토록 무섭고 두려웠던 미라 마물이, 꿈속에선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받고 있었다. 녀석은 한마디만을 외쳤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
[사라지고 싶지 않아.]
후유증.
대수롭게 생각해선 안 되겠다.
몸과 기는 멀쩡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을지도…….
*
원장님은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관리실에서 여유롭게 지내려고 했으나, 뜬금없이 전혀 예상도 못한 녀석이 나를 괴롭혔다.
[영웅의 검을 얻은 자여, 영웅의 검을 얻은 자여.]
녀석의 속삭임은 귀를 막아도 들려왔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똥을 쌀 때도, 열받아 일찍 마물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도.
녀석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영웅의 검을 얻은 자여, 부디 만나야 할 소녀가 있다. 날 찾아와라. 영웅의 검을 얻은 자여.]
“징글맞을 놈!”
삼 일째가 되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놈의 뿔을 부러트리든 어떻게든 해서 입을 다물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녀석의 보호 등급은 ‘멸망 등급’의 마물들과 동일하나 위험한 녀석은 아니었다. 단지 여러모로 귀찮고 사악한 마물일 뿐이다. 드래곤마저 놈을 귀찮게 여길 정도로 말이다.
나는 녀석의 우리로 향했다.
다른 우리와 달리 삼엄한 경계와 마법적인 결계를 지났고, 마침내 우리의 문을 열자 하늘 세계인 구름 나라가 펼쳐졌다.
나는 오랜만에 ‘이동 골렘’을 타고 녀석을 찾아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청색 구름 위에 고고한 자세로 앉아 있는 놈을 발견했다.
“망할 녀석아, 왜 자꾸 불러?”
놈은 아마 내가 만난 마물 중에 가장 신기한 녀석일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순결의 상징, 고귀함의 짐승.
참 허울 좋은 녀석이었으나 실체는 달랐다.
[왔는가.]
그때와 달리 제법 체면을 차리고 있지만 내가 모를까 봐? 만나자마자 여자를 소개해 달라고 푸르릉 거리던 녀석아.
“지금까지 조용히 있더니 드디어 한계니? 왜? 또 영웅 시켜 줄 테니까 여자 소개해 달라고?”
녀석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다. 영웅의 계시자인 날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몇 년이 지났지.
조금은 달라졌는지도.
나는 짜증을 접어 두고 녀석에게 물었다.
“그래, 유니콘이 뭔 볼일이 있어서 날 찾는 거야?”
녀석이 대답했다.
[늙은 할망구가 없을 때가 절호의 기회이다. 부디 만나야 해. 뿔이 지끈거릴 만큼 도움을 요청하고 있어. 날 이곳에서 빼내 줘, 부디!]
“누가 도움을 요청하는데?”
[날개를 가진 소녀가…….]
“안 돼.”
내가 속을 거라고 생각했나.
애초에 ‘소녀’를 만나기 위해 우리에서 풀어 달라니, 머리를 잘 못 쓰는 녀석이다.
“제비족 같은 녀석. 한 번만 더 날 귀찮게 해 봐. 뿔을 반대로 꽂아 버릴 테니까. 아니면 반대쪽에 박든가.”
으름장을 놓고 가려던 그때였다.
[내 결의가 보이지 않더냐!]
순식간에 구름이 한 점으로 몰려든다. 백마 유니콘의 주변으로 몰려든 구름들이 녀석을 가리며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으잉?”
나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풍기는 기운, 뿜어내는 힘, 기묘한 공기.
저 녀석, 왜 ‘신수’처럼 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