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세계의 끝 (1)
원장님은 ‘세계의 끝’이라는 곳에 대한 위험성을 간단하게 설명해 줬다. 아홉 세계의 찌꺼기가 모이는 곳이니 만큼 예측 불허한 ‘쓰레기’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난 원장님이 말한 쓰레기들이 단어 곧이곧대로 쓰레기가 아니라 추상적인 의미임을 눈치챘다.
“다정 씨의 선택을 존중해 드릴게요.”
원장님은 이번 일이 상당히 위험하며 급한 일도 아니니 내가 원한다면 무리를 시킬 생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 결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차례라고 은근슬쩍 압박을 준다. 거절하면 원장님의 말대로 이번 일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앞으로 엄청 ‘눈치’을 줄 게 뻔했다.
“해 보겠습니다.”
게다가 나도 내 목적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각오는 되어 있었다. 내가 하겠다고 대답하자 원장님은 씩 웃으며 곧바로 세계의 끝으로 향하는 포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난 주의 사항이나 필요한 물건 등을 물어봤지만 원장님은 드래곤도 예측할 수 없는 곳이라 이번엔 차원 통신기를 통해 즉각 조언을 해 주겠다고만 했다. 난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같이 가자고 물어봤으나 원장님은 처음부터 직접 간다는 선택지는 생각해 두지 않았다.
“가디언을 이럴 때 쓰지, 언제 쓰겠어요? 호호.”
물론 로드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니 뭐니 합당한 변명은 있었으나 내 눈엔 날 부려먹으려는 상사밖에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포탈이 완성되었다.
세계의 끝으로 가기 전 저번처럼 차원 통신기가 망가지지 않기 위해 원장님은 특별한 보호 마법을 걸어 줬다. 이 마법은 대단한 거라 웬만한 공격으론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고 했다. 드래곤이 보장하니 이번엔 연락이 닿지 않아 고생하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재차 물어봤다.
“정말 연락이 끊어지지 않는 거죠?”
원장님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공간 자체가 ‘단절’되지 않는 이상은요.”
원장님은 걱정하지 말라며 포탈이 닫히기 전에 떠나라고 날 등 떠밀었다. 난 치과라도 가는 것처럼(물론 비교할 수 없이 지금이 더 고통스럽겠지만) 미적거리며 천천히 포탈로 향했다.
“느낌이 안 좋아요.”
사실 차원 통신기를 거듭 확인한 것도 이번 일에 앞서 강렬한 불길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불길한 예상은 거의 열에 아홉은 맞아떨어졌기에 더더욱 불안해졌다.
“닫힌다니까요. 자, 가요!”
“으엑!”
원장님은 미리 겁 준 것 같아 미안하다며 사실 그다지 위험하지 않으니 얼른 다녀오라며 포탈 너머로 날 ‘집어던졌다.’ 두 다리가 붕 뜬 불안정한 자세로 포탈에 휩쓸린 난 메스꺼움과 존재의 박탈감을 느끼며 공간 이동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상당히 먼 곳이라더니 무량성계에 갈 때처럼 이번 공간 이동의 기다림은 긴 편이었다.
“후우.”
마침내 공간이동이 끝나고 공간이 재정립된다. 난 넘어지기 전에 자세를 바로 잡고 무사히 착지했다.
“뭐야, 여긴.”
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위험한 곳에 도착했으니 주변부터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물의 힘을 끌어올려 비상사태를 대비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얼음?”
우선 보인 건 거대한 빙하와 내 발 아래에 보이는 동토의 대지. 북극처럼 보이지만 추위는 더욱 거셌으며 무엇보다 얼음들의 색깔이 무척 검었다. 예전에 한번 가 본 적이 있었던 ‘니플헤임’과도 같은 환경이다.
이 추위는 저항하고자 하면 더욱 괴롭히는 성질이 있어 난 아이스 독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런 환경에서 살던 아이들이라 서서히 매서운 추위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이상한 곳이군.”
빙설과 추위의 환경에서 얼마 걷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이 후덥지근해지더니 빙하의 뒤편에서 부글거리는 용암이 치솟았다.
이내 얼음의 대지가 활활 타오르는 불의 들판이 되었고, 하늘에선 잿빛 화산재가 내리기 시작했다. 단 몇 걸음만으로 북극에서 화산지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난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곳을 바라봤다. 시선의 끝에 빙하와 얼음이 가득한데, 내가 서 있는 곳은 포근이의 기운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용암지대다.
절대 양립할 수 없는 두 환경이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해군 대장들이 싸운 곳인가?”
난 실없는 농담을 하며 주변을 더 둘러봤다. 용암지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곧 드넓은 초원이 나왔는데, 자세히 쳐다보니 기이한 평야였다. 아니, 숲이라고 해야 할까. 잡초와 잔디인 줄 알았던 평야의 풀들이 사실 내 손바닥만 한 ‘나무’였다. 심지어 나무의 아래엔 눈곱만 한 풀들도 자라나 있었다.
곧이어 난 이 평원이 아주 작고, 넓은 숲임을 깨달았다.
“지랄 맞은 곳이네.”
작고 넓은 숲을 지나자 이젠 ‘무량성계’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나무와 풀들이 나타났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가장 높은 나무를 올려다봤다. 마치 작은 산처럼 거대한 나무, 이 위에 오르면 이 지랄 맞은 세계를 둘러볼 수 있겠지. 난 나무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갔다.
“아홉 세계의 찌꺼기가 모이는 곳이라더니.”
꼭대기에서 난 세계의 끝의 기묘하고 장대한 장관을 둘러봤다. 소름이 끼친다.
어떤 곳은 빙설로 뒤덮여 있고, 어떤 곳은 용암이 끓어오른다. 그 뒤론 내가 올라선 나무만큼 거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고, 작은 숲의 세계도 뒤섞여 있으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환경들도 보였다.
이곳은 엉망진창 뒤죽박죽, 아홉 세계를 이루던 환경의 찌꺼기들이 뒤섞여 아이가 아무 색깔이나 섞고 만든 찰흙 덩어리처럼 볼품없고 정신 사나운 세계였다.
[나, 행복해.]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와중에 단비가 깨어났다. 녀석은 공간이동 여파에 잠시 몸을 움츠려 있다가 이제야 깨어났는데, 일어나자마자 내 어깨를 잡고 방방 뛰기 시작했다.
황금털빛의 위수, 원숭이 단비는 내가 보는 관점과 달리 이 세계가 무척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저기로 가자! 저기로 가자!]
단비가 가리킨 곳은 주변에서 가장 크고 거대한 빙하가 우둑 솟아오른 곳이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방향을 정하고 나무에서 내려왔다. 이번 일은 녀석을 위한 선물이다. 녀석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야지.
빙설에 도착하자마자 단비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거대한 빙하에 몸을 던졌다. 물체를 통과하는 위수인 단비는 빙하에 들어가 한참 있다가 나왔는데 녀석은 입에 박하사탕 같은 구슬들을 잔뜩 물고 있었다.
[오호호. 얼마나 맛있게요!]
아마 저게 내가 예전 거인에게서 훔쳤던 ‘세계의 조각’이라는 거겠지. 다만 그것과 달리 저건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을 풍기고 있다. 단비는 오홍홍거리며 구슬들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이 무척 맛있어 보여 녀석의 입에서 구슬 한 개를 뺏어 왔다.
[아앗!]
녀석처럼 입에 넣고 오물거렸는데, 차갑기만 할 뿐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을 얻을 수도 없었다.
분명 강한 기운은 느껴지는데 마치 대자연의 일부처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종류 같았다. 단비는 한참동안 빙하에서 헤엄치며 하얀 구슬들을 주워 먹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단비가 지루한 표정으로 나오더니 입에 문 구슬들을 퉤하고 뱉었다.
[이제 맛없어. 딴 거 먹자.]
이 녀석, 이게 무슨 아홉 가지 맛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네. 단비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조를 때였다.
[다정 씨.]
통신기가 작동하며 원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하고 있어요. 니플헤임의 영양은 충분히 섭취한 것 같네요. 지금처럼 그가 원하는 대로 다른 조각을 먹이세요.]
“네.”
난 원장님 말대로 단비가 원하는 곳을 향해 데리고 갔다. 거대한 빙하 다음엔 마그마가 쏟아지고 있는 화산이었다. 빙하 때와 마찬가지로 단비는 기뻐하며 마그마에 몸을 던졌다. 이내 붉은 구슬을 잔뜩 물고 나왔는데, 예상대로라면 저게 ‘무스펠헤임’이란 세계의 조각일 것이다.
“이대로만 간다면 쉬운 일일 텐데.”
단지 이것만 반복한다면 단비 녀석 간식 먹이는 일 수준이겠지.
단비는 한참 무스펠헤임의 조각을 삼키다가 또 지겨워졌는지 이젠 작은 숲을 향해 갔다. 스바르트알프이라는 곳인데, 원장님이 말하길 야누스와 관련이 있는 세계라나.
어쨌든 그곳에서도 단비는 평야를 헤엄치며 요상한 색깔의 구슬을 주워 먹었고, 이때까진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있지. 저걸 먹고 싶은데.]
문제는 다음 ‘세계의 조각’이었다.
세계의 끝은 아홉 세계의 찌꺼기가 섞인 곳이나 그 크기로 보자면 얼음과 불, 거인과 난쟁이들의 세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제 남은 조각은 다섯 개였는데 이때부터 큰 문제가 발생했다.
“…저길 들어가고 싶니?”
단비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곳을 찾아냈다. 그건 ‘지하’로 향하는 동굴이었다. 문득 그곳에서 요계에서 겪었던 무저갱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헬하임이네.]
원장님이 말했다.
“헬하임?”
[네. 저승이라고도 부르죠.]
저곳은 시체들의 세계, 헬하임의 조각이 떨어진 곳이라고. 애초에 저승이란 개념이 실존할 줄이야. 깜짝 놀라 원장님에게 되묻자 지구인이 생각하는 ‘사후세계’의 개념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헬하임은 우주의 수많은 ‘저승’ 중에 한 곳이며 가장 큰 저승이라고 했다. 그곳은 시체들과 악령들의 고향이자 사악한 것들의 둥지라고 하였는데, 솔로몬의 탑의 마물들 중 몇몇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죠?”
[조심해요. 그 외엔 딱히 해 줄 말이 없네요.]
아니, 조언만 들으면 안전할 거라면서 그새 말을 돌리시네. 원장님은 헬하임은 아홉 세계 중 가장 특이한 곳으로, 우주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곳이니 단지 떨어져 나온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꼭… 먹어야 하는 거니?”
[응응!]
단비가 내 싫은 마음을 눈치채고 애교를 피운다. 난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젠장, 미리 저승 체험(원장님의 말에 의하면 내가 생각하는 저승은 아니지만)해 본다고 쳐야지.
난 어쩔 수 없이 단비를 데리고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지하 구멍을 향해 걸어갔다.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 긴장한 나머지 방광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음.”
처음엔 분명 공포와 두려움.
하지만 막상 지하 너머로 들어가자 요상하게 포근해졌다. 주변에 보이는 건 어둠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러지.”
그러나 내 몸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어떤 힘’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잠재우려고 했으나 마치 김치찌개를 앞둔 내 식욕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난 그 힘을 발산시켰다.
[찾았다!]
단비는 어둠을 돌아다니더니 무언가를 찾아왔다. 가까이서 보니 단비의 손에 오히려 어둠보다 더 어두워 형체를 식별할 수 있는 구슬 몇 개가 들려져 있었다. 난 재빨리 망설이지 않고 녀석의 손에 들린 검은 구슬을 주워 먹었다.
그것도 아드득 깨물어 맛있게 먹었다.
에에엑-!
단비가 기겁하더니 내 뺨을 쳐 버린다. 음식 앞엔 친구고 뭐고 없나 보다.
[당신이 왜 먹어!]
“하나만 먹은 거야, 하나만.”
난 ‘거대한 낫’으로 변한 메타소드를 등에 멘 채 단비를 진정시켰다. 잠깐, 한 입만 더 먹고.
아드득![아니, 왜 먹냐고!]
단비의 손에 뺨을 맞는 와중에도 난 단비가 들고 온 검은 구슬을 모두 입에 털어 넣고 씹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다. 이건 참을 수 있는 수준의 식욕이 아니야.
“이거 참.”
사실 헬하임의 조각이 이처럼 달콤한 이유를 난 알고 있었다. 지금 내 몸을 잠식한 이 마물의 힘은 혜연, 용의 딸마저 위협했던 사악한 사신의 힘.
“미안. 맛있네. 이거.”
그림리퍼,
그는 죽음을 삼킨다.
즉,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체들의 세계, 죽음과 밀접한 헬하임의 조각은 그림리퍼에겐 별미의 음식이 아닐까. 음, 그런 의미로 한입 더.
[이익! 몰라. 나 따라오지 마!]
화난 단비가 어두운 구멍, 더 멀리 도망쳤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녀석을 뒤따라갔다. 이젠 뺏어먹지 말아야지. 아, 하나만 더 먹고.
“잠깐.”
난 문득 등골에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어렴풋이 느꼈던 ‘불길함’. 그림리퍼의 힘은 죽음을 쉽게 감지하게 만들었다. 헬하임의 조각을 먹어 더 강렬하게 발휘돼서 인지, 점점 그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곳, 헬하임의 떨어진 세계엔 단비와 나만 있는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