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태초 이전
며칠 뒤 나부가 찾아왔다. 문을 열고 내게 인사를 건네는 나부. 그 탓에 관리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난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여어, 히사시부리.”
미국 영 갱스터 래퍼처럼 무지개로 물들인 머리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설렁설렁 건네는 인사도 크게 놀랍지 않았다. 그가 그런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요즘 유행하는 귀가 들썩거리는 장난감 인형 모자와 바비 인형 두 개를 손에 쥐고 테디베어를 등에 멘 그의 꼴은, 아무리 그래도 상정 외의 모습이었다. 드래곤에게 큰 무례가 되겠으나 물어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그게 뭡니까.”
어린애처럼 장난감을 두르고 나타난 오타쿠 용. 그는 내 질문에 히죽 웃으며 손에 쥔 바비 인형을 흔들며 내게 자랑했다.
“한정판이야. 딸에게 줄 선물이지!”
심지어 장난감 모자의 귀를 쫑긋 세우기까지 한다. 난 탐탁지 않은 그의 모습에 코를 훌쩍이며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서 왜 당신이 쓰고 계십니까. 선물하려면 포장을 해야죠.”
“귀엽지. 탐나서 이건 내가 하고, 하나 더 사 주려고.”
그렇다 치자.
딸을 위한 선물이라고 했는데 내가 알기론 혜연은 지금 질풍노도의 시기, 장난감 따윌 좋아할 나이가 아니다.
“따님 나이가 몇 살인지 아십니까.”
“어리고 어린 열아홉 살이지.”
난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꾸짖듯이 말했다.
“장담컨대 그 장난감들보다 요 근처 화장품 가게에서 틴트나 하나 사 주는 게 훨씬…….”
“닥쳐라, 이놈.”
그 순간, 오타쿠 용이 내게 들고 있던 바비 인형을 휘둘렀고, 머리에 맞은 난 시야가 컴컴해지며 기절하고 말았다.
*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기절했었던가?
겨우 바비 인형 따위에 맞고 기절하다니, 역시 용은 용이다.
“정신이 들어요?”
옆을 보니 원장님과 나부가 앉아 있었다.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푸른색의 빛이 발광하고 있는 작은 동굴이었다. 두 드래곤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난 딱딱한 돌바닥에 누워 있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나부를 노려보며 말했으나 원장님이 대답했다.
“이곳은 레테의 강물이 깃든 샘, 보안을 위해 나부가 험한 방법을 썼나 보군요.”
“아이씨,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지.”
대체 한정판 인형의 위력이 얼마만큼 강하기에 아직까지 머리가 얼얼했다. 원장님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어느 세계의 부서진 조각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곳이라는데, 나는 물론 원장님조차 알지 못하는 곳이라고 했다. 오로지 나부만이 아는 곳으로, 그는 날 믿지만 누설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기절시켰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다기엔 그가 날 기절시키기 전 말했던 ‘닥쳐라, 이놈’엔 제법 감정이 섞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가 있나.
돌바닥에 누워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 나부가 물이 담긴 유리잔을 건넸다. 받아든 난 단지 평범한 물이 아님을 금방 눈치챘다.
“레테의 강물로 빚은 술이다. 네 영혼에 깃든 모든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 줄 것이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술이라고 해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다. 기절한 탓인지 갈증이 심하기도 하다.
난 망설이지 않고 유리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고. 그 순간 또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일어나니 방금 전 상황 그대로 난 돌바닥에 누워 있고, 두 드래곤은 의자에 앉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의 기절이라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정신을 차린 난 가만히 앉아 내 안에 생겨난 변화들을 찾고자 집중했다.
레테의 강물, 마시면 내가 모르고 있던 기억까지도 이끌어 내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의 강물. 난 내가 누군지 알아냈을까? 그 질문을 할 대상은 나밖에 없다. 두 드래곤도 그걸 아는지 내가 고요한 명상을 하도록 기척을 내지 않았다. 난 지금까지 ‘나’로서 경험했던 모든 기억을 더듬으며, 아주 오래된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김치찌개를 좋아하게 된 이유도 떠올랐고, 인어공주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생각났다. 원장님과의 첫 만남과 친구들을 죽이던 고블린의 모습도 생생했고, 심지어 인간이라면 결코 기억하지 못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갓난아이 때의 기억마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십자가와 거룩한 조각상, 수녀님의 따뜻한 손의 감촉. 그게 나의 최초의 기억. 가장 최초의 기억에서조차 난 혼자였다. 더 이상은 아무리 집중해도 그 이전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기억이 끝이다. 아주 깊은 기억에서도 난 인간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난 인간이었다는 걸, 내 기억들이 증명해 준다.
가장 최초의 기억을 떠오른 직후 눈을 떴고, 난 확실하게 느꼈다. 비록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나 방금 전 내가 경험했던 모든 기억들은 내 삶이 다시 한번 반복되는 것과 같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뿌리를 찾기 위해 온 곳에서 난 다른 걸 느껴야 했다. 마물원에서 일하기 전의 나의 기억과 원장님에게 반강제적으로 시작했던 마물원 직원으로서의 기억. 둘은 차가움과 뜨거움, 얼음과 불, 매서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길거리와 따뜻한 전기장판이 켜진 푹신한 침대만큼 차이가 있었다.
내 인생은 원장님에 의해 달라졌다. 그걸 깨닫고는 있었으나 내 삶을 다시 돌이켜 보니 변화가 너무나 확연하게 다가왔다.
“뭐 알아냈어요?”
이해할 수 없는 뭉클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원장님이 질문했다. 그들은 나만큼 내 정체에 대해 궁금한 듯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난 인간이었다.
난 뺨을 실룩이며 대답했다.
“쯧, 난 인간이었나 봐요.”
그러자 나부가 말해 줬다.
그래, 넌 인간이라고.
그러나 특별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고.
무슨 이유에서 그러냐고 물어보자 나부는 대답하지 않았고, 원장님은 아직 섣부른 판단이라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만약 자신들이 틀렸다면 내게 우주적인 거대한 책임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며 말을 아끼겠다고 한다.
결국 알아낸 건 내가 인간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다른 점은 인간이지만 특별한 인간이라는 것.
거참, 마물 공장 옆 폐가 같은 원룸에서 지낼 땐 내 인생에 있어 ‘특별함’이란 단어는 오로지 즐겨 하던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 등급밖에 없었는데. 게임 속, 우연히 주운 특별한 레어 아이템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특별하다니. 격세지감일세.
돌아갈 때도 나부는 친절하게도 바비 인형을 추켜들었으나 난 그의 제안을 거부하며 원장님의 마법에 의해 잠을 자는 걸로 대체하기로 했다.
마물원으로 돌아오니 일주일이나 지나 있었다. 시공간이 다른 게 아니니 두 번의 기절과 한 번의 명상에서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피곤할 것도 없었기에 그동안 밀린 마물원 일을 처리했다. 마츄 녀석들 털을 손보고 새로 구출한 마물 녀석들이 환경에 적응하도록 유도하는 등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나자, 아침에 돌아왔으나 벌써 늦은 밤이 되고 말았다.
“원장님.”
퇴근을 준비하면서 난 넌지시 원장님에게 말을 꺼냈다. 낯간지럽기에 말을 내뱉고 곧바로 도망칠 수 있도록 짐은 모두 싸 놓은 상태다.
“고마워요. 지금까지 모든 게 다 고마워요. 원장님이 날 직원으로 택해 줘서, 가디언으로 명해 줘서 흐리멍덩하기만 하던 제 인생이 보다 복잡하고, 다이내믹해지고, 스릴 있고, 신나졌어요. 그냥… 고마워요.”
레테의 강물을 마신 후 내 인생을 돌아보며 느꼈던 것이다. 마물원에서 일하며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시답잖고, 시시하고, 재미없고, 먹구름이 가득하고, 좁고, 약하던 삶이 순식간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힘든 일도 많았으나, 그로 인해 내 삶은 더 충만해졌다.
내가 원장님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과는 별개로 그저 고마움을 말해 주고 싶었다.
말을 내뱉은 후 난 후다닥 도망쳤다. 풍종도보의 경공으로 밟으며 도망쳤는데도 내 뒤에서 말하는 원장님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하게 들려왔다.
“나도 고마워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웬일로 야옹이 녀석이 돌아와 캣타워에서 자고 있었다. 난 녀석의 옆구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무리 수상한 녀석이라도 기본적으로 고양이라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싫어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을 안아 줬다.
*
정다정, 그가 마신 레테의 술은 한 잔이 아니었다. 그가 쓰러진 후 나부는 ‘용의 파피루스’을 펼쳤다. 나부의 힘은 기록이다. 레테의 술을 마신 자의 영혼에서 새어 나오는 기억들을 그는 읽을 수 있었다.
나부는 첫 잔을 마신 정다정의 영혼에서 새어 나오는 ‘인간의 기억.’을 기록했다. 그러나 최초의 기억에 이르러, 새어 나오는 기억이 멎고 말았다.
‘다른 기억이 있는 모양이로군.’
기억이 끊겼다면 자신이 알았을 터, 기억이 멎었다는 건 한 잔의 레테의 술로 이끌어 낼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는 뜻이다.
나부는 잠든 그의 입술에 두 잔째 술을 흘려 넣었다. 첫 잔이면 인간의 기억, 두 잔이면 영웅의 기억까지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상하군.”
그러나 두 잔의 술로도 멎은 기억은 이어지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던 나부는 세 잔째 그의 입술에 술을 흘려 넣었다. 예상한 바였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면 다섯 잔까지도 기억을 이끌어 내지 못하리라.
세 잔이면 짐승의 기억을 이끌어 내나, 그의 영혼은 멎은 기억을 토해 내지 않았다.
나부가 네 번째 잔을 가져온다.
넉 잔이면 불가지해의 초월자들의 기억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결국 이 녀석은 신이었던 모양이로군.”
그는 다섯 번째 레테의 술을 가져왔다. 이제 이 술을 마신다면 그는 신으로서의 기억을 되찾게 된다. 잊힌 기억, 아마 대전이로 분리되고 조각내어 사라졌던 잊힌 신 중 하나겠지.
나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그러나 레테의 술을 마셨음에도 그의 몸에 멎은 기억은 꽉 막힌 채 물꼬조차 트이지 않았다.
레테의 강물은 절대불변의 법칙이다. 다섯 잔만큼의 양은 태초 이래, 그 어떤 신조차 망각의 저주에서 빠져나와 제 이름을 찾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이자는 다섯 잔의 술을 마셨음에도 이름을 되찾지 못하는 거지?
나부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으나 너무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바로 생각을 돌려 그가 어쩌면 특별한 인간일지도 모른다고 단정 지었다.
용의 기록에서 단 한 번,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테의 강물로도 이름을 되찾지 못한 유일한 존재, 그자는 인간으로서 신이 된 영웅 ‘솔로몬’이다. 그처럼 운명에서 이탈한 존재들은 레테의 강물로도 기억을 수집할 수 없었다.
나부는 그 후 기록을 포기하고 몹시 궁금해 하던 파르바티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그는 어쩌면 솔로몬과 같이 운명 이탈자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또한 장난스럽게 자신이 떠올린 터무니없는 가정 또한 말해 줬다. 그러자 현명한 용들의 주술사마저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럴 리가 없어. 시기가 맞지 않아.”
“그래, 역시 아니겠지.”
파르바티는 잠든 자신의 가디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가롯이 아니라, 신의 재목이었나. 어떤 신이 될진 운명만이 알겠지.”
파르바티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물론 그 이전, 자신마저 혼선된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땐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었다. 신비한 힘을 지녔다고 생각했을 뿐, 설마 신의 재목이었을 줄은. 그런 자였다면 이리 섣불리 가디언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거라고 파르바티는 생각했다.
“비범한 자이긴 했어.”
그러나 신의 재목임이 밝혀졌음에도 파르바티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드래곤마저 놀랐던 기묘하고 신기한 자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망각 이전의 존재는 아니겠지만.’
파르바티는 괜히 나부가 했던 말도 안 되는 가정이 신경 쓰였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에 기분 나쁜 찜찜함으로 남았다.
레테의 강물이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는 솔로몬처럼 운명을 이탈한 자만 있는 게 아니다.
레테는 태초 이후의 우주의 모든 기억들이 휩쓸리는 망각의 강. 그러니 ‘태초 이전의 존재’는 기억하지 못한다.
태초 이전의 존재.
그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