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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28화 (228/258)

#228화 악마 (4)

마침내 지평선 너머로 놈의 모습이 보였을 때 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수많은 경험으로 새겨진 반사적인 행동, 내가 먼저 전력을 다해 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 놈은 얕볼 먹잇감이 아닌 결국 처절하게 싸워야 할 상대라는걸. 검은 뿔과 박쥐의 날개를 가진 검은 악마에게 붉은 대검을 든다.

“대염홍식.”

홍아가 붉은 송곳니로 펼치는 불꽃의 숨결이라면 확장된 마나로 인해 내 키만큼 커진 대검으로 휘두르는 이 검劍의 묘리는 광대함에 있었다. 지금까지 굳이 이만한 힘을 담을 필요가 없었다. 화살처럼 쇄도하는 홍식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저 검은 뿔의 악마에겐 홍식은 촛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화르르!

대검은 심지였다.

날 발화점으로 시작하여 심지를 거쳐 막강한 화염이 치솟았다.

검붉은 하늘과 불타는 대지의 지옥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내뿜는 화염에 연기가 피어오르며 재가 되어 휘날린다. 난 이 지옥의 불보다 뜨거운 불꽃을 담아 놈에게 휘둘렀다. 마치 태양의 흑점이 폭발하듯 엄청난 화염의 폭풍이 오로지 놈을 태우기 위해 휘몰아쳤다.

검은 뿔의 악마 또한 내 공격에 대비하여 무언가 힘을 펼치려고 했으나 주변을 휘감은 화염 폭풍에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타들어 갔다. 난 내 안의 빈 공간이 생김을 느꼈다. 강력한 공격인 만큼 마력의 허덕임과 갈증이 생겨났다.

“하아.”

난 숨을 몰아쉬며 화염 폭풍이 자아내는 파멸을 가만히 지켜봤다.

이게 한 개인, 하나의 생명이 만들어 낸 파괴다. 흉악한 산불처럼 드넓은 숲을 순식간에 재로 불태울 이 힘이 내 손에서 펼쳐졌다. 다짐했다. 절대 이 공격은 ‘지구’에선 펼쳐선 안 되겠어. 소방차 수십 대라도 불 끄기엔 모자랄 거야.

강대한 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 기이하게도 저 안에서 재가 되어 타들어 가는 검은 뿔의 악마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다가올 현상을 대비한다. ‘해치웠나?’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평범한 상식으론 결코 이해 못 할 일,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난 내 감을 믿기로 했다, 지금의 나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끝이 나지 않았다.

파삭!

예감은 빌어먹게도 맞아떨어졌다.

순식간에 막대한 화염이 사그라들더니 마침내 산불에서 촛불로 바뀌어 사라졌다.

그리고 화염이 남기고 간 재 가루의 흔적에서 놈이 몸을 일으켰다. 놈은 온몸이 불타올라 진물을 쏟아 내고 날개는 불타서 재가 되었으며, 건재한 건 이마에 난 하나의 검은 뿔밖에 없었으나, 무척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던 난 검을 내려놓았다.

놈이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넌 무슨 악마지?”

놈의 태도는 기이했다. 다짜고짜 치명상에 이르는 공격을 한 내게 마치 아침 인사를 나누듯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으며 어떤 원한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라면 당장 쥐어 패려고 덤벼들었을 텐데.

겁을 먹은 건 아니다. 그렇담 제 몸을 불태웠던 공격조차 아무렇지 않다는 자신감, 여유라는 건가?

“또 그러네.”

기습이 통하지 않았다.

이제 놈과의 싸움은 처절해진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될지도 모르지.

“다른 놈도 나보고 악마라던데.”

그러니 대화라도 나눠 보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평화적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치열하게 싸우기 전에 약간의 대화 정도야.

"그래, 나 악마다. 그래서 어쩔래?"

붉은 뿔의 악마도 그렇고, 어째 만나는 악마마다 날 악마라고 부른다.

내가 아무리 악랄하게 놈들을 죽였긴 했어도 추상적인 개념으로 악마라고 부르는 건 아닐 것이다. 역시 나더러 자신처럼 악마냐고 물어보는 거겠지. 이제 난 인간이라 부르기엔 어폐가 있을 정도지만 확실히 악마는 아니었다. 거기다 악마라는 종족도 지금 처음 만나며 내 안에 깃든 마물 놈도 솔로몬의 탑의 악마니, 저놈들 같은 악마는 아니다.

“탑에서도 너와 같은 악마는 보지 못했다.”

놈은 진물이 터져 나오는 끔찍한 모습으로도 태평하게 나와 대화를 나눴다.

“분명 느껴지는 기운은 악마이나.”

놈이 제 이마에 난 뿔을 가리키며 말했다.

“뿔이 없으니, 기묘한 악마로구나.”

난 어깨를 으쓱하며 내 이마를 매만졌다.

사실 뿔이란 거, 나게 하려면 얼마든지 나게 할 수는 있다.

그래 봤자 악마의 뿔이 아니라 마물의 뿔이지만, 눈이 시뻘게지거나 머리가 하얗게 세는 건 이해해도 이마에 뿔까지 달고 다니고 싶진 않았다.

“용건이 뭔데.”

놈의 의연한 태도에 잠자코 대화를 하려고 했으나 별다른 말은 없었다.

가만히 날 바라만 볼 뿐이다. 난 한숨을 내쉬며 힘을 끌어올렸다.

그때, 갑자기 놈이 내게 손을 뻗었다. 공격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강한 악마여.”

난 놈의 손에 들린 물건을 확인하고 놈의 눈을 마주했다. 어떤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놈이 꺼내 보인 건 한 개의 목걸이였다. 쇠줄로 만들어진, 아무런 장식이 없는 형편없는 목걸이. 이내 놈은 내게 목걸이를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 든 난 목걸이를 받자마자 느껴지는 기묘한 힘에 인상을 찌푸렸다. 목걸이를 손에 쥔 후,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나기 시작한다. 마법인가? 익숙한 기운이라 곰곰이 생각해 보던 난 저 목걸이에서 원장님의 마물 우리, 흉포한 마물들을 가두던 쇠사슬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는 속박 마법. 아마 이 목걸이는 대상을 속박하거나 억제하는 마법이 깃든 아티팩트겠지.

“무슨 의미야? 프러포즈?”

어떤 도구인진 알았으나 아직까지 내게 준 의도를 모르겠다.

당연히 호의로 건넨 선물은 아닐 테고, 인상을 구긴 채 놈을 쳐다보니 시꺼멓게 탄 얼굴에 하얀 이만을 드러내며 놈이 웃었다.

“강한 악마여, 나의 기사가 되지 않겠나?”

“뭐? 기사? 잠깐, 네 편이 되어 달라고?”

“날 보좌하는 기사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주마.”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다. 나한테 기사가 되어 달라는 말의 뜻은 알기가 쉬웠다. 자기 편이 되어 달라는 거잖아? 설마 이렇게 반응할 줄이야. 놈이 이상하게 태연했던 이유는 어이없게도 날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악마라는 종족을 처음 만나기에 원체 이렇게 비범한지 아니면 그냥 멍청이인지 난 이해하지 못했다. 주위에 널브러진 시체만 보더라도 내가 악마들을 죽이기 위해 왔으며, 화끈한 선제공격을 받았으면서도 내게 이런 제안을 하다니.

난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말을 듣고 쥐어 팰지, 아니면 그냥 냅다 팰지 고민한 것이었으나 내 모습이 놈에겐 제안에 대한 고민처럼 비추어진 듯했다. 놈이 말했다.

“난 파리대왕의 왕좌를 이었다.”

“와아!”

뜻밖의 말에 난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세상에, 파리대왕이래!

“어떤 파리? 똥파리, 가파리, 초파리…….”

“너의 그 시건방진 태도 또한 상관없다. 보상 또한 충분히 주도록 하지.”

놈은 날 포섭하고자 충분한 대가를 준다고 날 꼬드겼다.

난 머리를 긁적이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 해 줄 건데?”

놈이 말한다.

내가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긴 듯했다.

난 악마도 뭣도 아니지만 정말 날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기사가 된다면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거론하기 시작했다. 난 잠자코 그의 말을 들으며 악마에 대해 점점 이해를 했다. 악마라는 게, 왜 악마인지 깨달았다. 원시시대 때부터 인간들이 두려워했던 악마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면모를 대변하는 존재 같았다. 동시에 별거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그의 제안은 욕망의 극대화였다. 원하는 걸 먹게 해 주고, 원하는 걸 가지게 해 주고, 무엇보다 마음대로 파괴하고 살육하고 도륙하여 힘을 키우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악마와의 거래,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럼으로 넌 마계의 부흥자가 되어 새로운 마왕의 첫 번째 권속으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난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운뎃손가락을 기운차게 추켜올리며 외쳤다.

“좆 까!”

원장님의 번역기는 대단했다. 당황한 듯 우두커니 멈춰 서서 점점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놈의 꼴을 보아하니, 확실히 내 말은 담긴 뜻 그대로 놈에게 전해진 듯했다. 의연하던 놈, 지금까지 잠잠한 수면 같던 기운이 폭풍우를 만난 것처럼 격하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난 점점 원래의 몸을 되찾는 검은 뿔의 악마를 지켜봤다.

온몸이 불타 진물이 터지는 꼴에서도 태연했으니 당연히 자가 복구가 가능했었겠지.

극한으로 이끌어 낸 샐러맨더의 화염이 통하지 않았으니,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우선 다른 놈들처럼, 놈에게 이 힘이 통하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붉은 대검은 새로이 이끌어 낸 힘을 받아들여, 볼품없이 작아지고 가늘어져 마침내 꼴쟁이처럼 변했다. 그러나 느껴지는 기운은 오히려 휘몰아치는 화염보다 사나웠다.

*

놈은 가만히 내 공격을 맞기만 했다.

그러나 얼리고, 부수고, 꿰뚫고, 감염되고, 중독되고, 뜯기고, 찢기는 와중에도 순식간에 몸을 회복시켰다. 놈이 마치 내 힘을 재단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섣불리 ‘그 힘’을 꺼내지 않으며 놈을 상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놈도 반격을 가했다. 단지 주먹을 내지르고 발을 차는, 이렇다 할 기술이 없는 단순한 육탄전이었으나 놈의 주먹질은 산을 부수고, 발차기는 땅을 가를 위력을 지녔기에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하아, 개싸움이 따로 없네.”

풍조도보의 경공으로 잠시 물러난 난 놈의 손아귀에 뜯겨 나간 허벅지에 봉황의 기를 흘려 넣었다. 놈의 믿을 수 없는 재생력, 얄궂게도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 서로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히며 격하게 싸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이 힘을 결정지을 건, 힘의 소모. 내가 놈보다 더 강하고 넓은 그릇을 가졌느냐, 아니면 놈이 나보다 더 많은 마나를 지녔느냐의 싸움이다.

아니면…….

“서로 죽이기 힘든 몸이니 그냥 한 방에 끝냅시다.”

놈의 힘을 완전히 압도한 힘이라든지.

난 슬그머니 녀석을 불렀다.

녀석, 애옹애옹. 부르자마자 내 그림자에 나타나 울음소리를 낸다.

이젠 어떻게 지옥 너머까지 따라왔는지 의문조차 들지 않는다.

야옹이는 원래 그런 녀석이니.

원장님은 규명되지 않는 힘이라 사용을 금지시켰다. 실제로 이 힘을 펼칠 때마다 난 알 수 없는 부작용과 현상을 겪었다. 그럼에도 놈을 상대함에 있어 이 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째서 나와 같다고 여기지?”

슬슬 ‘그림자’를 불러올 때,

놈이 말한다.

“보아라.”

검은 뿔의 악마가 하늘을 바라본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봤다.

“이래도 너와 내가 같더냐?”

하늘에 이상한 게 있었다.

검붉은 하늘에 생겨난 ‘엑스 X’.

그 순간, 난 깨달았다.

내 몸에 새겨진 엑스의 표식.

“점점 허무함을 느낄 것이다.”

그림자가 물러간다.

또한, 내 힘의 모든 게 사라진다.

그릇에 가득했던 마력도, 마물의 힘도 점점.

“파리대왕의 권능은 만물을 부패시킬지니.”

그의 힘이다.

그의 표식 때문이다.

“신마저 피하지 못할 저주이다.”

약해졌다. 부패니, 뭐니 이해할 수 없는 힘으로 내 힘은 약화되어 야옹이의 힘조차 끌어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텅 빈 것 같다. 마물의 힘도 사라졌고, 지금까지 날 충만하게 채워 주던 마력도 사라졌다. 허무했다. 모든 게 사라져, 남은 게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달랐다.

“네가.”

전에 비하여 개미처럼 약해진 난, 전에 비하여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불쾌하고 꺼림칙하며 짜증 나고, ‘신나고 희열 있는’ 감정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네가 신부님을 죽였구나.”

X, 김정호 신부님의 이마에 새겨진 표식.

놈이 죽였다. 검은 뿔의 악마가 죽였다. 선량하고 착한 신부님과 사제들을 죽였다. 머리가 어지럽다. 힘은 약해졌어, 이길 수 없음을 알아. 그런데도 왜 난 피하지 않는 걸까. 도망치지 않는 걸까. 왜 앞에 서 있는 증오스러운 놈을 당장 찢어 죽이고 싶어 하며, 그럴 수 있다고 믿게 된 걸까.

[아아, 나의.]

텅 빈 내 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난 그게 야옹이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내게 말을 걸었던.

야옹이의 목소리.

[왕이시여.]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들려오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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