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천계 (6)
붉은 날개의 용이 허상이란 건 알았다. 그러나 언젠가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용의 브레스가 눈부신 빛과 더불어 날 불태우고자 뿜어졌을 때, 난 지독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결코 단순한 환상이나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용의 브레스는 내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지옥업화의 불꽃처럼 살과 뼈를 태우고, 두 눈을 터트렸으며, 이빨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탔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강렬한 고통인가?
“개새…….”
욕을 내뱉기도 전에 성대가 불타 소리를 내지 못했다. 장기마저 검게 익어, 죽음에 이르는 큰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예상 못 한 고통에 치가 떨렸을 뿐 내가 죽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환상이 아님을 아는 것과 동시에 저 원장님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확실히 허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건 내가 보고 느꼈던 원장님의 과격한 모습, 두려움을 느꼈던 장면의 되풀이였다. 진짜 용이었다면 난 지금처럼 버티지도 못했다. 결국, 음양이기병이란 기괴한 호리병으로 만들어 낸 허상은 현실을 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크아악-!
불에 휩쓸려 타 버린 살점이 새로이 생겨났다. 난 성대가 재생되자마자 고함을 내지르며 고통을 참아 냈다. 빌어먹을, 아무리 허상이라고 해도 두려움의 근간이 되는 존재가 드래곤이니 만큼 대단히 강력했다. 봉황의 기로도 재생이 버겁다. 다행히 불의 기운이라 샐러맨더의 힘을 빌리자 불에 탄 상처들이 점점 말끔히 고쳐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몸을 모두 회복한 난 주변을 둘러보며 붕새를 찾기에 집중했다. 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 두려움의 현실이니 아무렇지 않다는 걸 깨닫자 없어졌다.
“엿 같은 새끼. 장비빨 한번 대단하군.”
이건 놈의 힘이 아니었다. 음양이기병, 이것도 그 태상노군이란 자가 만든 게 분명하겠지. 금강탁이란 팔찌도 그렇고 신이 만든 보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군. 봉황의 기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어.
“거기냐?”
음양이기병, 호리병 안의 막강한 기운이 내 두려움의 허상을 만들어 내느라 기가 상당히 옅어졌다. 충만한 기운으로 가려져 놈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던 난 곧 음양의 기운이 미약해진 틈을 타 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지독한 고통을 준 놈에게 같은 고통을 주고자 했다. 놈은 하늘을 날고 있었으나 따라잡기엔 무리가 없다. 한순간에 날개에 올라탄 난 검붉은 꼬챙이처럼 변한 메타소드를 놈의 몸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붕새의 덩치에 비하면 머리카락보다 작은 크기지만 고통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뭐하냐?”
바늘을 꽂기 전이었다. 난 이상함을 깨닫고 행동을 멈췄다. 방금까지 잘도 입을 털어 내던 놈이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무언가 노리는 게 있는 건가? 난 일단 놈이 무슨 의도를 가졌는지 파악부터 하려고 했다. 축구장만큼 거대한 날개 위를 달려 머리에 도착한 난 놈의 얼빠진 표정을 자세히 목격했다. 내 몸이 재생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기엔 너무 무방비한 자세였다.
“야, 뭐하냐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목적이 변하진 않는다. 난 바늘을 놈의 몸에 꽂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들려오는 놈의 대답에 다시 한번 행동을 멈춰야 했다.
[…아버지?]
이젠 내가 당황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아버지?”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은 호리병 안, 놈과 나밖에 없다.
놈의 호수만큼 거대한 눈은 날 바라보고 있다.
이 새끼, 나보고 아버지라고 했나?
[어찌 아버지의 기운이…….]
당연히 놈은 내 자식이 아니다. 난 새도 아닐뿐더러 가장 중요한 건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놈이 미쳐서 날 아버지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면… 놈은 내가 그 힘을 펼치자 날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또한 큰 충격이긴 했다. 설마, 그 얼빵한 앵무새가 아들도 있었다니. 그 욕쟁이 봉남이가.
난 큰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봉남이, 녀석과 지내며 난 녀석을 가족처럼 여겼다. 그래서 봉남이란 이름을 붙여 줬는데, 놈이 봉남이의 아들이라면 뭐, 따지고 보면 놈도 가족이라는 건가? 물론 아무런 상관은 없다. 그래도 왠지 마음이 켕긴다. 봉남이의 아들을 죽여야 하다니.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렇게 만났긴 했어도 사실 놈과 큰 원한은 없다. 으음, 말만 잘 통한다면 극적인 화해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느그 아부지 내랑 친구다. 따지고 보면 양부라고 할 수 있으니 퍼뜩 인사 안 하나?”
반농담으로 놈에게 말하던 그 순간, 놈은 거대한 부리를 벌려 날 삼키려고 들었다.
재빨리 부리를 박차고 도망친 난 황급히 외쳤다.
“이놈이? 마! 내가 느그 아부지에게 말도 가르치고…….”
놈에겐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오히려 전보다 더 사나워져선 날 죽이려 들었다. 놈은 덩치는 컸지만 한 번 날갯짓에 9만 리를 간다는 전설이 있는 놈답게 무척이나 재빨랐다. 난 이리저리 투우하듯 놈의 돌진을 피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이 힘은 너무 불안정하여 위험하나, 놈의 본의를 잠시나마 엿보는 것 정돈 괜찮겠지. 난 ‘세이렌’의 힘을 살짝 끌어올려, 놈의 본심을 읽고자 했다. 붕새, 봉황의 아들은 제 아비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내 놈의 머리에 아주 작은 열매가 열렸고, 거친 몸부림을 피해 간신히 열매를 딴 난 재빨리 삼켰다. 그렇게 내게 놈의 기억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아주 작은 기억이었으나 확실히 깨달았다. 난 세이렌의 힘을 진정시키고 탕진되어 가는 기를 억지로 순환시켰다. 세이렌의 힘, 강력한 존재에게 펼칠수록 너무 불안정해. ‘그땐’ 어떻게 그랬는진 몰라.
“패륜아라는 거로군.”
기억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붕[鵬]은 봉황의 자식이 맞았다. 그러나 상서롭고 고귀한 봉황과 다르게 놈은 오만함과 악함을 지니고 태어났다. 결국, 놈의 날개가 하늘을 가릴 만큼 거대해졌을 때, 놈은 천계에 반란을 일으켜 신선들을 잡아먹고 마왕이 되었다. 난 놈의 기억에서 놈의 진심을 읽었다. 놈이 내가 봉황의 기를 다뤘을 때 당황했던 건 이젠 이룰 수 없고자 생각했던 소망을 다시금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뻤기 때문이었다. 놈의 소망은 간단했다.
[나, 붕 鵬이야말로 새들의 왕이다.]
새들의 왕이 되는 것, 그러고자 제 부모를 죽이는 것.
패륜아다. 놈은 봉황이 대전이에 휩쓸리지 않았다면 왕위를 계승할 뻔했다.
[어떻게 네놈이 그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진 모르나 잘된 일이다. 네놈을 꺾음으로써 숙원은 이루어지며, 비로소 모든 날개 달린 짐승은 내게 고개를 조아리게 될 것이다!]
놈이 날갯짓하자 깃털이 뽑히더니 화살처럼 맹렬하게 날아왔다. 놈은 탈모 걱정도 없는지 수천 개의 깃털을 동시에 날렸는데, 깃털 하나의 크기가 집채만 하니 도시 정도는 쉽게 궤멸시킬 정도로 막강한 위력이었다. 난 그에 맞서 대염화의 고리를 펼치고자 샐러맨더의 기운을 끌어 올리자, 갑자기 주변의 기운이 크게 일렁거리더니 동등한 ‘냉기’가 뿜어졌다. 샐러맨더의 기운이 사그라지는 걸 보며 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빌어먹을 음양의 조화 때문이다. 결국, 꼴사납게 깃털의 비를 힘겹게 피해 낸 난 주먹을 꽉 쥐며 생각했다.
“일단 호리병부터 부숴야겠어.”
내가 힘을 끌어올리면 그에 상응하는 기가 발생하여 조화를 이루고자 하니 성가시기 짝이 없다. 음양이기병, 태상노군의 보구를 부수기 위해선 웬만한 힘으론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조화를 벗어난 힘이 필요했다. 아마 ‘그 힘’이 아니라면 내 전력을 다하고, 전력을 다시 한번 다해야 부술 수 있겠지. 음양의 기를 어그러트리기 위해 난 되는 대로 모든 힘을 그릇에 담고자 했다.
[놈!]
붕새가 방해했으나 차마 내 주변에 휘몰아치는 강대한 마력에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깃털만 날릴 뿐이었다. 난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펼치기에만 집중했다. 조화를 부수는 건 역시 잡탕찌개다. 맛있는 김치찌개에 민트초콜릿과 파인애플 피자와 건포도 식빵을 넣으면 혼란스러운 음식이 되듯, 내 ‘그릇’에 내가 가진 힘들을 있는 대로 때려 박는다면 목적 알 수 없는 괴상한 힘이 되겠지.
크흐윽-!
예상은 맞았다.
샐러맨더, 아이스독, 스위프트덕, 마츄, 그리고 많은 미물들.
그 힘들을 동시에 그릇에 담자 살갗이 찢어지며 ‘자폭하기 전의 셀’처럼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음양이기병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성질이 날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놈! 무얼 하는 것이냐?]
대붕은 안간힘을 쓰며 날 막으려고 했으나 놈의 어떤 힘도 내겐 통하지 않았다.
결국 위험을 감지한 놈은 어디론가 날아갔는데, 음양이기병의 호리병에서 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출구가… 있었니?”
이럴 줄 알았으면 쥐어패서 입구로 나가는 건데.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다. 음양이기병 안에 가득한 조화의 기가 휘몰아치며 하수구에 물이 빠져나가듯 내게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막대한 기다. 내 그릇에 담고 있던 기를 아득히 초월해 버린 게 확실했다. 언제 몸이 터져 버릴지 몰랐다. 난 아슬아슬한 상태까지 이끌어 올렸을 때 무작정 힘을 방출했다.
콰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강력한 폭발은 음양이기병을 부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 몸도 사라진다.
이제 난 전력을 다해 봉황의 기를 끌어냈다.
마침내 폭발이 끝났을 때, 사타동의 동굴이 보였다.
“간신히 팬티는 건졌네.”
찢겨서 걸레짝처럼 변해도 자가복구되던 마법의 턱시도마저 폭발에 증발하여 흔적도 남지 않았다. 솔직히 담담한 척했지만 젠장, 정말 무서웠다. 이번엔 너무 무리한 판단이었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놓쳐 흡수되던 음양이기병의 조화의 기를 방출하지 않았다면 난 죽었다. 하아, 무서워. 다신 이런 짓 안 해.
끼이이-!
머리 위에 대붕, 놈이 비명을 지른다.
동굴이 떨릴 만큼 위압적이었으나 난 인상만 찌푸린 채 놈에게 뛰어갔다.
그러곤 검붉은 바늘을 정수리에 꽂아 넣었다.
“넌 새들의 왕이 되지 못해.”
감염되어 추락하던 대붕은 날개가 썩어 떨어졌고, 이내 내 말 한마디에 환상처럼 사라졌다. 탑에 봉인되었겠지. 놈을 굴복시킨 건 태생적인 굴욕감, 절대 새들의 왕이 될 수 없게 했으니.
지상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갑자기 동굴 바깥에서 까마귀, 까치, 비둘기, 부엉이, 독수리, 그리고 이름 모를 온갖 잡새가 날아오더니 동굴의 튀어나온 바위에 줄지어 앉았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새들이 날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새들의 왕이라, 흠. 원장님은 존재력은 때론 지위의 상징이라고도 했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정말 내가 새들의 왕인지 뭔지가 되었다면 난 더 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
*
청사(푸른 사자)와 백상(흰 코끼리)이 내 분신을 잡아먹은 후 내게 달려들었다.
사타동의 삼마왕 중 첫째이자 한입에 십만 천병을 삼켰다던 사자는 입을 벌려 날 삼키려고 했다. 그에 난 대륙 거북의 힘으로 몸집을 키웠다. 순식간에 거대해진 먹이에 당황하던 청사는 기이한 재주를 부려 제 입을 내 덩치에 맞게 다시금 벌렸다.
“네 입이 얼마나 큰지 볼까.”
[내가 잡아먹지 못할 건 없다!]
놈이 날 삼키려고 들 때마다 난 대륙 거북의 힘을 끌어올려 덩치를 키웠고, 놈의 입 또한 덩달아 커졌다. 난 재밌는 현상을 목도했다. 원래 대륙 거북의 힘으로 거인만큼 커질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힘은 충분하더라도 그 힘을 담는 그릇이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양이기병 안에서 막강한 조화의 기를 받아들인 후, 비록 그 힘이 사라졌다고 해도 그릇이 강제로 넓어진 듯했다.
난 놈의 커지는 입에 맞서 덩치를 계속해서 부풀렸다.
이게 놈의 장기라면 굴복시키는 건 간단했다.
어릴 적에 봤던 동화책처럼 하면 되겠지. 동화 속의 엄마 개구리는 황소보다 커지려고 하다가 그만 터져 죽고 만다.
[크아악!]
놈의 찢어지는 아가리처럼.
*
홀로 남은 백상은 거대한 코를 휘둘러 날 휘감았다. 놈의 장기는 태산도 부수는 강력한 코의 휘감는 힘이었다. 난 그에 맞서 놈의 콧구멍을 찌른 후 마구잡이로 살점을 쥐어뜯었다.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던 놈은 곧 사라졌고, 그렇게 난 삼마왕을 봉인하게 되었다.
마왕의 힘은 보잘것없었으나 빌어먹을 태상노군의 보물은 날 너무 지치게 했다. 남은 마왕은 이제 셋, 백두금왕의 구름에 올라탄 난 일부러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했다. 충분한 잠이 필요했다.
며칠이 걸려 다음 마왕이 사는 통천하(通天河)에 도착했을 때였다.
드넓은 강에 사는 금붕어 마왕, 영감대왕[靈感大王]을 죽이러 왔으나 내가 왔을 때에는 이미 놈은 죽어 있었다. 봉인된 게 아니다. 죽었다. 그러나 난 놈이 되살아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백두금왕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완전한 소멸, 누군가가 마왕을 소멸시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