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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38화 (238/258)

#238화. 천계 (7)

영감대왕을 소멸시킨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한 채 다음 마왕을 잡으러 기린산(麒麟山)의 해치동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마왕은 없고 몸이 잠길 만큼 깊은 피 웅덩이와 금빛털만이 남아 있었다. 흔적을 보니 이번에도 누군가가 선수를 쳐 해치동의 마왕을 소멸시킨 것 같았다. 마왕이 소멸한 건 잘된 일이나 천계엔 그럴 힘을 가진 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신선들이 귀한 복숭아까지 내어주며 내게 부탁한 이유다. 그런데 이처럼 압도적으로 마왕을 소멸시킬 수 있는 자가 있다니, 그자는 천계에 또 다른 재앙이 될지도 몰랐다. 빌어먹을 대전이는 지금도 괴상한 잡탕찌개 제조를 진행하고 있으니 천계에 뚫린 공간으로 다른 세계의 괴물 놈이 기어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백두금왕은 나와 같이 마지막 남은 마왕을 쫓았다. 구령원성九靈元聖이란 마왕인데, 천계의 마왕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고 지혜로워 지금쯤이면 자기가 살던 반환동에서 나와 모습을 숨겼을 거라고 했다. 예상대로 드넓은 녹림이 자라난 죽절산의 반환동엔 그가 없었다. 우린 며칠이나 걸려 흔적을 쫓고 쫓았다. 난 마물의 힘을 빌려 놈의 냄새를 맡았고, 제 흔적을 숨기려던 구령원성의 꽁무니를 잡을 수 있었다.

“에이, 짜증 나게.”

하지만 마침내 놈을 찾아 천계 호수 바닥 깊은 동굴까지 도착했으나 이미 사태는 벌어진 후였다. 난 동굴에 널브러진 아홉 개의 사자 대가리를 쳐다보다가 머리를 박박 긁었다. 할 일이 줄었지만, 짜증은 두 배가 되었다. 우선 이것도 게임으로 생각해 보면 ‘파츠별 강화’를 하는데 그만 모두 완성하지 못하고 몇 개를 빠트린 찜찜한 상황이다. 게다가 이젠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짓을 자행했는지 알아봐야 했기에 단순히 싸우기만 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 성가셔졌다.

“도망칠 거면 끝까지 도망치던가!”

짜증을 부리며 애꿎은 사자 대가리를 뻥 찼을 때였다.

거대한 사자 머리의 입에서 하얀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어머, 뭐야.”

전혀 예상하지 못해 깜짝 놀라 후다닥 달려가 확인했다. 튀어나온 건 백구였다. 코끼리만큼 덩치 큰 개였는데, 깊은 상처를 입고 죽어 있었다. 구령원성과 싸우다가 잡아먹힌 건가? 난 잠시 이 개가 마왕을 죽였을까 생각해 봤지만, 곧바로 절대 무리라고 확신했다. 평범한 개는 아니다만 마왕을 죽일 정도는 아니야. 인상을 찌푸리며 백구를 바라볼 때였다. 뒤늦게 해저 동굴에 도착한 백두금왕이 참혹한 광경에 인상을 찌푸리며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다가 날 보더니 갑자기 고함을 내질렀다.

크와와앙!

맹수,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깊고 울림이 컸다. 동굴이 뒤흔들리는 충격에 난 귀를 틀어막으며 그를 비난했다.

“어휴, 시끄러워. 뭡니까?”

크와왕-!

[천구!]

무너지는 종유석을 피하며 고막을 괴롭히는 백두금왕을 노려봤다. 이제 한 번만 더 고함을 지르면 대우고 뭐고 때려치우고 궁둥짝을 걷어차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다시 한번 입을 크게 벌렸고, 난 즉시 펀치를 날릴 준비를 했다.

[망할, 놈의 짓이었군.]

눈치를 챘는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진 몰라도 백두금왕은 이번엔 고함을 지르지 않고 진정하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했다. 그는 죽은 백구를 가리키며 ‘천구’라고 말하더니 이내 ‘놈의 짓’이라고 했다.

“마왕을 죽인 놈을 아십니까?”

백두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하얀 개는 천구라 불리며 청원묘도진군(淸源妙道眞君), 혹은.]

그가 대답을 했다

[이랑진군이라 불리는 천계대장군의 애견이다.]

백두금왕은 진중한 표정으로 즐겨 피우던 곰방대마저 내려둔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계의 황제인 상제를 호위하던 대장군 이랑진군에 대한 이야기였다.

*

먼 옛날, 상제가 무시무시한 원숭이 요괴를 제압하기 위해 천계에서 가장 강한 장군을 파견하였는데, 그게 이랑진군이라 하였다. 그는 천계의 수호장군이자 천병들의 우두머리이며 천계의 신이 사라지기 전까진 상제를 호위하던 막강한 신선이었다고 했다. 백두금왕은 ‘배신자’를 쫓고 있었는데, 만약 마왕을 죽인 자가 이랑진군이 정말 맞는다면 그가 배신자일 수도 있다고 했다. 호랑이 요괴인 백두금왕은 언제나 표정에 두려움이 없었는데 이랑진군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긴장한 기색이 드러났다. 하지만 난 마왕을 죽인 놈을 추리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기뻤다. 내 ‘이야기’는 더 쉬워졌다. 그리고 더 강렬해졌다. 이랑진군이라, 내 감이 말하는데, 절대 이번 일은 싱겁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쿠르르릉-!

“왜 또 지랄이지.”

[동굴이 무너지고 있다. 나가서 마저 이야기하지.]

호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동굴에서 이야기를 듣던 중에 갑자기 벽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게, 작작 소리 지르지 거참. 나와 백두금왕은 후다닥 동굴로 뛰어나왔으나 헤엄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뭐야.”

백두금왕이 동굴을 무너트린 게 아니었다.

분명 바로 전에까지 호수였던 곳이, 그 많던 호숫물이 증발하여 엄청난 수증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백두금왕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지켜보다,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천륜이 어긋났다.]

난 하늘을 바라보다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늘은 보통 낮이면 푸르고, 밤이면 어둡다.

저렇게 하얀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변하진 않는다.

백열전구처럼 눈 아픈 빛을 내뿜지도 않는다.

하늘은 심지어 태양 빛보다 더 강렬한 빛이 되어 반짝거렸다.

[이럴 때가 아니야. 신선들이 위험하다. 젠장!]

백두금왕은 신선들이 사는 궁으로 가야 한다며 날 둘러업으려고 들었다. 그의 구름을 타는 게 편하긴 했으나 빨리 가려고 하면 내 경공이 더 빨랐다. 거절하려고 했으나 백두금왕은 ‘단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며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축지법이란 것에 대해서 말해 줬다.

“축지법?”

[땅을 접어 달리는 선법이다. 궁까지 멀지 않으니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난 그런 대단한 게 있다면 진작 쓰지 왜 아껴 뒀느냐고 따졌는데, 백두금왕은 축지법은 땅의 기운이 충만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여 몇 년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핑계를 댔다. 어쨌든 제일 빠르다고 하니 그의 등에 올라탔다.

윽!

축지법이란 게 펼쳐지자 난 짧은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원장님의 워프 마법만큼은 아니지만, 머리가 핑 돌 만큼 어지러웠다.

하지만 과연 몇 년에 한 번 사용할 법한지 단 한걸음에 어느새 신선들이 기거하는 궁전의 앞이었다.

“놈이 왔군요.”

[서두르자.]

궁을 지키던 붉은 갑옷을 입은 거인병 두 명은 처참히 반으로 갈라져 죽어 있었다.

나와 백두금왕은 재빨리 장원을 지나 신선들을 찾았으나, 이미 늦어 버린 후였다.

피로 물든 연꽃 위엔 학과 거북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며, 가까운 곳에 심장이 뽑힌 신선들이 보였다.

“이랑진군.”

난 피로 젖은 사내를 쳐다봤다. 강인한 인상에 금색 갑옷을 입은 사내는 손에 들린 무언가를 주머니에 담았는데, 주머니 안엔 똑같은 게 여러 개 담겨 있었다. 심장이다. 신선들의 붉은 심장. 그는 신선들을 학살하고 심장을 뽑아 주머니에 챙기고 있었다. 이야기만 들었을 땐 제법 강직한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대면한 이랑진군의 모습은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심지어 온갖 기괴한 형상을 한 마왕들보다도 더욱 역겨웠다.

“네놈은 누구지?”

심장을 챙기던 이랑진군은 천천히 몸을 돌려 날 바라봤다.

그는 나와 백두금왕의 등장에도 여유로웠다. 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는 우리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사나운 눈매를 가진 이랑진군은 이내 고개를 돌려 백두금왕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누린내 나는 짐승이여.”

백두금왕 또한 천계의 장군이었으나 이랑진군은 그를 짐승이라 불렀다. 백두금왕의 수염이 파르르 떨린다. 그는 애써 불편한 심기를 숨긴 채 그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오. 이랑진군.]

예의를 갖추나 상대를 존경해서가 아니다.

백두금왕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을 씹어 뱉어냈다.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섬뜩하다.

[십 년 만에 나타난 꼴이 천계를 어지럽히는 망나니라니, 당신이 봉인했던 천둥벌거숭이조차 혀를 찰 노릇이로군. 그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건만 어찌 신선들은 핏줄이 귀하다고 하여 저처럼 구정물보다 탁한 자를 장군으로 봉하였는지. 쯧.]

이랑진군은 무표정했다.

백두금왕의 모욕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시당한 백두금왕이 화를 참아야 했다. 그는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은 후, 곰방대를 품에 집어넣고 손에 끼는 너클 같은 무기를 꺼냈다. 호랑이가 발톱 대신 너클을 장착하는 게 우스워 보였으나 풍기는 기운은 절대 우습지 않았다.

[천계의 신선이 긍지마저 버렸군. 선기를 받아들인 자가 어찌 그런 더러운 힘을 탐닉한단 말이오?]

“우습군. 선기보다 빛나는 이 힘이 더러우면 네놈들이야말로 구정물에 사는 미꾸라지에 지나지 않는다.”

[…원하는 게 무엇이요?]

백두금왕이 묻는다.

이랑진군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선들의 심장과.”

그는 붉은 피가 뚝뚝 흐르는 가죽 주머니를 흔들어 보인 후 주변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반도를 먹고자 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신선들을 모조리 죽여도 반도를 가진 자가 보이지 않는구나. 혹시 넌 어디 있는지 아느냐? 내게 고한다면 사지를 자르는 것만으로 기꺼이 무례를 용서해 주겠다.”

난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번쩍 들었다.

그가 날 전혀 신경도 쓰지 않기에 살짝 빈정이 상하던 참인데 마침 잘 됐다.

“저어요! 저어요!”

난 그를 힘껏 약 올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거 내가 먹었어요! 달콤한 속살이 얼마나 감미롭던지!”

이랑진군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

난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확인시켜 줬다.

“내가 먹었다니까. 9천 년에 한 번 열린다던, 이제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던, 천계에 유일하게 하나 남았다던. 그 복숭아.”

해맑게 외쳤다.

“내가 먹었어요!”

*

간혹 그런 사람이 있긴 했다.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하는 행동마다 열이 받아.

이상하게 짜증 나고 밉고 콱 깨물어 죽이고 싶어.

그게 나였다는 걸 깨달은 건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상대했던 적들 모두 그랬다. 난 말재주가 없어 잘 놀려먹지도 못하는데 이상하게 엄청나게 열을 받아 했었지.

놈처럼.

“벼락 맞을 새끼!”

여유로웠던 이랑진군은 반도를 먹었다는 내 말에 잔뜩 화가 나선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창을 휘두르며 공격했다. 놈이 창을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며 기가 날카롭게 뿜어졌다. 난 기둥을 부수고 자르며 쇄도하는 기에도 잠자코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네 상대는 나다!]

능히 막아 낼 수 있었으나 이번엔 백두금왕이 나서서 공격을 가로막았다. 그는 천계의 배신자를 처단하고자 했으며, 이 일을 외부인에게 맡기는 건 치욕이라고 했으니 이랑진군을 상대하는데 내 도움은 받지 않을 모양이었다. 엄연히 말해서 난 그의 손님에 지나지 않았고, 선택권은 그에게 있었다. 난 백두금왕이 이랑진군과 싸우도록 한발 물러나려고 했다.

크르릉!

그러나 세 번 만에 백두금왕은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는 강렬한 빛을 내뿜는 쇠사슬에 속박되어 쓰러졌다.

백두금왕, 호괴의 두목이자 천계의 장군인 그의 힘은 절대 약하지 않다.

그러나 빛의 쇠사슬에 묶여선 꼼짝하지도 못했다.

“크하하! 태상노군의 보구만큼은 ‘거짓된’ 하늘에서도 유일하게 쓸만하지!”

[큭, 이건 대체 무엇이냐? 네가 가진 보구의 힘은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얼마나 타락하였기에 이 정도 힘을 부릴 수 있단 말이냐?]

크하하!

이랑진군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요괴 따위가 감히 천계의 장군이라 으스대더니 과연 짐승이라 묶인 채 벌벌 기는 지금의 모습이 가장 걸맞구나. 으하하! 으하하… 커억!”

두 가지 명분이 생겼다.

하나는 백두금왕이 허무하게 당했다.

“그만 좀 웃어라. 새끼야.”

둘은 저 새끼 웃음소리, 너무 짜증 나.

난 홍색의 불꽃에 당해 수염이 홀라당 타는 놈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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