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권] 10회 - 결투
“장갑차랑 비행선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자리와 레스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아자리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아뇨.”
“새로운 무기가 끝없이 만들어지는 시대입니다. 무기와 군량은 인간과 마족을 불문하고 양민들의 피로 빚어질 거고 다음 전쟁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겠죠.”
단테는 타는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전 대의나 명예 같은 거 집어치우고 돈만 믿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건 인정해야겠습니다. 적합한 마왕이 나타나질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질 겁니다. 저 인간하고 마족은 물론이고 저 황무지의 원주민들까지. 균형이 무너지면 평화도 없죠.”
“바로 믿어줄 줄은 몰랐는데.”
레스가 말했다.
“당신처럼 타고난 전사가 있는가 하면 저처럼 사람 보는 능력이 타고난 사람도 있죠. 댁들은 누굴 속일 위인들이 아니야. 게다가 용사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설명이 되고.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친구야.”
단테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시동이 걸린 엔진처럼 갑자기 흥분했다. 마음속에서 흔들리던 천칭의 균형이 마침내 박살 난 듯했다.
“까짓거 여러분들에게 걸어보죠!”
“진짜요?”
아자리는 설득에 성공해서 기쁘기도 했고 기세에 눌려 겁도 났다.
“당장 멀리 떠날 채비를 마쳐두죠.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모험할 기회가 없지!”
단테는 아자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서둘러서 식당을 나섰다. 레스가 잘 됐다는 격려의 뜻으로 멍한 얼굴로 굳어있는 아자리의 등을 토닥여줬다.
아자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희 가문 평판이 좋은가보다.”
침묵이 너무 길어져서 레스는 아무거나 말했다.
“제가 자랑할 점은 아니죠.”
“가족들은 어떻게 됐어?”
“망명 중에 기습을 받아서 헤어진 이후로 못 봤어요. 한 2년 됐나.”
둘은 식사를 거의 끝냈다. 아자리가 물었다.
“당신 가족들은 어때요?”
“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몰라.”
그녀는 헛기침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별로.”
레스는 묵묵히 그릇을 전부 비웠다. 그는 턱을 주먹에 괴고 아자리를 기우뚱 바라보았다.
“어서 단테에게 가. 가족들도 꼭 다시 만나고.”
“같이 가요.”
“안 되는 거 알잖아. 녀석과 결판도 지어야 하고 내게는 사명이 있어.”
“사명이요?”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용사랑 보안관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사쿠라비는 전쟁 때문에 고립되는 중이야. 누군가는 우리를 대변해야만 했어.”
“사명이 대체 뭐라고요? 당신이 아니더라도 사쿠라비는 살아남을 거예요. 전쟁이 더 나도 마족은 알아서 살 거예요. 제가 마왕이 되더라도 저는 여전히 저고요. 세상을 구할 필요는 없어요. 세상이 우릴 구해줄 필요가 없듯 세상도 알아서 살 거라고요. 당신도 용사가 되지 못했지만, 여전히 레스잖아요. 다 때려치워요! 그냥 같이 가요! 제발….”
아자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도중에 잊어버리고 마지막 한 마디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레스는 턱에 괴고 있던 손을 뻗어서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괜찮아.”
“여기 있으면 당신 죽을 거야.”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레스는 덤덤히 그녀를 위로했다.
“세상에 아무리 험해도. 아직 날 죽이진 못했어.”
◆
피카니는 바위에 앉아서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스가 그의 옆으로 갔다. 둘이 바라보는 곳에는 아이들이 커다란 오렌지 나무 아래에서 뛰어놀았다. 피카니가 레스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네 수염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마왕님한테 당했어.”
레스는 근처에 앉았다. 옷은 새것이지만 망토는 애착이 있어서 그대로다. 두 남자는 말 없이 아이들을 구경했다. 종족 구분 없이 다들 사이좋게 지냈다.
어떤 아이가 장대를 들고 오렌지를 따려고 했다. 처음 몇 개는 쉽게 떨어졌지만 따야 할 오렌지가 점점 높아졌다. 자기 동무의 숫자만큼 오렌지를 따질 못한 아이는 계속 까치발을 하며 무던히 노력했지만 장대가 닿질 않는다.
피카니가 권총을 꺼내고 외쳤다.
“꼬마야 거기서 비켜보렴.”
오렌지 나무를 향해서 한 발 쏘자 열매가 떨어졌다. 레스도 이에 질 새라 자기도 꺼내서 쐈다. 한 발, 또 한 발. 경쟁하듯 계속 쐈더니 아이들은 실컷 먹을 간식이 생겼다.
리볼버에 총알을 넣으며 레스가 말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우리는 잡히기 싫어.”
“나도 너희를 그냥 보낼 수는 없어.”
“서로 양보할 여지가 전혀 없는 건가.”
근처에 있던 아이가 오렌지 하나를 그들에게 들고 왔다. 기특하게도 껍질도 적당히 까져 있었다. 레스는 고맙게 받아들이고 반으로 나눠서 피카니에게 던졌다. 둘은 느긋하게 시간 들여서 오렌지를 다 먹고 떠들었다.
“그런데 마왕은 어떻게 잡았어?”
피카니는 말이 없었다. 레스가 재촉했다.
“어서. 꼭 들어봐야겠어.”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왜?”
레스는 갑자기 전에 아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가짜로 잡았냐?”
피카니는 씁쓸히 웃었다.
“마왕은 진짜야. 다만…. 아무래도 지금 털어놔야겠네. 실은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엄두가 안 났거든.”
“그럼 해봐.”
“우리가 헤어졌을 때 기억해? 헤어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체 지금 상황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몰라서 레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최근에 겪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예전의 사건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시간을 들여서 레스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혼잣말을 하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이름 모르는 밀림을 뚫던 참이었지. 초원을 건너가려는데 마족들의 캠프를 봤고.”
“돌아서 가려다가 결국 보초한테 들켜서 싸웠잖아.”
그는 이제 또렷이 기억났다.
“한참을 싸우다가 우두머리를 데리고 겨우 도망쳤었지. 그게 왜?”
피카니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우리가 갈림길에서 헤어진 뒤로 나는 생포한 우두머리랑 같이 무사히 제국 땅으로 들어갔거든. 도중에 레인저 정찰대를 만났고. 난 인사했어. 안녕하시오. 군인 형씨들. 가까운 마을이 어딥니까? 가진 육포나 술 없고요? 이 친구 혹시 현상금 걸려있나요? 레인저들은 내 질문에 하나도 대답 안 하더라. 그냥 다들 굳은 얼굴로 날 가까운 부대까지 호위해주겠대. 혹시 이상한 오해 산 거 아닐까 싶었지만 도망칠 수도 없어서 결국 따라갔지. 그리고...”
피카니가 뜸을 들이는 동안 거친 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난 용사가 됐어.”
레스는 침착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긁적였다.
그의 얼굴에 영문 모를 경련이 한 번 나더니 곧 돌처럼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피카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스의 입가가 일그러져서 말할 때마다 이빨이 보였다.
“네가 갔던 방향에는 지옥밖에 없더라고.”
피카니는 이제는 말하지 않았고 레스는 가면 같은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한마디 뱉었다.
“그랬군.”
레스는 가슴 속에서 휘몰아치는 분노의 소용돌이를 가라앉혔다. 배신감에 아직도 정신이 아찔하고 내장이 아리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 놓고 아파할 여유가 없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분하다.”
“전하는 어디 있어?”
“지금쯤 갔겠지.”
“작별 인사는 한 거야?”
“대충.”
피카니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둘은 생각 없이 걸었다. 길을 따라가니 자연스럽게 마을의 대로변으로 향하게 됐다. 사람들은 둘을 보고 서둘러 길을 비키거나 건물로 들어갔다. 마을 거리는 순식간에 협곡처럼 휑해졌다.
거리 한복판에서 피카니가 우뚝 섰다. 회중시계를 꺼내서 보고는 그가 말했다.
“몇 시간 뒤에 사람들이 올 거야. 빨리 결정해.”
“다른 선택지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네.”
“레인저로 들어와. 죄명이 잔뜩 붙긴 했지만 너한테 죽은 사람은 없잖아. 처음에는 대접이 안 좋겠지만 실력을 보여주면 바로 인정받을 거야.”
“사법 거래냐.”
“쓸만한 사람은 항상 부족해.”
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군인은 질색이다. 제국주의도 그렇고.”
그리고 피카니를 믿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거절하면 넌 영원히 무법자 신세야.”
“그럼 여기서 체포해.”
피카니는 레스가 손에 긴장을 풀고 허리춤 높이로 들어 올리는 걸 봤다. 바람은 자취를 감추고 태양은 고즈넉이 구름 없는 하늘에 떠 있었다. 숨을 죽이고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서서히 거리를 벌렸다. 건물 근처에 있던 주민들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피카니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이것뿐이야?”
“좋게 생각하자고.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잖아.”
“떠나려면 어서 떠나. 지금은 쫓지 않겠어.”
산들바람이 땅에 깔린 모래를 서서히 쓸었다. 레스는 터번을 벗고 옆으로 던졌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늘이 진 그의 얼굴 속에서 눈만 금속처럼 번뜩였다.
“깔끔하게 결판을 내자고. 네가 날 꺾으면 정당한 용사가 되는 거야.”
“…….”
“우리 모두 물러날 곳이 없어.”
“방법은 항상 있어.”
레스는 마음을 굳히기 위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나는 사적인 감정도 꽤 있거든.”
“그래.”
피카니도 이해하고 더는 군말하지 않았다. 서로의 시선에서 인간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둘의 혈관 속에서 거푸집을 타고 흐르는 녹은 철 같은 뜨거운 피가 심장 속에 있는 가마에 불을 지폈다. 머리에서는 차가운 불이 일었고 눈만이 그 두 가지 불을 다스릴 수 있었다. 표적은 표적을 살피면서 표적의 주위를 끌지 않는 선에서 서서히 움직였다.
저 높이 하늘 위로 날고 있는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서늘했다. 술집의 통기타 연주는 끊어졌다. 햇빛이 레스의 눈을 찔렀고 신경을 곤두세운 육신은 옷 아래로 흐르는 땀방울을 모두 느꼈다. 반쯤 감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표적이, 감긴 곳에는 추억이 겹쳤다.
독수리의 울음소리는 피리처럼 높고 구슬프다.
아직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악사가 남아있다. 창가마다 이곳을 지켜보는 주민들이다. 두 남자는 코앞의 상대만 봤다. 바이올린 소리가 끊어졌다. 숙명의 때는 찾아왔다.
그리고 두 용사의 결투가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피카니의 머리 위로 뜬금없이 화분이 떨어졌다. 머리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화분 깨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피카니는 앞으로 쓰러졌다.
레스는 놀라서 권총을 제대로 뽑지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얼마나 섬뜩한 광경이었는지 보는 사람이 다 아팠다.
아자리가 옆에 있던 건물 지붕에서 고양이처럼 잽싸게 내려오고는 말했다.
“가요.”
“언제부터 따라왔어?”
레스는 긴장이 풀리면서 과하게 집중했던 반작용으로 표정이 매우 멍청해졌다.
“식당에서 헤어지고 나서 계속.”
“여태껏 떠나지 않고 뭐한 거야!”
“아직 몇 시간이나 남았잖아요.”
관점의 오묘함이란.
“기껏 생각해줬더니 구경이나 하고 있었냐?!”
결투를 구경하던 주민들은 맥이 빠져서 다시 거리로 나오고 자기 갈 길을 갔다. 결과에 어찌나 실망했던지 주민들은 용사의 안위 따위는 잊어버리고 여기로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아자리는 양 주먹을 허리에 대고 뻔뻔하게 미소를 띄웠다.
“나한테 감사나 하시지. 덕분에 참극은 막았잖아.”
“막았다고? 저걸 보고도?!”
레스가 피카니를 가리켰다. 경련하는 꼴을 보아하니 후유증이 심각하게 걱정됐다. 아자리는 살짝 얼굴이 굳었지만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총알보다는 이게 낫지.”
“뭐가 나아?! 난 방탄판에 맞출 생각이었어!”
“방탄판?”
“그래! 저 녀석 외투는 방탄 기능이 있다고.”
두 사람은 피카니의 상태를 볼 겸 몸수색을 해봤고, 아자리는 확인하자마자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런 거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