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1권] 11회- 편한 날은 어제뿐이다
그 와중에 아자리는 피카니의 지갑도 은근슬쩍 가져갔다. 레스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평소에는 무거우니까 그냥 다니나 보네.”
“난 관대하니까 서로 비긴 거로 치죠.”
“어떻게 너하고 내가 같아?! 나는 미확정이지만 너는 완전히 참사를 저질렀잖아!”
단테가 두 사람 곁으로 마차를 몰고 왔는데 실랑이가 멈출 기색이 안 보였다. 보다 못한 그가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서두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서로 더 꺼낼 밑천도 떨어진 참이라 레스는 마차에 올라탔다. 아자리는 올라타기 전에 아까 레스가 땅에 떨어트렸던 터번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분실물.”
“어 고마워.”
그리고 마차는 김빠지게 아무런 일 없이 마을을 유유히 나왔다. 그들은 잡초로 무성한 초원을 달렸다. 레스가 꿍얼거렸다.
“최악의 결투였어.”
단테가 대답했다.
“두 용사가 벌인 결투의 승자는 마왕이라. 상징적이군.”
“댁도 엿듣고 있었어?”
“넵.”
“불만이에요?”
아자리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손에는 언제 가져온 건지 수첩과 연필이 있었다.
“그냥…. 맥 빠지잖아. 난 엄청 진지했는데.”
“진지한 문제를 꼭 비극적으로 해결하라는 법은 없다고요.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금 일어난 사건도 누군가에게 충분히 비극적이었지만 레스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아자리가 다시 물었다.
“나중에 피카니랑 다시 만나면 뭐라고 할래요?”
마차 바퀴는 덜컹거린다. 레스는 한숨을 쉬고 적당히 대답했다.
“아무 생각 없어. 꼴도 보기 싫고.”
“흐흠. 그래요.”
아까부터 아자리가 수첩에 뭐라고 계속 끼적이고 있어서 레스가 신경 쓰였다.
“뭐해?”
“앞으로 겪을 일은 적어둘 가치가 있으니까.”
“뭐하러?”
그녀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기록은 모험의 꽃이라고요.”
“마음대로 해라.”
레스에게는 일기 따위 보람도 없고 귀찮기만 했다. 마차 뒤쪽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운 아자리를 내버려 두고 레스는 단테에게 다가갔다. 언덕을 올라가던 참이라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서 말하는 동안 목에 힘을 줘야 했다.
“그런데 단테 씨.”
“말 놓으셔도 됩니다.”
“단테. 둘이나 더 태우고 가는 건 무리라며? 정말 괜찮아?”
“뭘 대수라고요. 그때는 겁이 나서 그렇게 말한 거지. 지금은 겁 안 납니다.”
“진짜?”
“그럼요.”
언덕을 다 오르자 그들 앞으로 장관이 펼쳐졌다. 호수와 숲, 초원과 황무지, 저 멀리 자욱한 구름을 띄운 화산지대까지.
“용사와 마왕이 같이 있는데 누가 우릴 막습니까?”
◆
의식이 돌아온 피카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느꼈다. 쇳가루와 화약, 오래된 가죽, 담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옆으로 눈동자를 돌리니 백인 중년 남자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앉아있었다.
중년 남자의 왼쪽 뺨과 눈가에 자상과 화상 흉터가 있었고 머리에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다. 피카니의 것과 같은 모자인데 이쪽은 모서리가 많이 닳았고 군데군데 색이 빠졌다. 짧게 친 검은색 머리카락은 백발이 조금 섞였고 눈동자는 갈색이다. 눈가와 입가 그리고 콧방울 주변에 잔주름이 자글거렸지만, 중년 남자의 눈빛과 표정에서 나오는 강인한 기운 덕에 주름들은 노련한 인상만 더해줬다. 윗입술에만 정성 들여 기른 콧수염이 무성했고 다른 곳은 깔끔했다.
피카니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상대에게 물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죠?”
“다섯 시간. 우리는 세 시간 전에 왔고.”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험상궂은 외모와는 달리 강연하는 교수처럼 부드럽고 전달력이 분명했다. 창밖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주황색이 섞인 걸 보아 때는 초저녁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목소리는 나긋하지만 걱정해서 건네는 말투가 아니었다. 피카니는 계속 눕고 싶었지만 작게 기합을 넣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중년 남자는 부축은커녕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입을 열었다.
“머리를 다쳤으니 혹시 싶어서 물어보겠는데 자기 이름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나?”
“다 압니다. 누가 뒤에서 때린 거 같았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또렷하게 생각나질 않았다.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졌어.”
주먹으로 눈가를 비비면서 눈곱을 떼고 있던 피카니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중년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아 보였으나 짧게 끊었다.
“정신이 다 돌아오면 나오시게.”
그리고 더는 볼일 없다는 듯 방을 나왔다. 피카니는 세상의 근심을 전부 담은 것 같은 한숨을 길게 뱉고 세숫대야에 담긴 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씻으면서 생기는 반동만으로도 정수리에 난 혹이 욱신거렸다. 피카니의 모자는 옷걸이에 걸려있었는데 꼴사납게 찌그러져 있었다. 그는 물기를 소매로 닦고 나서 모자를 손에 들고 방을 나왔다. 방문에 걸려있는 문패에는 ‘숙직실’이라고 적혀있다.
복도를 따라 계단으로 가니 1층이 한눈에 보였다. 그제야 피카니는 여기가 보안관 사무소라는 걸 알았다. 1층에는 남자 둘이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체스를 두고 있었다.
의자의 앞뒤를 바꿔서 등받이에 팔과 턱을 얹고 삐딱하게 앉은 백인 청년이 수를 하나 두었다. 후드가 달린 더스터 외투를 걸쳤는데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난 수염들은 관리가 안 돼서 인상이 지저분했지만 번듯한 이목구비와 얼굴형이 날렵해서 개과 동물을 연상시켰다. 피카니처럼 금발에 푸른 눈으로 원래는 삭발했다가 다시 자라난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겨서 정리한 모양인데 숱이 많고 올이 굵어서 두상 여기저기에 머리카락들이 삐죽거렸다. 자리 옆에는 광학 조준경까지 붙은 최신형 소총이 세워져 있었다.
청년의 맞은편에서 키가 2m는 되어 보이는 흑인 이 차례를 받았다. 몸집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데 흑인 특유의 강렬한 인상까지 더해져 평범한 사람들은 보자마자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겁날 정도였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가 올곧았고 표정도 매우 침착했다. 몸에 붙어있는 근육은 어찌나 큼직한지 입고 있는 셔츠가 팽팽하게 부풀어서 주름이 거의 안 잡혔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서 돌덩어리 같은 상박근이 보였다.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삭발했고 수염도 최근에 면도해서 입가 주변이 꺼뭇하기만 했다. 자리 옆에는 양손으로 휘두르는 망치와 이중 총열 산탄총이 놓여 있었는데 대체 어떤 실전을 겪어왔을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흔적이 표면에 빼곡했다. 거한은 체스의 차례를 마치고 굳은살 가득한 손을 턱에 댄 채 생각에 빠졌다.
피카니가 계단을 내려오자 청년이 판에서 눈을 떼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신가. 반년 동안 살이 꽤 붙으셨네.”
은근슬쩍 상대를 약 올리는 거 같은 말투와 상대의 풀린 눈빛 때문에 피카니는 기분이 확 상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우리 두목한테 물어봐.”
청년은 또 시비 거는 거 같은 말투로 대답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거한도 피카니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예고도 없이 자리에서 대뜸 일어나고는 자신의 배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뭔가가 천에 담겨 있는 작은 주머니였는데 거한은 쿵쿵 걸어서 바로 피카니한테 다가오고는 그것을 건네며 말했다.
“이거. 아픈 쪽에.”
몸집만큼이나 거한은 목소리의 성량도 굵직하고 낮아서 마치 종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피카니는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받은 물건을 혹이 난 곳에 댔더니 쑤시는 게 덜해졌다. 냄새로 봐서는 약초로 직접 만든 찜질 도구 같았다.
“훨씬 낫죠?”
거한의 친절하게 말하면서 구석에 있는 자신의 장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머리를 전부 덮는 특수제작 된 철모가 있었다. 철모는 거한이 가지고 있는 무기들만큼 실전에서 얻은 흉터로 가득했다. 철모 외에도 온갖 방탄 장비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자기도 멍 나는 일이 많았다는 뜻으로 한 몸짓 같았다. 덕분에 피카니는 기분이 풀렸다.
“고맙습니다.”
“대위님은 바깥에 계십니다.”
그리고 거한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청년은 이제 피카니한테 관심 없는지 따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의욕 없이 체스를 계속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중년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이쪽을 등진 채 말뚝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피카니는 찜질 도구를 계속 머리에 문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중년 남자는 반쯤 노려보는 눈빛으로 피카니를 곁눈질했다.
“그쪽 사정과 우리 사정이 교차했지. 자세한 설명은 모두 모이면 하겠네.”
“모두 모이면?”
“한 명이 안 왔어. 여자야.”
“어떤 여자요?”
“적당히 묻게. 난 네 부하가 아니야.”
그 와중에 남자의 말투는 지극히 겸손했다. 피카니는 꾹꾹 참았다.
피카니는 다시 건물로 들어가기 싫어서 바깥 공기도 쐴 겸 입구 주변의 처마 기둥에 기대어 섰다. 석양이 져서 온 사방이 붉었다. 그 속에 중년 사내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주변의 풍경과 섞여 있는 모습이 제법 볼만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하늘은 남색이 됐고 바람은 서늘해졌다. 여태껏 묻고 싶은 게 많았던 피카니는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만날 그 여자하고 저희 외에 다른 사람은 더 없습니까?”
“없어. 슬프게도.”
아무리 연장자라고 해도 명색이 용사인 피카니 앞에 대고 말하기에는 태도가 퉁명스러웠다. 그래도 피카니는 용건만 물었다.
“당신들도 아자리아에 대해서 압니까?”
“자세힌 알지 못하네. 하지만 쫓아야 할 대상이지.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피카니가 눈썹을 찡그렸다.
“무슨 뜻입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그쪽과 우리 사정이 교차했어.”
더 물어봤자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 거 같아서 피카니는 기다렸다. 보이는 길에 벌레 하나 안 보였다. 하늘에는 달이 떴다.
갑자기 바람이 거칠어졌나 싶었는데 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두 남자는 자연히 머리 위로 시선을 올렸다. 기척의 정체를 확인한 피카니는 다시 모자를 썼고 중년 남자는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서 뒷짐을 졌다. 그가 말했다.
“오셨군.”
후드를 쓴 여인이 공중에서 망토를 펄럭이며 지팡이를 타고 서서히 내려왔다. 쏟아지는 달빛이 그 윤곽을 따라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