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권] 16회- 거친 기수들
“공용어 할 줄 알았냐?!”
“못 한다고 한 적 없다.”
샤카자이아는 당당했다.
“왜 여태껏 말 안 했는데?”
“너랑 말 붙이기 싫어서. 대답은?”
떠오르는 말은 많았으나 해줄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끼리 농담한 거야. 신경 쓰지 마.”
상대는 다시 대답을 재촉했다.
“난 분명히 들었다. 너희들은 수상쩍어. 뭘 감추고 있지?”
“무슨 상관이야.”
레스는 거짓말과 연기에 소질이 없었기에 샤카자이아는 더 끈질기게 굴었다.
“대답할 때까지 여기 있을 거다.”
“그러시던지. 어차피 우리는 금방 떠나.”
샤카자이아는 새싹 같은 녹색 눈동자로 이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레스는 시선에 닿는 부분이 근질거려서 미칠 거 같았다. 그도 결국 한창 혈기 왕성한 남자인지라 여자를 옆에 두고 침착해지기란 힘들었다. 특히 레스는 출신이 출신인지라 더욱 곤란했다.
‘자기 남편도 아닌 남자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다니! 심지어 배꼽까지!’
샤카자이아는 결심을 굳히고 애써 태연한 척 물을 마시고 있는 상대에게 말했다.
“마왕군이 나타났다.”
그는 깜짝 놀라서 물을 마시다 사레들렸다. 입가를 문지르고 그가 외쳤다.
“뜬금없이 뭐야?!”
“마을 분위기가 안 좋은 건 그 때문이다. 벌써 한 달째다.”
놀라운 소식인 건 둘째치고 대화의 흐름이 너무 뜬금없어서 레스는 어떻게 화제를 이어야 할지 골치 아팠다. 뜸을 들여서 생각을 정리하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거야? 안 좋은 쪽으로?”
“그럴지도. 나도 몰라.”
샤카자이아의 얼굴은 야생동물처럼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너 평소에도 대책 없다는 소리 자주 듣지?”
상대는 눈을 반쯤 감으면서 아랫입술을 삐죽 추어올렸다. 레스는 일단 관자놀이를 손으로 감싸면서 진정했다. 지나가는 주민들이 이쪽을 향해 계속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물었다.
“그놈들이랑 대치한 지 한 달째라고? 어디에 있는데?”
“여기서 멀리. 국경 방향.”
“하긴 그렇겠지 다른 곳에서 마왕군이 나타날 리가 없으니.”
레스 일행은 숲을 나와서 국경을 넘을 생각이었는데 가는 길에 문제가 생겼으니 이제 남 일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마구 들었다. 터번을 벗고 뜨끈해진 머리를 싸매고 있는 그에게 샤카자이아가 말을 걸었다.
“넌 아직도 내 질문에 대답 안 했어.”
“그건 완전히 상관없는 일이야! 아마도… 제국군한테는 도움은 청해봤어?”
샤카자이아는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와시추(백인)한테? 웃기는 소리.”
그녀는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레스는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중얼거렸다.
“엘프에 대한 환상 다 깨지네.”
“그건 또 무슨 뜻이냐?”
상대가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어투로 묻자 그는 머쓱해져서 헛기침하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 마왕군이 뭐냐… 나쁜 짓 많이 해? 다친 사람들 많아?”
하나 마나 한 질문이었는데도 샤카자이아는 성실하게 답했다.
“대부분은 잡것들이라서 크게 다치는 사람은 없는데 계속 불을 질러대.”
“그건 큰일이잖아!”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매일 같이 불을 끄다 보니 우리도 이젠 익숙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불을 안 지르는군.”
“안 좋은 일은 꼭 익숙해질 때 터지는 법인데.”
그때 마을 바깥 방향으로부터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서 종소리가 울렸다. 일어나서 보니 저편으로부터 높은 지지물에서 보초를 서던 주민이 종을 울리면서 뭐라 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소란의 원인을 숲 저편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기둥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이해하였다. 레스가 표정 없이 뇌까렸다.
“썅.”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넌 여기 얌전히 있어!”
샤카자이아는 그 말을 남겨두고 저쪽으로 향했다. 주민들은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불을 끌 준비로 분주했다. 레스는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며 일행들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곧 소란을 들은 아자리와 단테가 돌아왔다. 아자리가 급하게 말했다.
“레스! 추장님이 그러는데 근처에 마왕군이 있다고….”
그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나도 방금 들었어! 불 끄러 가자!”
“전 마차로 가볼게요!”
아자리하고 같이 왔던 단테는 일행에게 그리 말하고 달려나갔다. 그들은 각자 서둘렀다.
샤카자이아가 말한 대로 평소에 주민들은 능숙하게 대처했었는지 사람들은 각자 물 바구니와 모래를 넣은 자루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불을 끄고 있었다. 하지만 화재가 번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서 주민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자리가 연기를 맡고 격하게 콜록거렸다.
“어후! 기름이랑 화약 냄새! 가을이 되면서 날이 건조해지니까 기회다 싶어서 작정했나 봐!”
“하필 오늘이야?!”
레스가 투덜거렸다. 가뜩이나 최근은 낙엽이 본격적으로 떨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현장하고 물을 가져오는 곳과 거리가 먼 것도 이유였다. 레스랑 아자리도 되는 대로 사람들을 도와주기는 했으나 좋은 전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강풍이 불어닥치자 불씨가 사람들의 옷에 번질 정도가 됐다. 더는 사람의 손으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한 아자리는 대책을 떠올렸다.
“레스! 맞불을 놔야 해요!”
“그런데 어디에다가?!”
평소 벌목을 필요할 때만 하는 주민들의 성향 때문에 숲이 울창해서 마땅한 곳이 안 보였다. 섣불리 했다간 피해만 배로 늘 것이다. 계속 살피다가 그가 물었다.
“마법으로는 어떻게 안 되냐?!”
“허공에서 물은 못 만들어요!”
“그거 말고! 맞불! 아까 네 입으로 말했잖아!”
드디어 해결책이 보였다. 아자리는 크게 외쳤다.
“레스. 사람들에게 물러나라고 해요! 휘말리면 반드시 죽으니까!”
“엘프 말로는 그게 뭔데?!”
그때 샤카자이아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냥 말해! 다들 알아들으니까!”
소란 통에 서로 보지 못했던 샤카자이아가 둘을 찾아내고 다가왔다.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바로 같이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그동안 아자리는 숨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했다. 주민들은 당장 대피하라는 이유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샤카자이아도 같이 재촉하는 통에 어떻게든 지시에 따랐다. 불길은 거인이 발을 옮기듯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규모를 넓혀갔다. 아자리는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열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 불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열기가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아자리는 날숨만 뱉으며 주문을 외웠다.
“포르차 데르피 그란데 엑사티오!”
그녀가 입술을 닫는 순간 주변의 사람들은 작은 지진을 느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아자리가 있는 곳을 계속 지켜보았던 레스는 불기둥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구치는 걸 보았다. 산소가 고갈되어 불길은 전멸했고 충격파가 땅을 뒤집어엎었다. 모르고 봤으면 화산이라도 터진 꼴이었다. 나무들은 숯으로 변해서 깜부기불이 피처럼 균열에 흘렀다.
“아자리!”
레스는 재와 먼지로 이루어진 회색 안개를 뚫으며 나아갔다. 아직도 공기가 후끈거려서 피부가 따끔거렸다.
“아자리! 어디야!”
“레스… 레흐으으….”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아자리가 눈을 감은 채 양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먼지로 덮이고 충격파를 맞은 탓에 아자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현장을 나왔다.
◆
거친 평원 위로 네 기수가 달려갔다. 지휘자가 앞장섰고 부하들이 뒤를 따랐다. 피카니와 루나는 같은 말에 타서 제일 뒤에 있었다. 피카니는 뒤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붙잡느라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을 무시하느라 괴로웠다.
사람만 태운 군마들은 마차를 끄는 말보다 빨랐고 덜 쉬었다. 해가 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종일 달리자 말보다 사람들이 먼저 지쳐서 멈췄다. 나무와 풀이 듬성듬성 난 들판이었다.
루나는 치렁거리던 머리카락을 짧게 다듬은 덕에 멀리서 보면 아주 단정한 남자처럼도 보였다. 옷도 원래의 너울거리는 통이 넓은 까만 옷에서 남성용 셔츠에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안장에서 내려오자마자 체면을 내버리고 발라당 누워서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누워있는데도 셔츠를 팽팽하게 부푼 그녀의 가슴 굴곡을 남자들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각자 개인정비 시간을 가졌다. 피카니는 하딘과 만나서 같이 지도를 펼치고 대화를 나눴다. 지도에 손가락을 짚으면서 하딘이 말했다.
“우리가 여기쯤 왔어. 분기점이지. 흔적을 못 찾으면 국경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피카니는 지도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표식 하나를 찾아냈다. 이곳하고 멀지 않은 숲에 작은 도끼가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보이는 숲이었다.
“이건 뭡니까?”
“다크 엘프로 이루어진 부족들의 땅이야. 슈슈니라고 불리지.”
“아직도 문명화되지 않은 원주민들이 남았는지는 몰랐는데요?”
“어디든 예외가 있는 법이지. 자세한 사정은 우리가 알 바 아니고.”
자세히 보니 슈슈니 족의 영역을 지나서 숲을 뚫으면 국경까지 가는 시간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그래서 피카니는 다시 질문했다.
“왜 제국이 저기에 철도와 도로를 뚫지 않고 저들을 내버려 두는 거죠?”
“몰라. 워낙 사나운 사람들이라 내버려 두는 걸 수도 있고, 엘프를 박해하는 건 비인도적이라며 반발이 있었을 수도 있고. 우리는 이해 못 할 깊은 이유가 있으시겠지.”
“제 직감으로는 저들과 만나볼 가치가 있을 거 같습니다.”
하딘은 파이프를 꺼내면서 넌지시 말했다.
“원주민들이 문명인을 싫어하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심지어 우리는 군인이라고.”
“예의만 갖추면 됩니다. 접대의 관습은 아시죠?”
하딘은 코웃음을 쳤다.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지킨다고.”
“폐쇄적이고 호전적인 부족일수록 관습이 엄격합니다. 일행 중에 사쿠라비가 있으니 그들은 저들과 만나보려고 최소한 시도라도 했을 겁니다.”
“자신감이 넘치는구먼.”
하딘은 팔짱을 끼고 콧수염의 결을 손끝으로 살살 긁으면서 오래 생각한 뒤 말했다.
“뭐, 이 정도 모험도 극복하지 못하면 황무지는 못 건너가겠지. 지름길로 가보자고.”
피카니는 상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들어주리라곤 기대하지 못해서 조금 놀랐다. 하딘이 입가를 슬며시 내렸다.
“종일 내내 자네하고 자존심 싸움만 할 줄 알았나?”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그는 대답했다.
“아주 조금.”
“아직도 마법사님을 끌고 온 건에 대해서 불만이 남은 눈치군.”
두 남자는 눈만 돌려서 아직도 앓는 소리를 내는 루나를 슬쩍 보았다.
“살인자들 무리에 저렇게 순수한 사람을 데려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연락을 보내면 사령부에서 답이 오기까지 몇 주가 걸려. 조직이란 게 그래.”
하딘은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서도 눈에 핏대를 세우고 자기가 하는 말을 강조했다.
“아무리 그래도 무리수라는 건 변함 없습니다.”
“우리는 전문가가 필요해. 이 원정이 마법사의 자문 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갑자기 피카니의 머릿속에서 과거 레스와 함께 여행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에는 마법사 같은 거 없어도 잘만 다녔었다. 마음만 먹으면 자기 칭호를 이용해서 더 과감한 말로 상대를 찍어 누를 수도 있었으나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자격도 없었다.
“좋은 대화였습니다.”
그는 일어났다.
“푹 쉬어.”
하딘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피카니는 자신의 애마에게 솔질을 하고 정성껏 쓰다듬었다.
좋지 못했다. 모든 것이 잘못됐다. 이 원정의 목적부터 과정까지. 레인저 대원들은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면 그만이지만 피카니에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혼탁해진 심중에서는 이제 껍데기뿐인 명성을 집어던지고 도망칠 때가 됐다는 욕심이 피어나려고 했다. 자신에게는 전우애나 애국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루나가 자신만 믿고 따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루나가 심란해하는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종일 내내 물리적으로 붙어있었으니 둘은 이제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대화가 됐다.
“그럼요. 남자니까. 머리카락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아, 네. 정말 좋아요. 사실 살면서 이렇게 정성껏 관리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집어서 비벼보았다. 아직도 피부색은 창백하고 눈가에는 기미가 끼어있었지만,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던 더벅머리만 세련되게 정돈했는데도 그녀의 인상은 훨씬 산뜻했다. 루나는 가식 없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용사님이 이발에 재주가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제가 무법자로 살았을 때 거쳐 간 직업이 참 많았거든요.”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무법자요? 하지만 용사님은….”
피카니는 곤란함과 익살이 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한쪽 입가를 쭉 올렸다.
“신문에는 제가 귀족이라고 했는데 다 포장된 겁니다. 제 아버지는 제국 시민이었지만 제가 태어나기 전에 빚과 세금으로부터 달아나 황무지로 금을 캐러 떠나셨죠. 그 뒤에 있었던 일은 다 뻔한 이야기고요.”
“그건… 소문이 정말이었군요.”
루나는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피카니는 조금이나마 속내를 털 수 있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 사실은 군인분들도 아시나요?”
“당연하죠. 제가 마왕을 데리고 이쪽으로 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인걸요.”
그때 아득한 곳에서 폭음이 들렸다. 하딘은 망을 보고 있던 카르델에게 달려갔다.
“뭐였지?”
“저거 보여요 두목? 숲에서 난 겁니다.”
카르델은 들고 있던 쌍안경을 하딘에게 주고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시야 저편에 뭔가 붉은색으로 반짝거리는 기둥 같은 게 하늘로 솟구치는 게 보였다. 곧 그들이 있는 곳까지 천둥 같은 메아리가 한차례 울렸다. 소리가 어찌나 거친지 떠다니던 흙먼지가 떨릴 정도였다. 하딘이 엄지손가락을 들어서 폭발이 일어난 곳과 비교해가며 거리를 가늠하고 말했다.
“슈슈니 족의 영역에서 터진 거야.”
카르델이 끼어들었다.
“폭약을 아무리 써도 저런 장관은 안 나는데.”
아비투스가 하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딘은 파이프를 뒤집고 불씨를 밟아서 껐다.
“총기 점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