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권] 17회- 타버린 불과 타오르는 불
남은 불씨가 없도록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숲으로 향하는 인파들 사이로 일행은 뚫고 지나갔다. 레스는 아자리를 뒤에 업고 샤카자이아의 안내를 받아 어느 천막에 도착했다.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었는데 여럿이서 생활해도 될 만큼 널찍했고 이부자리는 하나였다. 그는 아자리를 거기에 눕혔고 샤카자이아가 바로 물수건을 가져왔다. 레스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려다가 손을 멈칫거렸다. 그는 뻗었던 손을 쭈뼛쭈뼛 다른 곳으로 돌리며 샤카자이아에게 말했다.
“그… 네가 좀 봐줄래…?”
그녀는 뜻대로 해주었다.
“딴 곳 보고 있어라.”
뒤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몸을 닦는 소리만 들리는 동안 레스는 안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세간살이 대부분은 사냥할 때 쓰는 도구들이고 위에는 말린 물고기나 약초 다발 따위가 매달려있었다. 이상하게 휘어진 나뭇가지에 깃털로 장식된 부적 같은 게 매달려있었는데 이곳 풍습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레스의 눈으로 봐도 엉성하게 만들어진 티가 심하게 났다.
레스가 물었다.
“괜찮은 거지?”
“피 나는 곳은 없어. 멍만 조금 났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샤카자이아가 그녀의 얼굴을 쓸어주고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깊게 잠들었다. 나중에 마을의 주술사에게 맡겨야겠어.”
“고마워.”
샤카자이아가 레스 쪽으로 다가오고는 그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도 다쳤군.”
“그랬나?”
그 말을 듣고서야 레스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언제 생긴 건지 그의 손에는 긁힌 자국으로 빨간 줄이 찍찍 그어져 있었다. 지쳤던 레스는 처음 보는 기이한 동물이라도 되는 양 자기 손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손을 이리로 내어라.”
“놔두면 알아서 딱지가 질 텐데.”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샤카자이아는 따로 그릇에 물을 담아와 그의 손을 씻겨주었다. 멍하니 있다가 레스는 뒤늦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그녀의 손은 딱딱한 굳은살이 배겨 있었으나 손길은 부드러웠다. 손에 묻은 검댕과 마른 피가 씻겨질 즈음 레스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어디 아프나? 얼굴이 붉다.”
“더워서.”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샤카자이아는 더 묻지 않고 그의 이마에 손을 댔다.
“정말 그러네. 아까 열을 너무 쪼여서 그러나?”
그에게는 방금 쬔 산불보다 그녀의 손이 더 뜨거웠다. 상대의 의도가 순수해서 더 곤란했다.
“나한테 곰 비계가 있다. 다친 곳에 아주 잘 듣지.”
그녀는 항아리에서 기름을 한 덩어리 꺼내 그의 손에 정성껏 발랐다. 걸쭉하면서도 끈적거리는 물질이 섬세한 손길을 따라 덮이니 레스는 너무 당황해서 의례적으로 해야 할 감사의 말조차 까먹었다. 샤카자이아는 마른 옥수수 잎사귀로 다친 곳을 단단히 감싸고 토닥거렸다.
“이래야 곪지 않고 금방 나아. 특히 넌 불에도 데였으니까 신중해야지.”
“이거 좋네.”
레스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봤다. 그러다 문득 둘은 이제 대화를 더 이어나갈 밑천이 떨어진 걸 느꼈다. 잠깐 아무 말도 없이 잡다한 일로 딴청을 피우다가 샤카자이아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텄다.
“어제 있던 일은 미안하다. 당연히 놀랐겠지.”
레스는 갑자기 제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나도 머리 때려서 미안해.”
“너희들이 괜찮다면 내 티피에서 묵어도 된다. 나만 쓰는 곳이니까 공간은 많아.”
“가족들은 어디에…?”
상대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자 레스는 경솔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서 바로 화제를 돌렸다.
“마침 아자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우리가 재앙 덩어리였을 수도 있지만.”
마음이 경직되어 있던 샤카자이아는 그의 능청스러운 말투에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레스는 먼지로 범벅이 된 망토를 벗고 가지런히 개켰다. 그녀는 무릎을 다소곳이 끌어안고 레스의 망토에 관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자수가 아름답군. 직접 한 건가?”
레스는 멋쩍게 웃었다.
“선물 받았어. 망토 따로 자수 따로. 총을 잃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절대 포기 못 했지.”
그는 망토에 난 자수를 손으로 집어가며 차근히 말했다.
“이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전부 일종의 부적이야. 고향 사람들은 어린애한테 병마가 피해가라고 이것보다 훨씬 자수로 빼곡한 옷을 입혀줘. 자수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거나 돈으로 사서는 안 되고 가까운 사람이 진심을 담아서 만든 거여야만 해.”
“멋지다.”
상대의 순수한 반응에 그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그때 바깥이 시끄러웠다. 주민들이 이쪽으로 몰려있었다. 일단 숲에 났던 불은 완전히 정리된 듯하였다. 샤카자이아가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들과 말을 나눴다. 그동안 레스는 아자리의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을 갈고 그녀를 살폈다.
“우리는 아직 시작도 안 한 거 같은데 벌써 난관이네. 그 정도로 세상이 엉망인 걸까?”
아자리는 끙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멍하니 있던 그에게 샤카자이아가 천막 안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을 걸었다.
“바깥으로 나와라. 네 일행이 돌아왔다.”
레스는 아자리의 이불을 끌어 올려주고 샤카자이아를 따라갔다. 단테는 마을 광장에서 일행이 가져왔던 짐 위에 걸터앉아서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서 레스가 물었다.
“안 좋은 소식이야?”
“마차가 사라졌어요.”
단테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 거 같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더 나쁜 소식도 있어?”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쪽으로 피신시켰던 아이들도 납치됐어요. 사람도 몇 명 다쳤고요.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을 때 당했답니다. 아무래도 그 마왕군 놈들이 준비는 미리 해놓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저희 마차가 나타난 걸 보고 적당한 때라고 판단했던 거 같아요.”
샤카자이아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단말마를 뱉었고 레스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우리가 재앙 덩어리였구나.”
샤카자이아가 물었다.
“대체 아이들은 뭐하러 잡아간 거지?”
“최악의 경우에는 잡아간 애들을 시장에 팔아버릴지도.”
단테의 말을 듣고 그녀는 넋을 잃었다. 레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노예제 폐지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건 거짓말이야. 너희 종족은 값이 비싸. ”
단테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 생각은 어디든 똑같으니까요.”
얼마나 치가 떨렸는지 그녀의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였다. 샤카자이아는 어떻게든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 애써 참으며 말했다.
“그놈들 머리 가죽을 벗겨버리겠어!”
레스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확률은 낮아. 마계에서 온 놈들이니 숲을 나가도 거래할 곳을 찾는 건 힘들어. 내가 보기엔 이쪽을 도발하려고 데려간 거 같아.”
그제야 샤카자이아는 이를 악물고 조금이나마 평정을 되찾았다.
“틀린 말은 없군.”
두 남자는 예민해진 샤카자이아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그녀는 결심하고 말했다.
“추장님을 만나러 가야겠다. 너희들은 내 집에 있어.”
레스는 자리를 떠나려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말했다.
“같이 가.”
샤카자이아는 바로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봐요.”
단테는 그렇게 말하고 아까 두 사람이 왔던 방향으로 걸었다. 두 사람도 서둘러 갔다. 추장의 천막 앞에는 흥분한 주민들로 북적였다. 분명 사라진 아이들의 가족이리라.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어서 두 사람은 일단 멀찍이 떨어져서 상황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계속 기다리다가 지루해진 레스는 샤카자이아에게 잡담을 걸었다.
“다른 동료들은 안 만나?”
“알아서들 할 거다.”
“따르는 선임이나 가르치는 후임이 있을 거 아냐. 너희는 그런 거 없어?”
예상 밖의 질문이었는지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레스는 상대가 왜 당황하는지 영문을 몰라서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그의 생각은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샤카자이아는 레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걸 보고 또 당황했다.
“가… 갑자기 왜 그래?”
뒤늦게 표정을 관리하면서 레스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란이 나는 쪽을 보니 누군가가 인파를 가르며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레스는 상대에게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당당한 태도와 위엄으로 그가 추장이라는 걸 알았다.
“애는 왜 괴롭히는 겁니까?”
레스는 다짜고짜 추장에게 면박을 줬다. 추장은 당연히 놀랐고 가뜩이나 갑자기 나타난 추장의 모습에 긴장했던 샤카자이아는 그 때문에 기절할 뻔했다. 공용어를 몰라서 방금 말을 알아듣지 못한 주민들도 분위기를 통해서 덩달아 당황했다. 그녀가 레스에게 어버버 더듬거렸다.
“무슨 짓이야. 너 미쳤어?!”
그 순간 그녀의 공용어 억양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추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친구들 말대로 아주 재밌는 사람이군, 자네.”
레스는 아까의 기세 그대로 다시 말했다.
“어제 샤카자이아가 저희 말고 다른 사람과 맞닥뜨렸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2인 1조가 기본인데 홀로 먼 곳으로 보내놓다니! 하루 이틀이 아닌 모양인데 왜 내버려 둡니까!”
보다 못한 그녀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난 지금 근신 중이야. 무슨 생각으로 흥분한 건지 모르겠는데 추장님에게는 잘못 없어!”
추장은 침착하게 손을 들어 올려 군중들의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레스도 일단 진정하고 무안한 표정으로 옷 주름을 가다듬으며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들어오게.”
추장은 방금 자신이 나왔던 천막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레스는 자기가 사고 쳤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추장은 레스만 이쪽으로 다가오기에 가만히 있던 샤카자이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레스와 샤카자이아는 추장을 따라서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추장은 안으로 따라오려던 자신의 수행원들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안에는 이제 세 사람만 있었다. 샤카자이아는 너무 겁먹어서 여태껏 숨 쉬는 걸 까먹었다가 이제야 바람 부는 소리를 내며 몰아 쉬었다. 추장은 담뱃대를 물어서 연기를 한 모금 뻐끔거렸다가 부리를 레스 쪽으로 돌렸다. 레스는 담뱃대를 들고 바라보기만 했다. 샤카자이아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흘겨보며 속삭였다.
“어서 피워 이 얼간아…!”
샤카자이아는 또 매우 자연스러운 공용어 억양을 냈다.
“관습이라고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네.”
추장은 레스에게서 담뱃대를 돌려받았다. 레스는 뒤늦게나마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금연할 때 크게 고생했거든요.”
“할 리아나하 바다트 와카안낙 휘 모아휘판(그녀의 모습이 자네 일 같아서 그랬던 거지?).”
레스는 유창한 모국어를 듣고 깜짝 놀랐고 샤카자이아는 무슨 말을 한 건지 몰라서 당황했다.
“그걸 어떻게?”
“라 투자드 마하랏 크하낫 마투바튼, ‘앤 내흐 앨쉐이’ 민 알다키힐 왁하리지(‘특별한 기술’은 필요 없어, 자네는 겉과 속이 똑같아). 아무튼 ‘바다위운’를 만난 건 참 오랜만이군.”
뜸을 들이고 레스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방금 실언은 정말 죄송합니다 추장님.”
“사쿠라비들은 불명예와 불의를 못 참지. 시대가 변해서 요즘은 어떤지 몰랐는데 아직도 그 정신을 지키는 사람이 없진 않구먼.”
레스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제가… 워낙 겁 없이 사는 일에 익숙해져서… 뭐라 변명할 말이 없군요.”
“그만한 기개가 있으니까 황무지를 건너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지? 천막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것도 싸움을 돕겠다고 왔을 거고. 그 요청에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야. 우리는 자네를 손님으로 맞은 이상 그 어떤 강요도 할 수 없지만 위험에 나서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네.”
샤카자이아는 바깥에서 분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소심하게 움츠려 있었다. 추장이 헤아리기 어려운 눈빛으로 샤카자이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할 말이 있다면 솔직하게 하라.”
마치 절벽 앞에서 한쪽 발을 들어 올린 사람처럼 그녀는 입을 열기까지 각오를 해야 했다.
“제 담당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는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너에게 맡기는 소임은 손님을 지키는 것이다.”
말하다 말고 추장은 레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는 덧붙였다.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원하는 바를 들어주어라. 너는 일단 나가거라.”
말을 거는 대상은 분명 샤카자이아인데 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는 것인지 레스는 의문에 빠졌다. 심지어 추장은 은근슬쩍 레스를 향해 티 안 나게 눈짓 비슷한 걸 했었다. 노골적으로 미심쩍었는데도 샤카자이아는 그마저도 눈치챌 여유나 생각이 없었는지 아무런 의심 없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실내에 둘만 남게 되자 레스는 말없이 상대로부터 설명이 오기를 기다렸다. 추장이 말했다.
“자네들 덕분에 큰 위기를 넘겼네. 한창 겨울을 대비하는 철인데 불이 저장고까지 번졌다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그건, 아자리가 다 했는데요. 전 한 거 없고.”
허허. 하고 추장은 평범히 웃었다.
“쉬게. 샤카자이아는 많이 가엾은 아이야. 잘 대해주게.”
마지막으로 추장은 일어서라고 손짓했다. 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를 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샤카자이아가 바깥에서 공손히 손을 모으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라고 하셔?”
“일단은 쉬래. 나중에 다시 부를 거 같아.”
“그렇군.”
레스는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가 내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분위기를 망쳐서 네가 말을 꺼낼 엄두가 안 난 거지? 그렇지?”
“무리한 부탁을 하러 간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샤카자이아는 감정을 닫은 모습으로 가만히 있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밥 가지고 오겠다. 먼저 가라.”